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9)화 (9/49)
  • “……?”

    “……?”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별하가 먼저 눈길을 피했다. 파비안도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어색하고 불편한 기류는 사라지지 않았다.

    “…….”

    “…….”

    이유도 없이 머리끝이 쭈뼛거리는 분위기를 별하는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며 괜히 주절거렸다.

    “비 온 뒤라 그런지 벌레가 많이 보이더라. 팔에 두 군데나 물렸어. 넌 안 그래?”

    파비안이 고개를 저었다.

    “단내가 벌레를 부른다는 말이 있지.”

    “너희 나라에서도 그런 표현을 써? 우리나라에서도 무슨 혈액형은 달고, 무슨 혈액형은 독하고 그런 거 믿는데.”

    “그건 잘 모르겠지만, 달콤한 냄새가 나는 아기들이 벌레에 잘 물리니까.”

    “……난 그런 체취 없어. 전혀.”

    파비안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수긍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오메가가 알파에게서 느끼는 특유의 체취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알파 역시 오메가에게서 특유의 진한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단내부터 시작해 온갖 향수의 질감으로 표현되는 그것은 바로 페로몬이었다.

    021.

    사춘기를 보내며 본능적으로 깨우치는 부분인데도 별하는 마치 방금 처음 인지한 것처럼 당혹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와의 입장 차이를 일부러 자각하고 싶지 않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

    “짠 음식을 먹었더니 갈증 나네. 코코넛 가지러 갈 건데 필요해?”

    파비안이 바로 몸을 세워 일어나 건실히 되물었다.

    “같이 갈까?”

    별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까지 더해 내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구조대가 언제 올지 모르는데 여기 지켜야지. 필요하면 말해. 엮어서 가져올게.”

    “난 괜찮아. 근방에 전부 야자수라.”

    “그래도 거기 있는 거 아깝잖아. 지금은 뭔가 나무 타기도 귀찮고.”

    그는 파비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그늘의 경계를 넘어서서 밀림으로 들어가는 중에도 오드아이의 강렬한 눈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뒤통수를 찌르는 듯한 감각이 몹시도 선득해 나직이 혀를 찼다.

    “쯧, 빌어먹을.”

    쉼터에 남은 과일은 코코넛 열매 세 덩이가 전부였다. 모닥불은 진즉에 꺼져 있었고 바닥에 깔린 나뭇잎 위로 개미들이 줄지어 지나고 있었다.

    별하는 코코넛 하나를 그 자리에서 쪼개 깨끗하게 들이켰다. 건건한 갈증을 없앤 뒤에는 나머지 것을 양팔에 끼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해변으로 돌아가려다가 좀 전의 어색한 분위기가 생각나 발길이 우뚝 멈췄다.

    “…….”

    그는 파비안의 제안대로 할까 심히 고민했다.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불편하다고 동료와 헤어지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동료와 함께 있어도 인간이 그리운데, 이마저 손에서 놓아버리고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건 고독사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반면, 밀림을 가로질러 휴화산에 오른다면 이곳의 지리를 꿰뚫을 수 있었다. 어디가 어디로 통하는지, 구조되기에 최적의 장소는 어디인지 등등 이점이 컸다.

    그렇다고 둘이 함께 움직이는 것은 행여나 해안을 지나는 구조대와 마주치지 못하게 될까 봐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만약 초기의 계획대로 움직이게 된다면 결국에는 각자의 임무에 집중해 서로의 생사를 빌어주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다. 먼저 구조되는 사람이 나머지 사람의 미래를 책임지는 조건으로.

    문득 파비안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별하는 한숨을 지었다. 입술이 멋대로 달싹거려서 어금니를 물고 눈길을 떨궜다. 뺨 언저리에서부터 눈가까지 간지러운 듯한 이상한 기분에 손등으로 문질렀다가 손톱으로 긁적였다.

    그럼에도 이상한 기분은 가시지를 않았다. 의식할수록 더 또렷해져서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근처 바위에 걸터앉은 그는 햇살이 비쳐 더없이 짙푸른 녹음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설마 이게 스톡홀름 증후군인가.”

    피해자가 공포심을 일으키는 대상에게 감화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뜻이었지만 미묘하게 다르다고 생각했다. 별하의 입장에서 보면 공포심을 일으키는 대상은 파비안 블랙그레이가 아니라 작금의 상황이었다.

    “……아니면 흔들다리 효과?”

    위기의 상황에서 심장이 고동칠 때 같은 공간의 이성, 혹은 동성에게 사랑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

    별하는 전자보다 후자에 더 강한 확신을 느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기분들이 뇌의 오류에서 기인한 부작용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자신이 익히 알고 있던 안하무인의 알파와 다르다고 해도, 허세라고는 없는 지덕체를 겸비한 하이 알파라고 해도, 한 번 발정기를 함께 보냈다고는 해도, 얼마 되지 않은 기간에 이렇게나 누군가를 의식하게 된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뭔가에 단단히 홀린 듯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이 어려웠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건지, 원인을 찾기 위해 혼탁한 머리를 가까스로 굴려가며 궁리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정수리가 뜨끈뜨끈해질 정도로 골몰하는데, 불현듯 수풀 안쪽에서 기척이 일었다. 크지 않은 생물체가 급히 도망가는 듯한 소리였다.

    “―?!”

    별하는 벌떡 일어났다. 사람이었다. 확실하게 보진 못했지만 사람의 형상, 정확히는 이쪽을 발견하고 도망가는 흑인종 아이의 뒷모습이었다.

    지금 쫓지 않으면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아이 혼자 이런 밀림을 돌아다닐 리는 없을 테고 주변에 보호자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도움이 절실했다. 그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려 노력하면서도 이미 아이가 사라진 수풀로 달리고 있었다.

    “헤이!”

    앞선 기척은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멀리까지 달아났다. 얼굴을 때리는 수풀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가던 별하는 수목의 빽빽한 밀도에 더 달리지 못했다. 상체를 숙여 파초와 넝쿨을 파헤치듯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느 순간 사라진 기척을 찾아 주변을 맴돌았다. 바위 뒤, 야자수 위, 나무보다 장대한 수풀 속을 들춰도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멀리 가버렸거나 찾을 수 없는 곳에 꽁꽁 숨은 게 틀림없었다.

    이곳 어딘가에 거주하는 주민이 분명했고, 고함이라도 질러 부르고 싶었지만 맹수나 또 다른 미지의 위험 인자와 마주칠까 흐트러진 호흡만 눌러 삼켰다.

    “제발, 하아…….”

    파비안을 불러와 함께 찾을 생각으로 왔던 길을 돌아 나가려는 그 때였다. 수풀 너머의 멀지 않은 곳에서 사라졌던 기척이 다시금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별하는 서슴없이 수풀을 가로질렀다. 목련만큼 크고 새하얀 꽃송이들을 틔운 무성한 관목 군락을 헤쳐 낮은 풀숲으로 빠져나간 순간 시선들이 날아들었다.

    “……?!”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은 별하는 부릅뜬 눈을 끔뻑거렸다. 커다란 꽃송이를 하나씩 입에 물고 있던 이들, 정확히는 작고 새까만 원숭이들이 처음 보는 생물체의 출현에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순식간에 도망갔다. 우끼끼― 우끼끼끼―

    저들을 사람이라고 착각한 별하 역시 경미한 패닉 상태였다. 움직이는 모양새나 반응하는 부분이 사람과 매우 흡사해서 더 당황스러웠다.

    별하는 금세 고요해진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부산물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흰 꽃송이였다.

    “…….”

    원숭이들은 그것을 하나씩 손에 들고 맛있게 먹고 있었다. 별하는 막연히 생각했다. 그들이 먹을 수 있다면 사람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줄기에 붙은 꽃송이 하나를 뜯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수술이 불그스름한 꽃은 코를 가까이 대지 않아도 짙은 향기가 느껴졌다.

    바깥 방향으로 곡선을 그린 꽃잎 하나를 이로 살짝 물었다. 씁쓸한 첫맛 뒤로 미미하게 단맛이 느껴졌다. 아예 꽃잎 한 장을 뜯어 입에 넣었다. 테두리만 먹었을 때보다 진한 단맛이 느껴졌다.

    새로운 음식을 발견한 별하는 허탈한 한숨을 뱉으며 실소했다.

    적당한 두께의 넓적한 잎사귀는 바구니 소재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질긴 넝쿨을 이용해 잎사귀들을 엮어 만든 바구니 안에는 무게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꽃송이들로 가득했다. 별하는 그것을 품에 안고 해변으로 나갔다. 파비안의 반응은 예상보다 좋았다. 꽃을 맛보고는 위치까지 알아갔다.

    그는 야자수 나무 아래를 가리키며 조금은 미안한 듯 말했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알려줘.”

    그곳에는 산처럼 쌓인 코코넛 열매와, 슈가애플, 바나나, 초식공룡 등갑 같은 녹황색 과일까지 이미 한가득이었다. 며칠간 음식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언제, 어디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찾아낸 건지 의아하다 못해 신기했다.

    별하는 모닥불 근처 나무 아래에 제 잠자리를 만들며 물었다.

    “대단하네. 어디서 이렇게 찾아내는 거야? 난 그것도 원숭이랑 우연히 마주쳐서 발견한 건데.”

    파비안은 칭찬에도 동요하는 기색이 전연 없었다. 새들이 날아오르는 밀림을 돌아보며 대수롭지 않은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냄새가 나.”

    “냄새가 난다고? 설마 냄새로 찾아낸다는 뜻은 아니지?”

    “그런 셈이지.”

    별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파라는 존재가 오메가와 베타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자들이라는 건 익히 알았지만, 이런 식의 남다른 능력을 보일 때면 거북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간신히 쌓아올린 얄팍한 친분이 무색하게 하이 알파인 파비안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다. 그러다 그의 텅 빈 바지 안쪽이 떠올라 금방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가벼운 기분으로 잠자리를 확보한 후에는 달리느라 지친 몸을 뉘였다. 부드러운 모래가 이제는 제 방 침대보다 폭신하게 느껴졌다.

    배는 부르고 몸은 편했다. 아픈 곳도 없고 날씨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뙤약볕이 따가웠지만 나무 그늘은 선풍기를 틀어놓은 듯 시원했다. 낮잠 자기에 제격인 날씨였다.

    별하는 느른하게 가라앉은 한숨을 내쉬며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빛살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 모닥불 너머에서 흰 꽃을 씹던 파비안도 시원한 모래밭에 등을 붙여 눕는 게 시야로 보였다.

    활짝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상반신이 탄탄하면서도 미끈했다. 그늘에서도 반짝이는 피부는 옅은 얼룩이나 작은 반점조차 없는 순백인데도 연약하다거나 여성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다.

    022.

    파비안의 몸은 맨눈으로는 식별이 힘든 미세한 모공까지 완벽히 재현해 낸 세기의 석고조각상 같았다.

    별하는 일어나 남방을 벗었다. 깃발처럼 나무에 걸려 있는 레인 코트 옆에 그것을 걸어두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팔을 베고 누운 파비안과 눈길이 스쳤지만 이전의 불편하고 어색한 기류는 더 이상 감지되지 않았다.

    졸려선지, 슈트 바지 안쪽의 빈 공간이 불쑥 떠올라선지, 날선 감정보다도 뜬금없이 입술을 삐죽이지 않도록 턱을 단단히 물었다.

    그는 잔잔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맨발을 통해 느껴지는 바닷바람이 간지러워 발가락을 곰지락거렸다. 모닥불을 뒤적이는 파비안의 작은 기척이 귓전을 건드렸다.

    별하는 그다지 친분이 없는 옆 내무반 동기를 대하듯 성의 없이 물었다.

    “약혼자는 있어?”

    불똥이 바깥으로 튀지 않도록 정리하던 파비안이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약혼자?”

    “하이 알파들은 우성 유전자를 보존하려고 어렸을 때부터 계약을 맺는다고 하던데. 너도 그런 짝이 있어?”

    파비안은 대답이 없었다. 별하는 눈을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모래에 한쪽 팔을 기대 누운 채로 모닥불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평소보다 더 표정이 없어 언뜻 화난 것처럼 보였다. 혹시 지뢰를 밟은 건가 해 얼른 덧붙였다.

    “그냥 할 것도 없고 그래서 물어본 거야.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오해하지도 말고.”

    파비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부께서 맺어주신 오메가는 있었어. 각인하진 않았지만.”

    별하는 그에게서 눈을 떼고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하이 오메가들 페로몬이 그렇게 끝장난다던데.”

    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궁금증이 또렷하게 실린 물음이 바로 뒤를 이었다.

    “어떻게 됐어?”

    “파혼했어. 오래전에.”

    “미안. 지뢰일 줄 몰랐네.”

    “별다른 감정은 없어. 그는 내 짝이 아니었던 것뿐이니까.”

    무심한 어투만큼 실로 그런 관계, 그 정도였던 것 같았다.

    “그렇군. 그럼 애인은?”

    파비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들이 일렁이자 하얀 햇빛 조각이 미끄러져 내렸다. 별하는 몸을 뒤척여 햇빛을 피하며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오해하지 말라니까.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서 하나뿐인 동료에 대해 알아두려는 거니까.”

    “……없어.”

    “……?”

    잠깐의 정적이 별하의 실소에 의해 날아갔다.

    “애인 없는 알파라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사실이니까.”

    “흐음.”

    “그런 관계를 맺을 여유가 없었어. 일도 바쁘고 해서.”

    그에게 거짓말을 즐기는 기질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별하는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하이 알파가 지극히 이성적이라고 해도 근본은 알파였다. 본능이 우선인 알파에게 상대가 없다는 건 무성욕자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자의든 타의든, 사고든 실수든, 자신에게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실상은 그렇더라도 뭔가 사연이 있겠거니 해 그 주제에 관해서는 더 캐묻지 않았다.

    “사진 찍고 그러는 거 크루즈에서 봤어. 모델이야?”

    “비슷해.”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더라. 그쪽에서 인기 좀 있나 봐?”

    파비안이 한숨처럼 웃었다.

    “알아본다기보다, 특이한 복장에 그런 소품들을 사용하는 무리는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니까.”

    꽤나 겸손한 발언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보이도록 꾸미는 듯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별하는 하품을 하며 눈두덩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국적은 어디야? 신장으로 봐서 북유럽 사람 같은데. 나도 잘은 모르지만.”

    “맞아.”

    “그래?”

    “북유럽계의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내 조상들은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야. 영어로 너와 대화가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지.”

    “흐음. 그래서 오드아이인가?”

    “글쎄.”

    파비안은 결코 단정 지으며 확신하는 어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별하는 무거운 눈을 감으며 큰 의미 없이 기계적으로 물었다.

    “나이는?”

    “스물아홉.”

    “…….”

    “30 마이너스 1.”

    제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던지 한 번 더 대답했다. 감겨 있던 검은 눈동자가 옆 사람을 향했다. 저와 비슷한 정도로 짐작했던 별하는 파비안의 동안 외모에 새삼 감탄했다.

    “지금까지 몰랐는데, 너도 수염이 잘 안 나는구나? 아군이었네.”

    “…….”

    파비안이 제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더니 뭔가를 꺼내 별하가 누운 쪽에서 잘 보이도록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늘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손바닥 반절 크기의 희고 둥근 뭔가가 있었다. 플라스틱 재질에 얄팍한 모양새가 설핏 카드 형태의 멀티툴처럼 보였다.

    “그게 뭐야?”

    파비안은 그것의 앞뒷면을 돌려서 보여주며 답했다.

    “조개껍데기.”

    “……?”

    “다른 종보다 강도가 월등해.”

    월등한 강도를 지녔다는 조개껍데기를 멀뚱히 쳐다보던 별하가 물었다.

    “조개껍데기는 왜 가지고 다니는데?”

    파비안이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조개껍데기의 용도를 짐작하지 못하는 이에게 성큼 다가와 그것을 건넸다. 별하는 건네받은 것을 코앞으로 가져와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미미하게 삼각의 형태를 띈 조개껍데기는 한 선분이 다른 두 선분보다 확연히 날카로웠다.

    “잘 벼리면 생각보다 예리해지지. 나이프만큼은 못하지만 수염이나 간단한 편리를 볼 수는 있어. 넝쿨을 절단한다거나 하는.”

    “아.”

    별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켜 그것을 불빛에 비춰보았다. 역시나 면도기 대용으로 쓸 수 있을 만큼 예리하게 갈려 있었다. 크게 뜬 두 눈이 마치 신세계를 목격한 듯했다.

    “손재주도 좋네. 외모만 찬양받기에는 능력이 아까운걸.”

    “…….”

    “다른 일은 안 해? 만들거나 조립하는 거 잘할 것 같은데.”

    “지금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목공 일을 했었어. 한동안.”

    “목수?”

    “개인사로 원하는 만큼 집중하진 못했지만.”

    “완전히 다른 이미지네. 진짜 의외다.”

    파비안은 별말 없이 눈길을 내렸다. 또 오해를 산 건가, 했지만 별로 심상한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모닥불을 내려다보는 오드아이가 반짝반짝했다. 재능을 인정하는 칭찬이 썩 마음에 들었던 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별하는 자리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얼른 조개껍데기를 내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받아 들지 않았다.

    “가지고 있도록 해. 아쉬운 대로 쓰기 괜찮아.”

    “아끼는 거 아냐? 이왕 까발려진 거 솔직하게 말해서 나 수염 안나. 내가 갖고 있어봤자 코코넛 과육이나 벌레 물린 데 긁는 용도로 쓰겠지.”

    파비안은 듣기 좋은 코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면도보다 훨씬 유익한 목적이군.”

    “…….”

    “어떻게 사용하든 도구는 그저 편리하면 되는 거야. 치아나 손톱이 필요한 작업을 할 때는 특히나.”

    별하는 제 손에 들어온 조개껍데기를 만지작거렸다. 피부가 베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단면을 더듬으며 정 뜻이 그러하다면 잘 쓰겠다는 눈길을 보냈다.

    파비안은 곧 자리로 돌아갔다. 그늘에 편히 누워 다음에 날아올 질문을 기다렸지만 더 이상의 물음은 없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

    별하가 턱을 들어 그를 돌아보았다. 둥그렇게 뜬 눈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파비안은 기다리지 않고 물음을 던졌다. 뜬금없이 스무고개를 시작한 누군가처럼.

    “라스트 네임은?”

    “라스, 어? 뭐?”

    별하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별하, 너의 라스트 네임.”

    “……권.”

    파비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건? 컨?”

    이전의 발음을 열심히 따라했지만 묘하게 비껴나갔다. 별하는 얕은 한숨을 뱉었다. 조개껍데기를 청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악센트가 맞지 않는 그의 발음을 교정해 주었다.

    “권. 궈, 언.”

    “궈, 언.”

    “권.”

    “권.”

    “Good job.”

    파비안은 커다란 장애물을 넘은 듯 안색을 밝혔다. 혈색이 오른 두 뺨이 연한 분홍빛으로 반들거렸다.

    “Okay. 별하 권.”

    “한국에서는 권 별하. 라스트 네임이 앞에 와.”

    “그렇게 되는군.”

    파비안은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데 있어 꽤나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듯했다. 별하의 라스트 네임을 소리 없이 되뇌다 곧 나른한 한숨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군대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 이미 알고 있으니, 크루즈를 타게 된 사연부터 시작할까?”

    별하는 그를 못 본 척 눈을 감았다. 뒷머리 쪽 모래를 끌어와 베개를 만들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별로 재미없을 거야. 난 네 인생과는 다르게 범상한 소시민이거든.”

    파비안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이런 오지에서 낮잠을 자는 일보다 무료한 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기도 했다. 상냥한 저음이 목 전체를 울리며 흘러나왔다.

    “부담 갖지 마.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단 하나의 동료에 대해서 알아두려는 거니까.”

    “…….”

    “너와 마찬가지로.”

    별하의 한쪽 입가가 어렴풋이 휘었다. 감은 눈을 뜨고 햇빛을 머금어 새파랗게 빛나는 이파리를 올려다보며 굳게 다문 입술을 열었다.

    “뭐, 못 할 것도 없지.”

    023.

    조난을 당한 지 보름째였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부터 근처 바위에 바를 정 자로 날짜를 기록하긴 했지만 정확하진 않았다. 파비안이 획을 긋는 날도 있었고, 별하가 그러는 날도 있었다. 간혹 둘 다 기록하기를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랬기에 정확히 며칠이 더 지났는지는 두 사람 모두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거친 태풍을 겪기도 하고, 병을 앓기도 하고, 과일이 나는 근방의 밀림을 훤히 꿰뚫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도 상공을 지나는 비행기나 주변 항로를 지나는 선박은 없었다.

    별하는 명치까지 오는 수심에서 몸을 씻다 말고 먼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햇빛이 강해 시야가 좋지 못했지만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광대한 대자연인데도 해방감은 없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거울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과 같은 절망감까지는 아니었지만 나갈 수 없는 처지를 자각할 때면 우울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별하.”

    별하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상반신을 탈의한 파비안이 바로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속옷만 입은 별하에게서 눈길을 내리며 손에 든 것을 내보였다.

    “……네가 말했던 게 이건가?”

    커다란 손바닥 위에서 새빨간 불가사리 두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별하는 반색하며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아, 이거 맞아. 난 도저히 못 찾겠던데 용케 두 마리나 잡았네. 어디서 찾은 거야?”

    파비안의 대답이 없었다. 별하가 눈을 들어 올려다보자 불가사리를 선뜻 건네어 왔다.

    “바위 지대에서.”

    별하는 그것을 양손으로 들었다. 제 손바닥 위에서 간지럽게 몸체를 뒤트는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아무래도 그쪽으로 거처를 옮겨야 하나? 백사장 폭이 여기보다 넓어서 구조 글자도 훨씬 크게 만들 수 있을 텐데.”

    “…….”

    별하가 고개를 드는 순간 파비안이 돌아서서 해변으로 들어갔다.

    “……?”

    평소 같으면 여러 가지를 물어오거나 또는 가르쳐 주려고 했을 텐데 오늘따라 그의 말수가 뜸하고 태도도 묘하게 달랐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할 때부터 약간 컨디션이 저조해 보였지만 별하는 그저 자신의 기분 탓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이제는 착각한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계획에도 없던 호구조사를 하게 된 그날, 해가 지고 밤이 늦도록 대화를 나눴었다. 속마음까지 헤집어가며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끝말잇기를 하듯 잠깐 대화를 멈췄다가 다시 이어가기를 반복했다.

    서로의 간단한 신상 정보와 하는 일, 크루즈를 타게 된 경로, 현재 거주지에서 거슬러 올라가 선대 고향집까지 화두에 올랐다. 머리 아픈 주제들은 의식적으로 피해가며 한국과 북유럽의 역사를 서로에게 가르쳐주었다. 문화적 상이점과 특이점, 세계정세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벌이다가 헐리웃 배우들의 특이한 식성에 대한 잡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세상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묻혀들었을 때도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 긴 시간을 보냈었다. 미우나 고우나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자리에 들다보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온종일 같은 경로로 움직였고 지금은 그게 당연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로 말미암아 이제는 거의 친구와 다름없다고 생각하던 별하였다.

    멀쩡히 수영을 하고, 낚시를 하는 것으로 봐서 어디가 아픈 게 아니란 건 알았으나 달라진 태도에 대해서는 의문만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뭔가 또 실언한 게 있었나, 하고 기억을 되짚어봐도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밥을 먹은 기억들뿐이었다.

    먼저 뭍으로 나간 파비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늘로 향했다. 뒤늦게 모래를 밟은 별하는 불가사리들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젖은 팬티를 벗고 뜨거운 모래 위에 널어둔 청바지를 꿰어 입으려는 중에, 잽싸게 밀물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녀석들을 발견했다.

    “아, 그건 안 되지.”

    그는 얕은 물속에 잠긴 녀석들을 얼른 붙잡았다. 밀물이 닿지 않는 안전한 모래 위에 내려두다가 불현듯 강렬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의식하기도 전에 이쪽을 향해 있는 이와 시선이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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