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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광기가 때론 신앙을 만든다
“들으셨습니까, 왕자님? 다음 주에 제7 성기사단이 입성한다고 합니다. 거기에 엄청난 미남이 있다고 하는데 그 페르페오 공작의 장남이라고 하네요.”
탐스러운 금발에 새파란 눈동자를 지닌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에 우아하게 내려놓았다. 인형처럼 곱고 예쁘게 생긴 얼굴 위에 웃음이 떠오르니 그 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정말 고마워, 바틴. 내 귀한 머릿속에 그런 누추한 정보를 다 쑤셔 넣어 주고. 응, 그럼. 내가 또 미남에 관심이 아주 많지. 어떻게 내가 궁금해하는 것만 쏙쏙 알아 오는지. 자네 같은 능력 있는 시종이 있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바틴은 천사 같은 얼굴로, 요정 같은 목소리로, 해사한 햇살처럼 웃으며 신랄하게 비꼬는 왕자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욕을 먹으면 오래 산다던데. 저분은 아마 내 덕에 아주 오래 살 거야.
“지금 나쁜 생각 했지? 하지 마.”
왕자가 단풍잎 같은 자그마한 손바닥으로 바틴의 손등을 찰싹 후려쳤다.
입으로 욕한 것도 아니고 머릿속으로 꿍얼거렸다고 야단맞은 게 좀 억울했지만, 나쁜 생각을 한 건 맞기에 바틴은 할 말이 없었다.
왕자는 독심술이 있는 것도 아닌데 타인의 악의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누가 누구를 증오하거나 질시하는 낌새만 풍겨도 바로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아마 왕자는 죽어서 응징의 천사 같은 게 될 거다. 한 손에 쮜그만 꼬챙이 같은 걸 들고 다니면서 누가 욕을 하기만 해도 그걸로 쿡쿡 찔러 대겠지.
아! 정말 끔찍했다.
바틴은 유리시아의 신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적어도 왕자와 죽어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냥 미남이 아니에요.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지닌 미남이라고요.”
왕자는 열두 살이지만, 발육이 늦어서 꼭 예닐곱 살 정도로 보였다.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탓에 하얀 볼때기가 몽글몽글해서 더 어리고 앙증맞아 보였다.
“페르페오 공작이라면 자기 부인을 두고 다른 사람하고 불륜을, 그것도 창부에게 공짜로 몸을 판 그 남자잖아.”
하지만 귀여워 보이는 외면과 달리 내면은 아주 날카롭고 염세적이었다.
그는 남들 앞에선 귀엽게 웃으면서 무해한 척했지만, 제 수족인 바틴 앞에선 내숭을 부려 주지 않았다. 한 번은 바틴이 자신 앞에서도 착한 왕자로 있어 주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내가 자네한테 월급도 주고 아양도 부려 줘야 하냐면서 비웃음을 흘렸다.
바틴은 속으로 정말 짜증 나는 애라고 욕했다가 왕자에게 또 손등을 얻어맞았다.
“그렇게나 크고 잘생긴 데다 문란한 남자라니. 정말 최고네. 응, 그럼. 능력 있는 남자라면 모름지기 성병 한두 종쯤은 앓고 있어야지”
고운 손가락으로 포도 껍질을 벗기던 왕자가 돌연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아마 그 사람은 마흔 살이 되기 전에 그 오뚝한 코가 썩어 문드러져 버릴걸?”
바틴은 눈앞에 있는 이가 유리시아의 계율을 얼마나 맹종하는 사람이었는지를 새삼스레 떠올렸다.
바틴은 이성적이고 똑똑한 사람은 종교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왕자가 참 신기했다. 바틴이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바로 왕자였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저 하늘 위에 위대한 분이 계시며 그분의 말씀을 어기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는 말을 믿는다는 게 이상했다.
사람은 죽으면 땅에 묻힌다. 그리고 썩는다. 그리고 끝이지.
바틴은 날 때부터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신이라든가, 지옥의 존재 따위는 믿지 않았다. 종교 또한 그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문화 사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왕자에게 실망하진 않았다. 왕자가 바틴더러 유리시아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그도 펠름교의 계율 내에서 그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는 현명하게 가려서 버릴 줄 알았으니까.
예를 들어 펠름교에선 남성과 여성은 하늘이 정해 준 짝이니 절대로 동성 간의 성적인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왕자는 신의 뜻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크게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라면 그의 자유도 어느 정도 허용해 주어야 하기에 평생 순애를 바치는 대상은 동성이든 이성이든 그가 스스로 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그가 평생토록 그 사람에게 충실했다면 단순히 동성에게 순애를 바쳤다는 이유로 지탄받아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저런 게 열두 살이라니.’
이럴 수는 없다며 이를 아득바득 갈던 얼굴은 좀 어린애 같았는데. 그 이유가 ‘요리장이 케이크를 한 조각 더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총사령관 해임 문제’ 때문이란 건 별로 어린애 같지 않았지만.
총사령관인 페르페오 공작이 반대 파벌의 음모에 빠졌을 때 그들은 해묵은 불륜 사건까지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 그렇게 하면 왕과 왕비에게 극진히 사랑받는 왕자가 페르페오 공작이 실각하는 데 힘을 실어 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실 왕자도 정말 그러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반대 파벌이 내세운 대체 인사가 너무 심각하게 무능력한 인물인 게 문제였다.
도덕적으로 무결하지만 무능력한 인간.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능력 있는 인간. 당연히 친구라면 전자를 가까이하겠지만, 왕자는 친구를 고르는 게 아니었다.
나라의 통치권자는 왕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기사단을 운용하고 국방 정책을 내놓는 건 총사령관이 할 일이었다. 그런 요직에 무능력한 인간을 올렸다간 작게는 아랫사람들이 고생하고, 크게는 국가 안보에 문제가 생길 터였다.
“이럴 수는 없어! 왜 내가 부인을 두고 불륜한 남자 따위를 옹호해야만 하는 거냐고!”
왕자는 두 손으로 자기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방 안을 빙빙 배회했다. 바틴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그가 머리숱이 많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멍청한 놈들! 그렇게 사람이 없는 거냐고! 대세를 뒤집으려고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면 대체 인사쯤은 제대로 된 사람으로 마련해 놓았어야지! 저런 걸 최선이라고 내놓다니. 자기 진영에 제대로 된 인재가 없다는 방증밖에 되지 않잖아!”
이를 바득바득 갈던 왕자는 결국 다른 사람들 앞에서 페르페오 공작을 두둔하는 수밖에 없었다. 페르페오 공작은 아주 잘생긴 데다 키도 크고 몸도 좋으니 분명 기사 일을 잘할 거라며.
귀족들은 어리석은 왕자를 비웃었지만, 그는 이 나라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국왕 내외의 사랑을 듬뿍 받는 외아들이었기에 그의 말까지 무시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왕자는 악마 같은 놈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고작 열두 살인 왕자가 총사령관을 해임하는 문제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바틴은 그 또한 왕자의 꼭두각시일 거라고 생각했다.
왕자는 사람을 부리는 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인 척하며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어른들을 제 입맛대로 조종했다.
‘아무리 지혜로워 봤자 열두 살짜리의 지혜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왕자의 손아귀에서 가장 잘 놀아났다.
바틴처럼 ‘저분은 어린애 껍데기를 뒤집어쓴 어른이다.’ 하고 경계하는 사람일수록 가장…… 아니, 생각해 보니 바틴 또한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으니 경계하든, 경계하지 않든 왕자가 바라는 대로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왕자님께서 뭐라고 하시든 전 궁금해요. 대체 얼마나 잘생긴 사람이기에 이 머나먼 왕도에까지 소문이 자자한지 말이에요.”
“미남이라면 자네 눈앞에도 있잖아. 그 사람이나 실컷 봐.”
자기 자신을 객관화할 줄 아는 왕자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그는 미남이라고 불릴 만했다. 적어도 10년 후에 말이다.
‘왕자님은 미남이 아니라 미동(美童)이잖아요.’
바틴은 아직도 왕비에게 아가라고 불리는 왕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욕은 아니라 그런지, 이번에 왕자는 바틴의 손등을 때리지 않았다.
* * *
왕자가 열심히 비자금을 모으고 그걸 상단에 투자해 새로운 무역 항로를 꾀하는 사이 일주일이 빠르게 흘러갔다.
미녀도 아닌 미남이 온다는데 뭐 그리 좋은지 바틴은 들떠서 하인들과 함께 연회를 준비했다. 그간 이교도를 뿌리 뽑는 데 공헌한 제7 성기사단을 치하하는 연회였다.
“어디, 고개 좀 들어보세요. 이야, 멋지네요.”
바틴은 우리 미래의 미남이 현재의 미남에게 밀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왕자를 갈고닦아 놓았다. 원래 치장을 돕는 건 시녀가 할 일이지만, 왕자는 몸에 여성의 손길이 닿는 걸 꺼렸기에 바틴이 투박한 손길로나마 그를 단장했다.
자긴 순애를 바친 여성만이 자기 몸을 만지게 할 거라나 뭐라나.
하여간 왕자는 욕 나오게 예민하고 결벽했다.
‘당신이 갓난아기 때 고추 만진 시녀가 대여섯 명은 될 텐데.’
그런 말을 했다간 왕자가 자살하려 들지도 몰라서 바틴은 말을 아꼈다. 자살은 펠름교도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최악의 죄 중 하나이니까.
‘꼭 저렇게 깨끗하게 굴던 사람이 나중에 섹스 중독이 되던데.’
바틴은 왕과 왕비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도도한 얼굴로 상석에 앉는 왕자를 바라보며 그가 미래에 복상사로 죽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바틴은 자기 왕자가 최대한 덜 예민하게 살다가 죽을 때까지 행복하길 바랐으니 말이다.
만약 후생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의 속내는 모르는 채로 내숭만 즐길 수 있도록 옆집 남자 같은 관계로 만난다면 좋겠지만. 바틴은 왕자의 일상을 알 수 있도록 그와 가까이 살고 싶었지만, 그와 좀 데면데면한 관계로 지내고 싶었다.
참으로 복잡미묘한 시종의 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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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더 잘할게요! 늘 감사드립니다.
PS
바틴은 소원대로 왕자의 곁에 있지만, 그의 속내는 모르는 채로 내숭만 즐길 수 있는 포지션인 옆집 남자로 환생하여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현재는 러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