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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선생님, 나중에 저에게도 그림을 그려 주세요.”
“으음.”
“블람께는 그려드리셨잖아요.”
평소의 데미안이라면 네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겠노라 얼러 주었을 텐데 어쩐지 데미안은 시원스레 답하지 않았다.
미카엘이 짐짓 서운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선생님의 그림 선물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이 제가 아니라는 것도 슬픈데 두 번째로도 주시지 않는다면…….”
“첫 번째가 너야.”
데미안이 심술궂게 웃으며 “아니, 네가 아니라 왕자인가.” 하고 말을 고치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미카엘의 얼굴에 소박한 기쁨이 떠올랐다.
“왕자가 선생님의 선물을 받고 좋아했나요?”
미카엘이 수줍게 웃으며 미리 마음속으로 정한 대답을 요구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줄지언정 진실까지 왜곡하진 않았다.
“아니. 나더러 얼굴은 잘생겼는데 그림은 아주 못생기게 그린다며 내 추한 마음씨가 손으로 드러난 것 같다고 했지.”
두 눈을 크게 뜬 미카엘은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분한 듯한 얼굴로 바닥을 굴렀다.
“어떻, 말도 안 돼! 미친 새끼!”
곱디고운 왕자님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에게 상욕을 퍼붓자, 데미안은 소리 없이 웃었다.
어쩌면 욕을 해도 이리 귀여울까.
데미안은 커다란 손으로 그의 동그란 뒤통수를 연신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난 왕자더러 ‘예. 정말 못생겼지요? 당신을 그린 거거든요.’라고 대꾸했거든.”
이번에 미카엘은 입을 크게 벌렸다.
“선, 선생님. 선생…….”
“응.”
미카엘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제게 매달리자, 데미안이 얼른 그를 부여안았다.
“저 예쁘죠? 몸이 커다래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귀엽죠?”
“그럼.”
데미안은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미카엘의 얼굴에 연신 입맞춤을 해주었다.
지나가던 로다나교 신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지만, 미카엘은 정신이 없어서, 데미안은 수치심이 없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와 나의 관계는 너와 나의 관계와 달라. 넌 내게 한눈에 반했잖아.”
“그야 당연하죠. 대체 누가 선생님을 보고 한눈에 반하지 않겠어요?”
“왕자는 그랬어.”
미카엘은 두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그의 얼굴 위엔 “미쳤나 봐!”라는 글자가 가득해 보였다.
“그는 날 아무나 타락시키는 악마라고 생각했고, 난 그를 착한 척에 목숨 건 정신병자라고 생각했지.”
“말도 안 돼…….”
“그 덕분에 지금의 너와 내가 있는 거야, 미카엘. 날 짝사랑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거기에 열 살이나 어린 애새끼가 하나 추가되었다고 내가 눈썹 하나 까딱했을 것 같나.”
미카엘이 과거의 자신을 학대하려 하기 전에 데미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날 그토록 혐오하고 질색하던 이가 내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게 딱하고 안쓰러워서 눈길을 주었던 거야.”
커다란 고양이를 품에 가득 안은 데미안이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길에서 조금씩 물러나며 말을 이었다.
“신과 선행 외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굴던 이가 신도, 선함도 모조리 내다 버리고 매달리니 미안하고 안타까워서 마음을 주었던 거야.”
어깨를 수그린 채 데미안의 가슴팍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던 미카엘이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선생님, 저 참회해도 되나요?”
“응? 뭘 참회할 생각이지? 내게 한눈에 반하지 않았다는 걸?”
데미안은 웃으며 농담조로 물었지만, 미카엘은 진지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손을 꼭 마주 모아 쥐었다.
“네. 참회하고 싶어요.”
데미안은 아직 신이 아니지만, 불운한 사건이라면 짧게나마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차분한 어조로 참회의 기도를 시작했다가 “선생님께 막말하고, 악마라 그러고, 그림 못 그린다고 무시하고…… 전 정말 천하의 나쁜 놈이었어요!” 하고 흐아앙 울음을 터트리는 미카엘의 모습이 떠올랐다.
웬만한 일에는 단련된 데미안이건만, 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미카엘, 착하지? 여긴 이교도의 사원이잖아. 이런 곳에서 참회의 기도를 올리면 안 되지.”
데미안이 “집에 돌아가서 혼자 방에서 참회해. 알았지? 내가 창피하지 않게.”라는 말을 퍽 듣기 좋게 전달해 주자, 미카엘은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데미안의 소매를 붙든 채 걸음을 옮기다가 기어코 고개를 푹 숙이면서 삑삑 울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속이 서늘해졌다.
“미카엘, 저기 봐라. 블람은 전쟁과 전투의 신인데도 취업 부적과 연애 부적을 파네? 그 이유를 알고 있나?”
결국 데미안은 자기 고양이를 달래기 위해 애먼 블람에게 저격 총을 쏘았다.
“그야 취업 전쟁도 전쟁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쟁취하는 것도 싸움이니까.”
그 기가 막힌 소리를 듣고 울음이 쏙 들어가 버렸는지 미카엘이 훌쩍거리다 말고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세계 여기저기에서 규모가 작은 전쟁과 내전이 일어나고 있지만, 강대국들의 주도하에 침략 전쟁은 거의 일어나고 있지 않지. 한마디로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야.”
데미안은 헛기침하면서 손끝으로 슬쩍 미카엘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블람께서도 먹고는 살아야지.”
“와…….”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긴 “와…….” 였다.
저격 총이 효과가 있는 듯하자, 데미안은 이번엔 유리시아에게까지 총구를 겨누었다.
“유리시아께서도 현재는 예술과 순애의 신이라고 불리시거든.”
“예술이요? 아니, 뜬금없이 예술?”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좀 부끄러운지 데미안이 어물거리듯이 대답했다.
“예술을 향한 순수한 애정도 순애는 순애니까.”
“와.”
이번엔 여운마저 없는 “와.” 였다.
데미안은 차마 거기에 대고 많은 창작가가 영감을 얻기 위해 신전을 찾으면서 내는 헌금이 꽤 짭짤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펠름교도 큰 신전에선 뜬금없이 건강을 기원하는 성물을 판다는 것도.
사실 그 탓에 몇백 년 전에 종교 전쟁까지 일어난 적이 있었다. 풍요의 신인 하락스를 섬기는 바자드교가 펠름교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은근슬쩍 예술 쪽에 발을 걸친 유리시아가 이제 건강까지 관장하려 드는 거냐면서, 그쪽은 풍요의 신인 하락스의 영역이니 건강을 기원하는 성물을 팔지 말라고 항의했다.
하지만 펠름교 교황은 뻔뻔하기로는 데미안보다 더한 자였다. 그는 무려 “건강해야만 순애를 바칠 수 있으니 건강도 유리시아께서 관장하실 영역입니다!” 하고 주장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데미안처럼 튼튼해야 천 년간 집착을 하든, 정신병을 앓든, 지랄을 하든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난 후로 데미안은 유리시아의 대천사라고 불리는 게 창피했다. 몇몇 이교의 사도들이 “건강의 신 사도라 그런가. 몸이 참 건장하네요.” 하고 비꼬아서 더 수치스러웠다.
후안무치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데미안을 창피하게 하다니. 종교인도 참 독한 것들이었다.
차라리 쓰레기통에서 바나나 껍질을 주워 하얀 속살을 갉아먹다가 들키는 게 덜 부끄러울 거다. 아니, 애초에 그건 살기 위해 한 거니 창피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종교 전쟁은 기득권자끼리 밥그릇 싸움을 하는 거라 추잡하고 역겨웠다.
“억지라는 점이 없잖아 있지만, 무신론자가 늘어날수록 우리가 보호할 수 있는 인간의 수도 줄어들어.”
하지만 그것도 벌써 삼사백 년 전의 일이다.
이제 데미안은 추한 밥그릇 싸움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정도로 타락, 아니, 단련되었기에 뻔뻔한 얼굴로 이게 다 인간들을 위한 거라고 설득할 수 있었다.
“한 번만 더 손을 올리기만 해 봐.”
갑자기 지나가던 여자의 팔을 꽉 잡아챈 데미안이 싸늘한 눈초리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평생 밤길을 두려워하게 해주지. 아니, 선명한 대낮조차 두려워하게 될 거야. 그날이 오면.”
그 검은 눈동자에 비친 폭력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여자가 덜컥 겁먹은 얼굴로 빠르게 도망쳤다.
당연히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어린것을 세게 틀어쥔 채 이를 악물고 위협적으로 손을 들어 올린 얼굴은 그 자신의 것이었을 테니까.
“어떻게 해서든 한 명이라도 더 신의 품 안에 담아야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데미안이 아까 하다만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저 사람은…….”
“자기 애를 주기적으로 두들겨 패는 사람이야.”
미카엘은 작고 마른 몸을 한 여자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도 범죄를 저지르네요.”
데미안은 가벼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야 사람이니까. 사람은 착한 일도 하고, 끔찍한 짓도 저지르지.”
“그건 알지만요.”
미카엘은 마른 눈물이 달라붙은 눈가를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전 그래도 여자가 남자보다 이성적이고 이타적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집단에나 범죄자는 있지. 단지 자지 달린 것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일반적인 여자나 남자가 저지르는 범죄와 차원이 다를 뿐이야. 애초에 그놈들은 약자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그저 내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무언가라고 생각할 따름이지.”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데미안은 처참하게 죽은 선생님들을 떠올릴 때면 차가운 분노가 자글자글 끓어올랐다.
차라리 그들이 인간으로서 살해당했다면 이토록 화가 나지는 않았을 거다.
“제가 모조리 응징할게요.”
곁에서 들려온 맑은 목소리에 데미안은 걸음을 멈칫했다.
“제 죄를 다 참회한 다음에, 선생님의 진정한 사도가 되고 나서요.”
미카엘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분노가 가라앉아서 데미안은 따스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내게 첫눈에 반하지 않은 죄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용서하마.”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가슴께에서 덜컥 하고 무언가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카엘. 이리 와서 손을 얹어 봐.”
후미진 곳으로 미카엘을 이끈 데미안이 금빛 천칭을 그의 눈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미카엘은 이미 한 번 천칭이 바닥까지 가라앉은 걸 목격한 적 있기에 주저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는 한쪽 접시가 바닥을 채앵 하고 크게 울릴 걸 예상하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
하지만 접시는 한쪽으로 깊숙이 기울지언정 아슬아슬하게 바닥 위에 떠 있었다.
“서, 선생님.”
“그래.”
뜨거운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 데미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미카엘을 꽉 끌어안고만 있었다.
겨우 지옥에서 한 발자국만 뗀 정도다.
미카엘은 여전히 무거운 죄를 짊어진 죄인이고, 함께 천국으로 갈 수 없는 존재이니까.
하지만 데미안은 처음으로 자그마한 일에 크게 감사하고 신의 존재를 축복했다.
“다 덜어낼 때까지 기다려 주마.”
미카엘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데미안은 어린 왕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결국 데미안은 수많은 인간들을, 사도들을, 심지어 신들마저 홀려 놓았으니까.
만약 악마란 게 존재한다면 그는 데미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거다.
“언제까지고.”
미카엘이야말로 진정한 천사였다.
악마가 더 많은 이들을 홀리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그가 강력한 힘을 어두운 곳에서 쓰지 못하도록 밝은 길로 이끌고, 신앙심이 없던 메마른 가슴이 속죄를 갈망하게 했으니.
“나의 천사…….”
이 자리는 천사에게 빌린 자리였다. 그러니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했다. 그가 진정한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때까지.
‘내 평생을 바쳐 너에게 무엇으로든 보상하마.’
그를 위해서라면 악마는 신이 될 자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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