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8)화 (8/49)
  • “돌겠네…….”

    별하는 중얼거리며 모로 누웠다. 어둠 속에서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모닥불 연기를 아연히 응시하며 이런 상황이 되어버린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어째서 이곳에 누워 있는 거지? 억지로 잠든 척을 하면서.

    결코 원하지 않던 알파의 페로몬 냄새를 맡고 동요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재난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서유럽에 도착해서 멀쩡하게 배낭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계획에도 없던 크루즈에 오르도록 만든 그 나라의 내전까지 원망스러웠다.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념들에 빠져 입술을 잘근거렸다. 소변이라도 보고 올까 싶어 몸을 뒤척이는 그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장신의 인물이 우거진 수풀을 지나 이쪽을 향해 오는 소리였다. 별하는 얼른 눈을 감았다. 흐트러질 것 같은 호흡을 간신히 다잡으며 잠든 척을 했다.

    타인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다가온 이에게는 좀 전의 숨 막힐 듯한 페로몬 냄새가 여전히 진동하고 있었다. 밤바다에 들어간 것 같은 냄새도 느껴졌다.

    서늘하게 젖은 기운에 강렬한 체취가 한 꺼풀 씻겨 내려간 듯했지만, 맡는 순간 현기증이 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파비안은 자신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잎새 지붕 아래로 들어와 모닥불 곁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양손에 들고 있던 장작더미와 질긴 넝쿨로 줄줄이 엮은 코코넛 열매, 젖은 셔츠를 내려놓고 불씨가 삭아 없어진 모닥불을 살폈다.

    시커먼 숯덩이를 이리저리 들춰보더니 가만히 바람을 불어넣었다. 후우― 단번에 숯 안에 숨어든 불씨가 번득거렸다. 일부러 결을 살려 팬 장작들을 숯 위에 올리자 저절로 불이 붙어 타올랐다.

    되살아난 불빛에 셔츠를 벗은 파비안의 상반신이 훤히 드러났다. 쩍 벌어진 뼈대를 감싼 크고 작은 근육들이 움직임을 가질 때마다 젖은 대리석처럼 반들거렸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금발을 쓸어 넘긴 파비안은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고 주변을 정리한 후 고요하게 잠든 별하를 내려다보았다. 레인 코트를 살며시 들어 올려 청바지 밖으로 드러난 다리와 발을 살폈다. 벌겋게 부어올랐던 이전보다 확연히 나아진 상태를 확인하고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레인 코트를 똑바로 덮어주고 별하의 이마를 살짝 짚었다. 땀이 조금 맺혀 있었지만 열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맥박이 뛰는 목덜미를 쓸며 재차 체온을 쟀다. 고열이 내려간 것을 확실하게 확인하고서야 떨어져 가까운 옆자리에 머물렀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커질수록 불길도 강성해졌다. 파비안은 허벅지에 팔을 기대앉아 불 그림자에 묻힌 별하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볼록한 이마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히 떼어주며 이제 막 홍조가 가신 뺨을 스치듯 건드렸다.

    “…….”

    금방 깊은 상념에 잠겨든 회색빛 눈동자가 못내 어두웠다. 잠든 이가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자 굳은 눈길을 느릿하게 내리며 한숨을 흘렸다.

    그는 이제 그만 자려는 듯 제 팔을 뒤로 베고 누웠다. 나뭇잎 사이로 뜨문뜨문 보이는 밤하늘을 응시하다 곧 눈을 내리감았다. 흰 피부 위로 길게 드리운 속눈썹 그림자가 풀잎처럼 하늘거리더니 이내 잠잠히 가라앉았다.

    별하는 느지막이 돌아누워 파비안을 등졌다. 진땀이 배어난 등을 웅크리며 왕성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제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정도로 주변 온도가 올라갔지만 몸의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점점 더 심해져 핏기가 빠진 손끝까지 바들바들 떨렸다. 신열과는 전혀 다른 통증이 그를 괴롭히며 채찍질하고 있었다.

    파비안의 자위를 목격한 그때부터 발기한 페니스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귀두부터 고환까지 강한 위력에 움켜잡힌 듯 욱신욱신했다. 이미 흥건히 젖은 뒤는 자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열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별하는 자신도 모르게 발현하는 페로몬을 뒷사람에게 들킬까 봐 어금니를 물고 참았다. 그와 관련된 생각들을 일절 끊어내고 그보다 훨씬 시급한 문제들을 의식적으로 떠올렸지만 그야말로 머릿속이 새하�R다. 어떤 사고도 하지 못하고 흐트러진 날숨만 간간히 불어냈다.

    온 신경이 뒤쪽으로 향해 있는 자신을 스스로도 믿지 못했다. 알파라면 비열한 속물이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위력에 방어하듯 몸을 한껏 웅크렸다.

    다시 신열이 오른 듯 피부가 뜨거웠다. 히트는 오지도 않았는데 뱃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열덩어리를 견딜 수 없었다. 마치 발정 유도제를 복용한 것처럼 정신과 육체가 혼미하게 녹아내렸다.

    “하아…….”

    별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섹스가 하고 싶었다. 알파가 선사하는 달콤한 감각과, 절정을 꿰뚫어 무아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파비안의 열기를 원했다. 지금 이 순간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을 만큼 미치도록 강렬하게.

    * * *

    먹구름이 물러간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새파랬다. 간밤 동안 바짝 마른 모래밭은 이전 날보다 더 새하�R고 바다는 호수처럼 투명했다. 며칠간 악천후에 고립되었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호천기였다.

    뙤약볕 아래서 몇 시간에 걸쳐 재탄생된 SOS 구조 글자는 이전보다 훨씬 크고 두꺼웠다. 별하는 그것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다 문득 제게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를 돌아보았다.

    “……?”

    오전 내내 물에 들어가 있던 파비안은 어느새 셔츠를 걸친 차림으로 서 있었다. 단추를 잠그지 않아 복근이 뚜렷한 상반신과 배꼽에서부터 바지 안쪽으로 길게 이어진 금빛 체모가 훤히 내보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별하는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물건을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코발트블루 색상의 그것은 실크 재질이었다. 고무 처리된 윗부분에는 어디선가 많이 본 명품 브랜드 로고가 진하게 박혀 있었다. 고이 접힌 그것을 펼쳐 들자 바로 정체가 드러났다. 남성용 드로즈였다.

    새것처럼 깨끗한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별하는 고개를 들어 옆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네 거야?”

    파비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별하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이걸 왜 주는 건데?”

    “준다고 약속했으니까.”

    별하는 간밤의 기억이 없는 것처럼 데면데면하게 되물었다.

    “누구한테?”

    파비안은 신열을 앓았던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나긋하게 답했다.

    “지퍼에 털 끼어서 아프다고 했어. 그래서 이거 준다고 했고.”

    아무렇지 않게 술술 읊는 저음에는 민망해하는 기색이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019.

    별하는 당혹감과 수치심, 체념, 약간의 노여움을 일절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이제 안 끼어.”

    “음?”

    “그것보다 누가 실컷 입던 거 입기 싫어. 성의는 고맙지만.”

    그는 손에 든 것을 다시 내밀었다. 하지만 파비안은 돌려받지 않았다.

    “빨았어.”

    “…….”

    “깨끗하게.”

    깨끗하냐, 더럽냐 하는 시비 이전에 정체성에 관한 문제였다. 그보다 더 별하를 심란하게 만드는 건 실은 고급 팬티가 무척 탐이 난다는 데 있었다.

    별하는 파비안의 바지를 힐긋 곁눈질했다. 미끈한 핏을 뽐내며 멀쩡하게 입고 있었지만 텅 비어 있을 안쪽을 떠올리자 멋대로 입술이 움찔거렸다. 풀어진 표정을 짓지 않으려 턱을 물고 먼 바다를 내다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팬티를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툭 뱉듯 말했다.

    “어쨌든 잘 입을게.”

    파비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눈짓을 건네곤 돌아섰다. 별하 역시 무슨 일 있었느냐는 듯 하던 일에 집중했다. 물에서 잡아온 것들을 들여다보는 이에게 전혀 관심 없는 척 양각 문자만 재차 손봤다.

    더 이상 손볼 데가 없는 작업물에서 그만 손을 뗀 별하는 밀림으로 들어갔다. 해변이 내다보이지 않는 수풀로 들어가 주머니에 든 것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남의 팬티를, 그것도 알파의 팬티를 입는다는 게 상당히 꺼림칙했지만 지퍼에 체모가 끼거나 고환이 걸려 아픈 것보다는 나았다.

    청바지를 벗고 낯선 팬티에 두 발을 꿰어 끌어 올렸다. 골반을 지나 엉덩이와 성기를 감싸는 느낌이 상당히 부드러웠다. 입은 듯 만 듯한 착용감이 꽤나 좋았다. 고무 처리된 윗부분이 약간 헐렁해서 멋대로 움직였지만 불편감이 해소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별하는 팬티를 흡족하게 내려다보다 새삼 끼쳐든 자괴감에 한숨을 지었다. 얼른 바지를 입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대로 쉼터에 가서 낮잠이나 잘까 하다가 너무 무료하게 느껴져 다시 해변으로 향했다.

    부스럭―

    그 때 밀림 안쪽에서 작은 기척이 들려 별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

    그늘진 수풀은 고요했다. 맹수나 괴물의 그림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설치류라도 지나간 모양인지 더는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원숭이나 뱀일지도 몰랐다.

    파비안은 이곳에 온 첫날에 원숭이 무리를 봤다고 했지만 별하는 아직 마주치지 못했었다. 곤충이나 물고기, 특이한 모양의 해초를 본 게 다였다. 딱히 가리는 게 없어서 사람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종만 아니라면 주변을 돌아다니는 게 뭐든 상관없었다.

    휘이이― 휘파람을 불었다. 수목이 빼곡한 밀림 안으로 뻗어나간 음파는 얼마 못 가 되돌아왔다. 별하는 이내 흥미를 잃고 돌아섰다.

    탁 트인 해변으로 나가자 야자수 그늘 아래 앉아 뭔가에 열중한 파비안이 보였다. 불을 지핀 듯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잿빛 연기는 특유의 냄새를 흩뿌리고 있었는데 그 냄새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바로 생선 굽는 냄새였다.

    그는 곧장 파비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뭐야, 어떻게 잡았어?”

    새로 피운 모닥불 둘레에 나뭇가지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꽂혀 있었다. 단단하고 뾰족한 나뭇가지에는 손 한 뼘 길이의 작은 물고기들이 주둥이에서부터 꼬리까지 꿰여 익어가고 있었다. 상당히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였다.

    파비안은 나무 꼬치 하나를 모래에서 뽑아 제 옆에 몸을 낮춰 앉는 별하에게 건넸다.

    “운 좋게 양질의 나뭇가지를 찾았어. 단단하고, 탄성도 높고, 잘 부러지지 않아서 비늘을 쉽게 뚫고 들어가더군.”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주둥이를 꽉 다문 조개 몇 개를 모닥불에 집어넣었다.

    별하는 통째로 구워진 생선을 이리저리 살폈다. 처음 보는 종류였지만 대충 벗겨낸 비늘 안쪽의 흰 살이 제법 먹음직스러웠다. 그을린 부분을 살짝 거둬내고 살코기가 익었는지를 확인하며 말했다.

    “단순히 운만 좋아서 이런 걸 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닐 텐데.”

    파비안은 고난이라는 단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엷은 눈동자를 빛내며 물어왔다.

    “무슨 뜻이지?”

    별하는 내장이 약간 덜 익은 생선 꼬치를 불길 위에 올려 이쪽저쪽 돌려가며 구웠다. 저를 향한 시선에도 꿋꿋하게 손을 움직이다 느직하게 대꾸했다.

    “최첨단 작살을 갖고 있다 해서 모두가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나도 몇 번 시도하다 포기했어. 조그만 것들이 너무 빠르더라. 특정 알파의 동체 시력은 독수리 급이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나 보네.”

    파비안은 그제야 별하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이해한 듯했다. 생선 꼬치가 타지 않게 하나하나 돌려 꽂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해명했다.

    “요령만 깨우치면 누구든 할 수 있어. 난 어렸을 때부터 바다에서 수영하면서 물고기를 잡고 놀았거든. 고향이 시골이라.”

    “흐음.”

    별하는 그다지 관심 없는 듯 고개를 돌려 백사장을 내다보았다. 하늘도, 바다도 시야에 걸리는 것 없이 탁 트여 있었지만 어쩐지 답답한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턱을 괴고서 눌은 생선 껍질 사이로 육즙이 새어 나오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물음이 날아들었다.

    “불편한 곳은 없어?”

    별하는 무의식적으로 제 왼발을 꼼지락거렸다. 늦은 아침에 눈을 뜬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거슬리는 느낌이 없었다. 미미한 부기와 주근깨 크기의 아주 작은 흔적이 발등에 남아 있었는데 통증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고마, 쿨럭―”

    그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헛기침을 손등으로 눌러 막았다. 괜찮으냐는 듯 돌아보는 파비안에게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손에서 가만히 굴리던 생선 꼬치를 괜히 불 속에 집어넣었다 뺐다 하며 제멋대로 달싹거리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밤새 간호해 준 데 대해 감사의 인사를 건네야 하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그렇게 되면 간밤의 불상사를 전부 기억하는 꼴이라 선뜻 아는 체를 할 수가 없었다.

    파비안은 별하가 병환으로 인해 기억이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고, 별하 본인도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며 모른 척하고 있었다. 간밤에 벌어진 일들을 알아서 좋을 사람이 여기에는 없었다.

    별하는 야자수 그늘 위로 덧입혀지는 옆 사람의 그림자를 애써 무시하며 생선 꼬치를 불 밖으로 꺼냈다. 짭조름한 냄새를 풍기는 그것을 후후 불어 한 김 식힌 뒤 곧바로 베어 물었다.

    “앗, 뜨.”

    혀끝에 잠시 닿았던 살코기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파비안은 그것을 못 본 척하며 불길 안에서 어느새 입을 벌린 조개들을 나무막대로 하나둘 끄집어냈다.

    별하는 아침으로 바나나와 슈가애플을 실컷 먹고도 허기가 진 사람처럼 조급하게 생선을 뜯었다. 뜨거운 김을 삼켜 쿨럭쿨럭 기침하면서도 잘 익은 살코기를 입에 넣는 게 우선이었다.

    “천천히 먹어, 별하. 부족하면 더 잡으면 돼.”

    “으음, 생각보다 맛있는데? 너도 먹어봐.”

    맛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입에 들어오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단백질 덩어리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별하는 검게 그을린 부분까지 가리지 않고 깨끗하게 긁어 먹었다. 살코기와 함께 씹히는 지느러미 가시를 멀리 뱉어내고 등뼈 안쪽에 들어찬 내장도 한 입에 없애버렸다.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생선 꼬치들을 눈으로 훑어보는데 파비안이 구운 조개를 별하의 앞에 내려놓았다.

    “뜨거우니까 조심히.”

    별하는 생각보다 큰 조개의 등장에 군침을 삼켰다. 한국에서도 자주 먹었던 그것은 그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단지, 같은 조개이긴 조개인데 처음 보는 무늬와 모양이 조금 미심쩍었다.

    “예전에 말이야, 소라 잘못 먹었다가 식중독에 걸려서 생사를 오간 적이 있었어. 물속에서 내 발을 물었던 것도 어쩌면…….”

    파비안은 손을 멈추고 별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깨달은 안색이었다. 이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김이 폴폴 나는 조개를 회수해 갔다.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내가 먼저 먹어봐도 될까?”

    몸에 배인 매너는 극히 자연스러웠다. 별하는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 이유를 콕 집어내지 못했다.

    “그러든지.”

    파비안은 반드러운 입술을 벌려 조갯살을 입 안에 넣었다. 뽀얗고 탱글탱글한 덩어리를 새빨간 혀가 휘감는 순간 입술이 닫혔다. 느릿하게 턱을 움직여 씹을 때마다 도드라지는 하관 근육과 목덜미 뼈대가 미끈하면서도 남자다웠다.

    별하는 그 모습을 아연히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쳐 겸연쩍게 고개를 돌렸다. 양반다리를 풀고 한쪽 무릎을 세워 앉으며 애꿎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듯 털었다.

    서서히 타기 시작한 생선 꼬치들이 매캐한 연기를 일으켰다. 별하는 꼬치들을 멀찍이 뒤로 물려 모래에 꽂아 넣으며 말이 없어진 이를 힐긋 돌아보았다.

    “어때? 먹을 만해?”

    조개의 상태를 확인한 파비안은 영 심각한 낯빛이었다. 가만히 제 턱을 문지르며 고심하다 대답했다.

    “넌 먹으면 안 되겠다.”

    별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상해? 벌써 증상이 왔어? 온 거야?”

    “으음.”

    “안 좋아? 괜찮아??”

    파비안은 제게 박혀든 검은 눈동자를 더 무시하지 못했다. 돌연 그윽한 눈매를 휘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맛있는 건 혼자 먹어야 제 맛.”

    “…….”

    020.

    별하는 정색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파비안은 제 예상과 전혀 다른 상대의 반응에 가만히 웃음기를 거둬들였다. 껍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는 조개들만 별하의 앞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누군가의 무거운 한숨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나보다 노잼 인간이 존재한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네.”

    파비안의 무표정한 얼굴에 겸연쩍어하는 기색이 잠시 드리웠다가 사라졌다. 그는 가까운 생선 꼬치 하나를 손에 들고 짐짓 태연한 듯 말했다.

    “평판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별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생선 가시만 뽀얗게 남도록 살을 발라먹으며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네가 특별히 재미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네 얼굴 보고 웃은 게 아닐까?”

    “내 얼굴을 보고 웃는다고?”

    파비안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한국에서는 예쁘고 멋진 외형을 찬양하는 의미로 쓰이는 표현인데 서구권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된 것 같았다.

    별하는 자신이 실언했음을 곧바로 깨달았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텐데, 앵무새처럼 되짚어주고 싶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함께 지내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문제였기에.

    “뭐, 사람 취향이란 건 엄청 다양하니까 네 개그가 배꼽 빠질 정도로 재미있는 사람도 있겠지.”

    “…….”

    “만약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 네가 개그할 때 짧게라도 웃어준 사람들부터 찾아가. 찾아가서 점심이든, 저녁이든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드려.”

    “……굳이?”

    “굳이. 꼭. 진정한 네 사람들이니까.”

    진지하게 별하의 말을 경청하던 파비안은 결국 실소를 터트렸다. 비스듬하게 턱을 괴어 웃는 얼굴이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맑고 화사했다.

    별하는 꼬치를 눕혀 생선 내장을 뜯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입 안에서 걸리적거리는 잔가시까지 빠득빠득 씹어 먹으며 중얼거렸다.

    “진심이야.”

    파비안은 커다란 손으로 웃음기가 감도는 하관을 덮은 채로 별하를 응시했다. 다각도에서 비쳐든 빛발에 이색의 두 눈동자에 드리운 미소가 선명히 들여다보였다.

    “구조된다면 가장 먼저 이행하도록 노력하지.”

    몹시 달콤한 저음에도 별하는 감흥 없는 눈길로 그를 스쳐보고는 조개 구이를 손에 들었다. 독성이 있는 조개라 한들, 섭취 직후에 바로 반응이 올 리도 없었고, 까딱하면 어제와 같은 일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이제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이런 오지에서 이 정도의 음식이면, 조금 아프더라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열감이 남아 있는 껍데기를 기울여 조갯살을 입에 넣었다. 입 안 가득 들어찬 그것은 갓 빗어낸 절편처럼 쫀득쫀득했다. 얼마나 싱싱한지 진한 육즙이 입가에 한가득 고였다.

    짭짤하면서도 구수하고 또 깊은 맛을 음미하며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으로 꿀떡 넘어갔다.

    “음, 맛있네. 혼자 먹으면 더 맛있긴 하겠다.”

    파비안이 웃었다. 별하는 육즙이 묻은 제 입술을 핥으며 다시 하나를 들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주운 거야? 난 아무리 살펴도 안 보이던데.”

    두 볼을 불리며 먹어대는 그에게 두 눈을 꽂고 있던 파비안이 불쑥 손을 뻗어왔다. 별하의 입가에 묻은 검댕을 엄지로 살살 문질러 닦아주며 예사로이 대답했다.

    “우측으로 가면 낮은 바위 지대가 있어. 이것 말고 다른 종류도 꽤 보이던데, 해질녘쯤이면 게 같은 것도 잡을 수 있을 거야. 구워 먹기 쉽지 않겠지만.”

    “…….”

    별하의 턱 움직임이 느려졌다. 파비안의 체온 높은 손길을 홱 피해버리기도, 가만히 대놓고 있기도 불편해서 조개를 줍는 척 허리를 굽혀 손길을 피했다.

    “이제 우물만 파면 백년 만년 살아도 되겠네, 여기서.”

    별다른 감정 없이 손길을 거둔 파비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별하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대로 식수만 확보한다면 구조대가 올 때까지 1년이든, 10년이든 견딜 수 있었다.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만 야자수를 엮어 임시방편으로 가옥을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 필요했지만.

    그는 모닥불 안에 묵직한 나뭇가지를 밀어 넣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담담하게 물어왔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별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밀림 안으로?”

    “1주일 동안 돌아다녔는데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사람이 다니는 길 자체가 없어. 이곳을 지나는 경비행기도, 나룻배조차도.”

    말을 확실히 맺지 않아도 파비안이 하고자 하는 말을 별하는 금방 이해했다.

    “사실 전투기 같은 건 어제 봤어. 높은 고도로 날아서 이쪽은 보이지도 않았겠지만.”

    “미안하지만 그쪽은 가능성이 없다.”

    별하는 달콤한 조갯살을 꿀꺽 삼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답했다.

    “그건 그렇지.”

    “이대로 기다리는 게 현명한 선택인지 확신을 못 하겠어. 지금으로선.”

    파비안의 부드러운 저음에 감정은 실려 있지 않았으나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 별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따라왔다.

    “안쪽에 뭐가 있는지 깊이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잠깐만.”

    “길을 만들어가면서 주기적으로 별하, 너에게 신호를 남기도록 하지. 연기를 피운다든가, 나무에 흔적을 남긴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

    “다행히 네가 먼저 구조가 된다면, 사람들을 데리고 나를 찾으러 와줘.”

    별하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육체적으로는 거부할 수 없이 끌리고 있었지만 그 안쪽의 것들은 별개였다. 그럼에도 단 하나뿐인 동료와 떨어져야 하는 상황을 대번에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구조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는 건 맞지만 혹 그 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면? 출구 없는 밀림에 갇혀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는 이곳에서 홀로 늙어 죽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득히 먼 미래의 모습이 아닌 바로 내일, 어쩌면 오늘밤 벌어질 일처럼 또렷하게 그려졌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알겠는데, 지금 당장 급한 게 아니니까 좀 더 생각해 보자. 응?”

    파비안은 순순히 고개를 까딱였다. 별하는 남은 음식들을 더 먹지 않았다. 그을음이 묻은 나뭇가지로 발 밑의 모래를 뒤적이며 말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

    “정정당당하게 정하자.”

    “……무엇을?”

    고개를 든 별하는 파비안과 눈을 똑바로 맞췄다.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흰자위가 불빛에 반짝거렸다. 포도알처럼 새카만 눈동자는 작은 흔들림도 없이 저를 향한 오드아이와 마주했다.

    “알파라서 총대를 짊어지는 건 공평하지 못해.”

    “…….”

    “내기를 하든, 뭘 하든 공정한 방법으로 안으로 들어갈 사람을 정하는 게 맞는 거 같아.”

    파비안은 선명한 오드아이를 깜빡이지도 않고 별하를 직시했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길이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듯, 소년의 그것처럼 순진한 듯 미묘했다. 그는 굳게 닫힌 입술을 열어 차분한 저음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알파라서 힘을 과시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어. 구조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고 싶을 뿐.”

    “그럼 확실히 해. 나도 육군 만기로 전역했고, 너보다 완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다른 기술들은 많아. 지포라이터 없이도 5분 만에 불을 피울 수 있어. 나무도 잘 타고 밤눈도 꽤 밝아.”

    파비안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 없는 한숨을 흘렸다.

    “좋은 능력을 갖고 있군.”

    “물론이지.”

    “너의 말대로 시급한 문제는 아니니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해. 누가, 언제,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지.”

    별하는 찬성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진 자리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하늘도, 땅도, 전부 다 잠든 것처럼 고요했다. 파비안은 일렁이는 불길을 응시하며 얕은 생각에 잠겨 들었고, 별하는 입맛이 떨어져 보드라운 모래만 뒤적였다. 그러다 말이라도 맞춘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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