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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98화 (98/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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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천천히 사원을 둘러보던 두 사람은 마침내 가장 안쪽에 있는 거대한 신당 앞에 도달했다. 신당 입구엔 등을 파는 사제가 있었는데 등이 워낙 종류가 다양하고 색깔도 여러 가지라서 미카엘은 뭘 사야 할지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등 모양이나 색깔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니죠?”

“모양은 상관없는데 색깔은 검은 것으로 달아.”

“왜요?”

“검은 등은 죽은 사람을 기릴 때 달거든.”

미카엘 쪽으로 슬며시 어깨를 기울인 데미안이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며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나히덴의 사형들이 한 번씩 죽을 예정이니까.”

“선생님은 가끔…… 아니에요.”

데미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끝까지 말해도 된다고 하자, 미카엘이 비밀 이야기를 하듯 그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선생님은 가끔 미친 사람 같아요.”

데미안은 빙긋 웃으며 되물을 따름이었다.

“응? 가끔만?”

“…….”

예술적으로 잘생긴 사람이라면 예술적인 재능 또한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빛깔이 엷은 사제복을 입은 여자가―부제인 듯했다―데미안에게 조심스레 세필(細筆)을 내밀며 물었다.

“등에 손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셔도 되는데 한번 해 보시겠어요?”

“해 보세요. 저는 등을 고르고 있을게요.”

붓을 받아 든 데미안은 근처에 있는 계단 한편에 걸터앉은 채 동그란 등을 한쪽 팔로 안고 그 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상체를 앞으로 수그리면서 검은 사제복의 어깻죽지 부분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굵고 강인한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검은 달이 아래를 굽어보자, 새카만 속눈썹이 꼭 밤의 장막처럼 아래로 그윽하게 드리워졌다.

그 순간 미카엘은 배 속이 뜨거워지면서 이상야릇한 희열과 충족감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데미안의 사도가 된 뒤로 미카엘은 종종 이런 식으로 몸에 성령이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황홀경에 빠지곤 했다. 데미안은 아직 신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미카엘에겐 이미 그가 절대적인 구원자였다.

데미안은 그 누구보다 다정하지만, 무미건조한 감성을 지녀서 이런 말을 하면 아마 질리겠지만, 미카엘은 요즘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와 같은 존재가 곁에 계셔 주심에 감사하고 또 황공해서 자신도 모르게 기도하듯 두 손을 꼭 맞잡게 되었다.

“정말…… 보고 있기만 해도 눈이 정화되는 것 같네요…….”

황홀경에 빠진 건 그의 광신도만이 아닌 듯했다. 부제 또한 데미안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며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미카엘이 만면에 뿌듯한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선생님에게선 좋은 향기도 나요. 꼭 깨끗하고 건강한 나무에서 나는 것 같은 향기가요. 사람들은 땀을 흘리고 나면 시큼한 냄새를 풍기잖아요? 그런데 선생님께선 땀을 흘리셔도 좋은 향기만 풍겨요.”

데미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카엘은 그가 식사도 얼마나 품위 있게 하는지, 걸음걸이가 얼마나 위용이 넘치는지, 몸이 크고 단단한데 체모가 거의 없어서 얼마나 순결하고 깨끗해 보이는지 줄줄 읊기 시작했다.

부제는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가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어도 되나 싶었는지 돌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휴. 내가 신부님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미카엘은 그녀와 데미안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는지 아쉬움이 남은 얼굴로 등의 값을 치렀다.

“아, 제가 로다나교 사원엔 처음 방문해서 그러는데 여기 사제분들은 뭐라고 부르면 되나요?”

“전 수습 수도자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저쪽에 계신 분은 수도자라고 부르시면 되구요.”

수습 수도자가 두 눈을 빛내며 혹시 로다나교에 관심이 있느냐고 묻자, 미카엘이 난처한 듯 웃으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건 아니고…… 그냥 나히덴 장군님께 관심이 좀 생겨서요.”

“정말로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군이 나히덴 장군님이세요!”

이번엔 수습 수도자가 잔뜩 흥분해서 손뼉을 쳤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동지를 만나 기쁜 듯 미카엘이 묻지도 않았는데 나히덴 장군과 관련된 일화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간간이 나히덴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지 예찬하며 중간중간 미카엘의 호응을 구하는 듯한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밝은 얼굴로 조잘조잘 떠드는 수습 수도자 앞에서 차마 냉담한 낯빛을 할 수 없어 미카엘은 그저 어색하게 미소 짓기만 했다.

‘데미안 이야기나 계속하지. 선생님 이야기라면 온종일 할 자신 있는데.’

그 모습이 꼭 자기 물건을 팔 생각만 가득한, 탐욕스러운 두 장사꾼의 만남을 보는 듯했다.

“등은 다 골랐나?”

“아, 네.”

그래도 수습 수도자는 미카엘의 물건에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잘생긴 사람이 목소리마저 끝내주게 좋다고 생각하면서 데미안이 건네는 등을 멍하니 받아들었다.

“아, 이건…… 그, 웃는 태양인가요? 코가 일자로 쭉 뻗은 게…… 어, 웃는 얼굴이…… 천진난만하고 해맑아 보이네요.”

“고양이인데.”

혹여 그녀가 못 들었을까 데미안은 등에 그린 이상한 무언가를 검지로 가리켜 보이며 다시 한번 말했다.

“고양이야.”

이로써 사제 둘 다 예술적인 재능은 없다는 게 밝혀졌다.

“선생님, 이거 저예요?”

자기 손으로 그린 거긴 하지만, 데미안의 눈은 정상이었기에 등에 그린 그림이 퍽 흉측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하길 꺼리니 미카엘이 상기된 얼굴로 다시 한번 물었다.

“절 그리신 거예요?”

“응.”

데미안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미카엘은 샛노란 민들레가 톡 피어나는 것처럼 활짝 웃었다. 그는 손끝으로 가만히 울퉁불퉁한 등 표현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귀엽다…….”

데미안은 말없이 미카엘을 꼭 감싸 안았다.

이게 귀엽다니. 미카엘은 그저 예술적인 감각이 남다를 뿐 정말로 최선을 다해 수를 놓은 거였다.

“이리 와라. 여기에 서서 살짝 고개를 숙이고 블람께 기도해.”

미카엘을 신당 앞으로 이끈 데미안이 자세를 잡아 주듯 그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네? 기도하라구요? 당신이 아닌 다른 신에게요?”

광신도가 신탁을 듣고 기겁하자, 아량 넓은 신이 얼른 그를 달래 주었다.

“블람은 나와 친하니까 괜찮아. 삼촌 신 같은 거라고 생각해.”

그 말을 듣고 미카엘의 표정은 안 좋아졌다.

“네가 그 미카엘이니 예쁘게 봐 달라고 공손하게 부탁드려라.”

어쩐지 기도 내용까지 아빠와 친한 아저씨한테 하는 말 같아서 미카엘은 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선생님, 전 당신을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하고 잠자리하고 싶지도 않구요.”

“그럼 형의 친구 신이라고 생각해.”

아버지하곤 섹스하고 싶지 않다던 놈이 형하고 섹스하는 덴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 바로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참 까다로운 취향을 지닌 미친놈이었다.

하기야 광신도인데 선하고, 그렇지만 착하진 않고 시건방지며, 배려심이 넘치지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지랄하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담가이자, 그 누구보다 허드렛일을 좋아하는 왕자님이니 말이다.

“밖으로 나가지.”

“밖으로요?”

“선계로 가려면 다른 입구로 가야 해.”

말을 마치자, 손바닥 안으로 가늘고 긴 검지가 곰질곰질 파고들었다. 데미안은 무의식중에 그 손가락을 꼭 쥐면서 고개를 돌려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불안과 두려움에 푸른 눈동자가 간절한 눈길로 데미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군.’

데미안은 그 겁먹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사교 행사에 참석해야 할 일이 많다 보니 왕자는 종종 외향적인 성격인 양 친근한 가면을 쓸 때가 있었지만, 실제로 그는 낯도 심하게 가리고 경계심이 강했다. 특히 모르는 사람에게 둘러싸이면 바로 불편해하면서 아는 사람 곁에 꼭 붙어 있으려 했다.

“괜찮아.”

여태껏 미카엘은 감당하기 어려운 절망감이 그를 집어삼키면 홀로 휘청거리다가 바닥으로 푹 꺼질 것만 같은 모습을 했다. 고통과 고뇌를 돌덩이처럼 온몸에 매단 채 끝을 알 수 없는 심해 속으로 몸을 던지곤 했다.

하지만 믿음이란 게 생겼으니 이제 그는 홀로 몸을 불태우는 대신 신에게 매달렸다.

“내가 곁에 있잖아.”

데미안을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꼭 커다란 달을 흠뻑 머금은 호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사랑과 동경, 그리고 믿음을 아낌없이 보내오는 눈빛이 꼭 새하얀 빛이 우수수 쏟아진 맑은 물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내가 널 지킬 거야.”

신은 유약한 사도가 사랑스러워서 그를 더없이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미카엘은 도로 호기심 많은 새로 돌아가 거대한 나무를 쪼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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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원고료 쿠폰 선물해 주신 poiumnbv 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의 쓰레... 작품은 트위터 @zedgarhsia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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