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7)화 (7/49)
  • “장작 조금만 더 넣어줄 수 있어……?”

    음영에 잠긴 파비안의 눈동자가 별하의 얼굴을 가만히 훑어 내렸다.

    “열이 심해.”

    “괜찮아. 이런 건 곧 있으면 금방 나아. 히트보다 덜 아픈 걸…….”

    평소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어투로 속삭였다. 파비안은 가는 장작을 일렁이는 불 안에 밀어 넣었다. 낮에 꼭 먹으라고 줬었지만 입에도 대지 않은 코코넛을 가져와 다시 내밀었다.

    “조금이라도 마셔.”

    “으음……. 토할 거 같아.”

    “토하더라도 마셔야 해.”

    “미안하지만 못 마셔. 정말 토할 거야…….”

    “별하.”

    별하는 영 내키지 않는지 눈을 감아버렸다. 그가 다시 눈 뜨기를 기다리던 파비안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코코넛 단물을 자신이 들이켰다. 한가득 들이켰지만 목울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파비안은 곧장 상체를 낮춰 별하의 턱을 가볍게 붙잡았다. 힘없이 고개를 돌리려는 그의 입술을 제 입술로 누르며 강제로 턱을 벌렸다.

    “흐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머금고 있던 단물을 밀어 넣었다. 별하는 마시지 않으려 고개를 내저었지만 파비안의 손에 붙잡혀 그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채 마시지 못한 단물이 입술 밖으로 흘러내렸다.

    “싫, 으으음, 그만…….”

    파비안은 다시 그 행위를 묵묵히 반복했다. 움직임이 없던 별하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상하로 움직였다. 꿀꺽, 단물을 목으로 넘긴 별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 마, 이제.”

    “……혼자 마실 수 있겠어?”

    “못 마신다고 했잖아…….”

    파비안은 새 코코넛을 가져와 입에 머금었다. 별하가 눈썹을 찌푸리며 거부했지만 처음보다 쉽게 입술이 열렸다.

    “읏, 으음…….”

    강제로 몇 번이나 꿀꺽, 꿀꺽, 단물을 들이킨 별하는 곧 유순해졌다. 입 안으로 단물이 들어오면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목을 열어 삼켰다. 건조하던 점막이 무르게 젖어들며 촉촉해졌다. 납작한 배가 볼록해지고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단물을 옮기느라 달라붙어 있던 입술들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파비안은 제 아래서 입술을 벌린 채 얕게 헐떡이는 이를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새빨간 입술 주변에 묻은 단물을 손끝으로 닦아주다 눈길이 맞닿았다.

    “…….”

    “하아…….”

    파비안이 피하기 전에 별하가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부딪쳤다. 단물에 젖어 있던 입술들이 부드럽게 밀착했다. 옮기는 것이 없는 입술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별하는 흐트러진 숨을 내뱉으며 파비안의 입술에 제 것을 문질렀다. 쪽, 쪽, 소리를 내어 입 맞추다가 입술 사이를 조심스럽게 눌러 들며 점막을 자극했다.

    “음…….”

    “…….”

    그런 별하를 거부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던 파비안이 살짝 입술을 열어 점막을 맞댔다. 서로의 감촉과 열감을 조심스럽게 음미하며 상기된 눈길을 나눴다.

    벌어진 입술을 밀착하기만 하던 키스는 자연스럽게 혀를 섞으며 진해졌다. 따뜻한 살덩어리가 상대를 탐색하듯 살짝살짝 부딪치다가 단번에 깊게 맞물렸다.

    016.

    “으으, 응…….”

    “…….”

    별하는 어떤 거부감도 없이 파비안의 점막 속으로 들어가 혀를 빨았다. 신중한 듯 소심하게 별하의 저돌적인 키스를 받아들이던 파비안도 느직이 움직였다.

    새빨간 입술보다 더 붉은 살덩이를 감싸듯 얽으며 침이 고여 든 안쪽을 파고들었다. 입술을 다물지 못하도록 별하의 작은 턱을 손으로 감싸고는 고개를 기울여 틈 없이 달라붙었다.

    별하가 주도하던 키스는 금세 파비안의 기세와 섞여 진득해졌다. 축축하게 젖은 살덩이들이 벌어진 입술 사이를 드나들며 질척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서로의 고조된 숨결을 목으로 삼킬 때면 깊게 얽혀든 살덩이들이 불빛에 반짝거렸다. 코코넛 단물보다 달콤한 타액에 말초신경이 마비된 듯 뒤얽힌 점막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즈넉하게 타오르는 모닥불 옆에서 서로에게 밀착해 누운 그들은 서로에게 빠져들어 갔다. 별하는 깊고 긴 키스를 힘들어하면서도 파비안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가 하는 대로 혀를 섞으며 달콤한 감각에 몸을 내맡겼다.

    가볍게 스친 코끝으로 상기된 숨결이 뒤섞였다. 잠시 입술을 맞대고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던 그들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찌릿하게 관통하는 기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서로의 혀를 찾았다.

    “흐, 응…….”

    “음…….”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한껏 벌어진 별하의 입술 밖으로 흘러내렸다. 파비안은 진한 키스에 무르녹은 별하를 제 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발그스름한 뺨과 진땀에 젖은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다 눅눅한 상의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먹은 게 없어 홀쭉한 복부와 매끈한 명치를 느릿하게 지나 가슴을 더듬었다. 납작한 젖가슴에 붙은 작은 살덩이를 건드리자 별하의 호흡이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눈길이 마주쳤지만 파비안은 멈추지 않았다. 별하의 혀와 점막을 탐닉하며 손가락을 느른하게 움직였다. 예민한 살덩이는 금방 꼿꼿하게 경직되어 솟아올랐다.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 두고 아프지 않게 문지르며 자극했다.

    “으응…….”

    단단해진 젖꼭지를 살짝 살짝 잡아당기며 밀어 올릴 때마다 별하의 목 안에서 억누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으, 음, 그…….”

    파비안은 별하의 젖은 신음을 집어삼키고는 키스를 계속해 나갔다. 흥분에 떨리는 혀 밑을 파고들며 곤두선 젖꼭지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반대쪽 가슴 돌기까지 느긋하게 어루만진 후에 손을 아래로 내렸다.

    철컥철컥― 그는 별하의 청바지 버클을 한 손으로 가볍게 풀어냈다. 가림막 없이 바로 드러난 음모와 페니스를 발견하고 입술을 뗐다.

    “속옷은?”

    별하는 돌연 떨어져 나간 열기를 뒤쫓다가 아쉬운 듯 제 입술을 핥았다. 달아오른 숨결을 작게 불어내며 답했다.

    “몰라……. 잃어버렸어.”

    “……언제? 여기서?”

    “낮에 수영하다가.”

    “…….”

    “아파.”

    “……?”

    “지퍼에 털, 껴서.”

    파비안의 반듯한 얼굴에 묘한 기색이 감돌았다. 별하는 잃어버린 물건에 대해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파비안의 입술 끝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올라갔다. 어쩐지 나빠진 심기로 시선을 피하는 별하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괜찮아. 내 거 줄게.”

    다른 곳을 보던 까만 눈동자가 투명한 회색빛 눈동자에 가 닿았다. 파비안과 코끝을 대고 얼굴을 마주한 별하는 그제야 미묘한 색감의 차이를 알아차렸다.

    “오드아이…….”

    인형의 그것과 닮은 오른쪽 눈동자는 엷은 회색이었고 왼쪽 눈동자는 채도가 낮은 연보랏빛이었다. 언뜻 봐서는 동색처럼 보였으나 모닥불 옆에서 가까이 마주한 지금만큼은 홍채의 깊은 곳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별하는 제 눈동자를 따라 움직이는 오드아이를 아연히 들여다보았다.

    파비안은 상체를 숙여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반들반들하게 부어오른 별하의 입술을 길게 핥으며 보드라운 음모를 쓰다듬었다. 그것을 장난스럽게 만지작거리다 아래 발기한 페니스를 손에 감쌌다.

    “음…….”

    이미 살짝 젖은 그것을 손 안에 넣고 윤곽을 그리자 별하의 입술이 벌어졌다. 다시 달라붙은 점막 안에서 혀들이 눅진하게 감겨들었다. 달뜬 호흡과 타액이 끊임없이 오고갔다.

    파비안은 손에 잡힌 페니스를 천천히 훑어 올렸다. 힘차게 솟은 기둥을 손바닥으로 감싸 부드럽게 압박하며 검지와 중지로 귀두를 자극했다. 묽은 체액이 흘러나오는 요도를 살살 문지르자 별하는 괴로운 듯 허리를 비틀었다.

    “흐, 읏…….”

    강하지만 일절 서두르지 않는 손길이 계속해 그를 흥분으로 이끌었다. 성기를 자극당하듯 혀를 빨릴 때마다 별하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뒤쪽이 축축하게 젖어들어 움찔거렸다. 회음과 엉덩이 골이 금세 애액으로 흥건해졌다.

    파비안은 제 아래 무방비하게 누운 이를 굳은 얼굴로 애무해 나갔다. 흥분할수록 진하게 풍기는 오메가의 체향을 얕게 들이켜며 예민한 곳을 집요하게 건드렸다. 새빨개진 혀를 녹일 듯 빨아대고 흠뻑 젖은 페니스를 피가 몰릴 정도로 강하게 훑어 올렸다. 신음을 뱉느라 잠시 입술이 떨어질 때면 혀를 세워 젖꼭지를 희롱했다.

    전신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쉽게 사정하지 못한 별하는 파비안의 팔을 붙잡아 제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이상해……. 여, 여기…….”

    뒤가 젖어든 후부터 이성이 날아간 그는 오직 한 가지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강렬한 사정 욕구였다. 평소에는 페니스만 자극해도 충분히 사정할 수 있었지만 어째선지 지금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다.

    섹스의 쾌감을 깨달은 오메가의 육체는 그보다 더 안쪽의 열기를 원하고 있었다.

    별하는 스스로 바지를 내려 뒤를 살짝 벌렸다. 파비안이 주춤했다. 페로몬을 여지없이 내뿜는 이를 느직이 훑어 내리는 오드아이에 어두운 그림자가 찰나로 드리웠다가 사라졌다.

    “하아…… 하아…….”

    별하는 열기에 취한 눈으로 별안간 움직이지 않는 상대를 재촉했다. 잠시 주저하던 파비안은 소리 없는 한숨을 흘리며 다시 나릿하게 움직였다. 언제부터 열감에 흐무러진 별하의 뒤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매끄러운 둔덕 사이에 손을 밀어 넣자 젖은 구멍이 움찔거리며 조여들었다.

    파비안은 턱 근육을 세우고 제 아래서 신음하는 이를 유연하게 달궈나갔다. 불규칙적으로 우므러드는 주름을 조심스럽게 문지르다가 손끝이 묻힐 정도로 얕게 눌렀다. 열리지 않으려 힘껏 죄어든 구멍에서 맑은 체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별하는 발의 통증도, 한기도 잊고 파비안과 연신 입술을 맞대어 문질렀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물러날라치면 험상한 기세로 뒤쫓아 와 혀를 얽었다. 검지와 중지로 끈덕지게 뒤를 어루만지던 파비안이 별하의 입술을 한 입에 집어삼켰다. 녹을 대로 녹은 살덩이가 서로에게 휘감기는 순간 손가락을 세워 구멍을 찔렀다.

    “흐으음……!”

    파비안은 별하의 타액과 신음까지 빨아먹으며 손가락을 깊게 삽입했다. 벌어진 엉덩이가 손바닥에 눌려들 정도로 내벽을 파고들어 가서는 단번에 끄집어냈다.

    “아, 으…….”

    별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급히 제 페니스를 훑어 올렸다. 파비안은 애액에 젖은 제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

    저릿한 감각이 남은 손을 느릿하게 움켜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더니 흥분에 못 이겨 자위하는 별하의 가랑이 사이를 다시 더듬었다. 빠끔거리는 주름에 손끝이 닿자마자 힘을 실어 구멍을 열어젖혔다.

    “흐읏.”

    곧은 손가락들이 곧장 내벽을 빠르게 드나들었다. 파비안은 몸이 벌어지는 통증에 신음하는 별하의 입술을 눌러 덮고서 우직하게 손을 움직였다. 질척하게 뒤섞이는 소리가 고요한 숲을 떠돌았다.

    헐떡이며 페니스를 주무르던 별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희뿌연 정액을 울걱 쏟아냈다. 외마디 신음이 일었지만 파비안에게 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아…… 하아…….”

    열기를 전부 토해 낸 별하는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한참 시달렸던 병환이나 절정에 도달했던 기억들이 모조리 증발한 사람처럼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몽롱한 눈동자를 멍하니 끔뻑이더니 눈꺼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두 눈을 내리감았다. 희미한 숨소리도 없이 고요하게 누워 있다 이내 단잠에 빠져들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장작 타는 소리와 섞여들었다. 바닷가에서 불어든 미지근한 밤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잠결에 어깨를 움츠린 별하는 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찾아 파고들었다.

    “…….”

    파비안은 제 품에 파고드는 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새카만 속눈썹이 누기에 젖어 반짝거렸다. 발그레한 뺨의 솜털과 크게 도드라지지 않은 코, 마찰로 부어오른 작은 입술, 좁은 턱과 가는 목덜미가 아직 성장기를 마치지 못한 소년의 것처럼 보였다.

    흐트러진 옷가지를 원상태로 정리해 준 그는 제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잠이 든 이를 하염없이 눈에 담았다. 바지 앞이 불룩하게 솟아 있었지만 손끝도 건드리지 않았다. 나직이 숨을 들이켜며 안쪽으로 흘러드는 하나의 체향을 가만히 음미했다.

    동그란 이마에 내려앉은 검은 머리칼이 바람결에 살랑거렸다. 파비안은 그곳에 입술을 스치듯 붙였다 떼며 조금은 지친 저음으로 속삭였다.

    “Sleep tight.”

    017.

    으슬으슬한 기운에 눈을 뜬 별하는 가장 먼저 불씨가 거의 사그라진 모닥불을 발견했다. 노곤하게 가라앉은 몸을 비척비척 일으키는데 이불처럼 덮여 있던 노란 레인 코트가 발 아래로 흘러내렸다.

    “…….”

    별하는 잠기를 떨쳐내지 못해 흐릿한 정신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언제 잠들었던 건지 기억을 더듬어나가다 번득 스치는 장면들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각하는 순간 성기가 따끔거려 신음을 삼켰다. 가슴 부근에서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아득한 꿈같던 기억들이 눈앞에서 하나둘 펼쳐지면서 저절로 침을 꼴깍 넘어갔다.

    그는 화끈하게 부어오른 입술을 잘근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또 저질렀다―

    섹스까지 한 기억은 없지만 제 페니스를 만지던 선득한 악력과 다리를 벌려 뒤로 뭔가를 받아들이던 기억이 흐릿하게 스쳤다. 의식하는 순간 뒤가 멋대로 움찔 조여들었다.

    “으.”

    묘한 이물감이 느껴졌으나 이전의 강렬한 통증은 없었다. 별하는 다행스러움보다도 자괴감과 함께 수치심을 느꼈다. 알파의 정조에 대해 그리 정색하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는데 정신을 잃을 정도로 키스에 몰두했다니. 그것도 그 알파에게.

    “젠장.”

    그는 차가운 이마를 짚고서 혼란한 정신을 다잡았다. 한 차례 큰 파도를 넘겨 보낸 후에야 생각이 난 듯 옆자리를 힐긋 돌아보았다. 늘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 형체가 없었다. 덩그러니 놓인 나뭇잎 위로 작은 도마뱀이 스스스 지나갔다.

    별하는 반듯한 제 옷가지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물살에 휘말리듯 분위기에 휩쓸려 파비안과 입술이 부르트도록 키스한 기억을 일부러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상의 것도.

    입 안이 바짝 말라 새삼 갈증을 느꼈다. 코코넛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모닥불의 불빛이 약해 잘 보이지 않았다.

    항상 쌓아놓던 자리와 그 주변을 더듬어도 손끝에 닿는 게 없었다. 땔감 부스러기와 텅 빈 과일 껍질뿐이었다. 아마도 이전에 먹었던 게 다였던 것 같았다. 다른 과일이라도 있을까 했지만 단맛이 당기지 않아 곧 포기했다.

    별하는 꺼져가는 모닥불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간신히 연명한 작은 불씨마저 사그라지면 다시 지포라이터를 켜야 했다. 언제 구조될지 모르는데, 어쩌면 이곳에 갇혀 늙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까운 기름을 써야 할까 싶었다. 지금 장작을 넣으면 불이 꺼지지 않을 텐데.

    “…….”

    부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져 있던 그는 결심한 듯 몸을 세워 일어났다. 다리에 힘을 실었을 때서야 발목 부근에서 찌릿한 감각을 느꼈다.

    발등에서부터 발목까지 여전히 부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 이상의 통증은 없어 서 있는 데 나쁘지 않았다. 발을 살짝 내디뎌 땅을 밟자 신경이 당기는 듯해도 참을 만했다. 미열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꽁꽁 언 몸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은 이제 없었다.

    별하는 제자리걸음을 여러 번 해보며 상태를 확인한 뒤 곧바로 밀림 안으로 향했다. 땔감을 주울 겸 코코넛도 조금 가져올 생각이었다. 이런 발로 나무를 제대로 탈 수 있을지 자신하지는 못해서 낙과나 몇 점 발견하기를 바랐다.

    한밤의 열대밀림은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수백 갈래의 뿌리가 지면 밖으로 드러난 이형적인 교목들이나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들, 검붉은 토양에 섞인 새하얀 모래, 나무인지 풀인지, 꽃인지 벌레인지, 그림자인지 실형인지 알 수 없는 지형지물과 이국적인 밤 풍경이 못내 낯설었다. 그럼에도 길쭉하게 뻗은 잎새들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달빛과 은하수의 은은한 빛발이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다른 날보다 밝은 광원 덕분에 공간 지각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우거진 수풀 주위를 드리운 그늘이 더 새카맣게 보여서 조금 음침한 느낌도 있었다.

    별하는 멀리까지 나갈 생각은 없었다. 이전에 파비안이 알려준 쓰러진 나무가 있는 곳까지만 들어갈 작정이었다.

    선행자의 배려인지, 단순한 흔적인지, 크게 거슬리는 장애물 없이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 주위를 살피며 걸었다. 혹 길을 잃지 않도록 수목의 형태와 지형, 밤하늘의 별자리를 눈에 담다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또 넘어질 뻔하기도 하고, 길을 잘못 들어 같은 자리를 두어 번 맴돌기도 했다.

    그는 어렵지 않게 코코넛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야자수를 발견했다. 수풀 위에 떨어진 낙과도 몇 개가 보였다. 돌아가는 길에 주울 생각으로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습기가 남은 울창한 풀숲을 지나자 검회색의 현무암 바위가 앞을 막아섰다. 2, 3미터는 훌쩍 넘을 듯한 큰 바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밀림 한가운데에 솟은 고봉이 활화산이던 시절 이곳까지 굴러온 것 같았다.

    파비안에게 전해 들은 대로 여러 덩이가 한 몸처럼 뒤엉킨 바위를 돌자, 다른 나무들에게 기대어 길게 누운 거목을 쉬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같은 처지의 도목들이 주변에 여럿 보였다.

    알록달록한 버섯이 번성한 나무는 쓰러진 지 꽤 오래된 듯 예상보다 훨씬 컸다. 나무속이 반쯤 빈 내부는 서너 명이 들어가 누울 수 있을 정도였고 습기가 전혀 없었다. 햇빛도 달빛도 닿지 않는 주변의 지면은 온통 이끼에 덮여 있었다.

    별하는 단단한 나뭇가지 하나를 손에 들고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달빛이 다각도에서 비쳐들어 나무속을 뜯어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나뭇가지 끝을 나무속에 찔러 넣어 지렛대처럼 들추자 결을 따라 가뿐하게 뜯겨져 나왔다. 큰 힘이 필요하지 않은 작업이었다.

    집중해서 조금씩 뜯어내다 저도 모르게 발목에 체중이 실릴 때면 뜨끔한 통증에 놀라 자세를 고쳤다.

    그는 들고 갈 수 있을 만큼만 뜯어낸 후 금방 작업을 그쳤다.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품에 차곡차곡 쌓는데 시야로 뭔가가 휙 스쳐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

    번득 고개를 들어 시야에서 잡힌 물체를 찾아 주위를 살폈다. 음영에 잠긴 숲에는 멀리서 아득히 들리는 야행성의 새 울음소리와 근처의 벌레소리밖에 없었다. 간혹 바람이 불어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별하는 설마 맹수일까 해서 등 뒤쪽까지 한참 살폈지만 그런 기척은 전혀 없었다. 어서 돌아갈 생각으로 장작을 마저 줍다가 별안간 정체불명의 움직임과 마주했다.

    마주 보이는 먼발치 은백색 달빛이 맺힌 나무들 사이에서 뭔가가 반짝거렸다. 물인가? 했지만 수면의 반사광과는 달랐다. 무채색이 아니라 황록의 형광빛이었다. 도깨비불처럼 일렁이던 빛무리는 순식간에 잔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반딧불이……?”

    자그마한 발광충들은 민들레홀씨처럼 수풀 사이를 유영하고 있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군복무 시절 한여름 밤에 친한 선임과 함께 보초를 서며 처음으로 목격했었던 그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몇 마리를 잡아 동료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고 손전등 대용으로 쓰기도 했던 추억이 떠올라 별하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문득 이런 존재를 알지도, 보지도 못했을 누군가를 떠올렸다. 진지하고 유머라곤 없지만 간혹 난처해하고 간혹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는 미안이 이러한 작은 생명체를 어떤 식으로 바라볼지 조금 궁금했다.

    “…….”

    별하는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한 목적도 겸해서 몇 마리만 가져갈 생각으로 짝 찾기에 여념이 없는 녀석들에게로 가만히 다가갔다. 계류도 없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알을 깐 건지 그들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신기한 듯 들여다보던 그의 얼굴이 불현듯 굳어졌다. 점점 일그러진 얼굴은 일순간 창백할 정도로 새하얗게 탈색했다.

    부릅뜬 두 눈동자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적에 휩싸인 밀림에는 어떤 이질적인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깊숙하게 숨을 들이켜 호흡했다. 코끝을 간질이듯 스며든 밤공기에 눅은 풀과 이끼 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냄새와는 확연히 다른 성질의 것이 점막을 침투해 신경 세포를 건드렸다. 특정의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한 본능에 이끌려 걸음을 내디뎠다. 황록색으로 반짝이는 빛무리를 스쳐 지나 달빛이 닿지 않는 그늘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뒤엉킨 잎사귀들을 겨우 빠져나온 달빛이 벌레소리가 울리는 나지막한 수풀을 비추고 있었다. 둘레로 희귀한 열대나무들이 밀도 높게 자라나 있었는데, 기둥 사이 좁은 공간으로 몹시 반짝거리는 해변이 내다보였다.

    하지만 별하의 시선은 한 곳에 집중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희끄무레한 달빛이 닿을락말락하는 음영 아래 포개어 쓰러진 나무들이 있었다. 널찍한 뒷모습을 보인 채로 그곳에 걸터앉은 인영은 정물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흰 셔츠를 입은 파비안이었다.

    “…….”

    저대로 잠든 건가 했지만 그는 휴면 상태가 아니었다. 소매 단추를 풀어 접어 올린 아래로 쭉 뻗은 팔이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흰 피부 위에 그려진 듯한 근육과 힘줄이 팽팽하게 긴장해 움직일 때마다 도드라졌다. 어떤 작업에 몰두해 있어서 이쪽의 기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별하는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파비안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오감이 온전히 그곳으로 향해 있어, 무르녹은 피부를 맞댄 듯 그의 열기를 생생하게 느꼈다.

    018.

    찌걱찌걱- 젖은 살덩이를 문지르듯 진득하게 마찰하는 소리가 음영을 타고 들려왔다. 미세하게 흐트러진 숨결에 나직한 신음이 섞여 있었다. 팔의 움직임이 차츰 거칠어지자 파비안의 긴장한 등 근육이 셔츠 너머로 뚜렷하게 솟았다. 그늘 속에 묻혀 있던 옆얼굴이 그의 곁을 맴도는 작은 반딧불들에 드러났다.

    턱 근육이 선명하게 살아나는 순간 파비안은 한숨 같은 신음을 뱉어내며 사정했다.

    “흐, 음.”

    정액이 멀찍한 수풀 위로 튀었다. 경직된 전신의 근육이 움찔거리며 강한 페로몬 냄새를 해일처럼 퍼뜨렸다. 별하는 숨을 멈추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알파의 페로몬에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Fuck.”

    짜증스럽게 욕설을 뇌까린 파비안은 사정한 후에도 가라앉지 않는 제 육체를 다시금 기계적으로 손으로 움직여 위로했다. 묵직하게 내뱉는 숨소리가 분노한 듯 거칠었다.

    별하는 발소리를 죽여 물러났다. 새하얀 셔츠가 수풀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그늘 밖까지 나와서야 급히 돌아섰다. 반딧불이의 사교장을 빠르게 비켜 지나왔던 길을 되짚었다. 품에 안고 있던 장작은 수풀에 던져버리고, 코코넛 낙과도 버려둔 채 달리다시피 쉼터로 향했다.

    어느새 모닥불은 재만 남기고 꺼져 있었다. 장작 사이에 바람을 넣으면 다시 불길이 살아날지 몰라도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별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 자리에 누웠다.

    “하아, 하아…….”

    잠에서 깨기 전까지 누워 있던 자리로 돌아가 흙이 묻은 발을 털며 헝클어진 호흡을 다잡았다. 파비안이 돌아오기 전에 잠들어야 했다.

    발치께로 밀려난 레인 코트를 끌어 올려 덮으며 두 눈을 감았지만 갑자기 잠기운이 찾아들 리 없었다. 무리하게 달려서인지 내내 괜찮던 왼쪽 다리에서 다시금 저릿저릿한 감각을 느꼈다.

    “…….”

    그는 미열이 깃들어 불편해진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애석하게도 자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아서 잎사귀를 스치는 밤바람과 감은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달빛, 곁을 지나는 벌레의 기척, 한참 전에 증발한 쾌감들까지 생생하게 감지했다.

    양을 세기도 하고, 어렸을 때 배운 수면 유도 호흡법을 떠올려 따라해 보기도 하고, 편안해지는 상상을 하며 자기 최면을 걸어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대양에서부터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 청각이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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