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한 번은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두 번은 그러면 안 되지.”
그러면 천 년이나 기다린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미카엘의 하얀 목덜미를 커다란 손으로 움켜쥐면서 데미안은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불쌍한 사람이 될 바엔 차라리 잔인한 사람이 될 생각이니.”
미카엘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데미안을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면서도 그의 말속에서 아주 작은 힌트라도 찾아내려고 영민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 어떤 수단으로도 절대로 날 배신하지 마라.”
하지만 이어진 말은 미카엘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배신이라니.
늘 안절부절못하면서 매달리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번은 그러면 안 된다, 라는 말은 이미 한 번 미카엘이 그를 배신한 적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난 1년간 미카엘은 주인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며 그 곁을 따라 걷는 개만큼이나 데미안에게 충직했다고 자신했다.
미카엘은 오로지 데미안에게 무언가를 사 주고 싶어서 돈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그에게 자립한 성인 남자로 보이고 싶어서 아파트를 장만했고, 그가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으며, 그가 인정해 주길 바라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라는 자격까지 따냈다.
대체 어떤 방법을 통한 건지 몰라도 데미안이 스물두 살의 국립대학교 졸업생 미카엘 홀리브링어, 라는 새 신분을 만들어 줘서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정신건강의학은 이제 막 생겨난 신생 학문이라 그런지 아직 국가 자격증은 없었지만, 전문의가 되는 데 필요한 민간 자격은 어마어마하게 많았기에 미카엘은 말 그대로 모든 시간을 학업에 갈아 넣었다.
잠자거나 먹거나 마실 필요가 없는 몸이라는 말은 24시간을 온전히 무언가에 투자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뜻대로 미카엘은 자격을 따내기까지 단 1분도 허투루 쓴 적이 없었다.
데미안이 산책하러 나가는 시간에 잽싸게 집 밖으로 나가 우연처럼 그와 마주치기 위해 신전 주위를 배회한 것 빼고는 말이다.
“왜 대답이 없을까?”
데미안이 목울대 위에 올린 엄지손가락에 지그시 힘을 주자, 절로 숨이 턱 막히면서 혀 밑에 말간 침이 고였다.
하지만 미카엘은 제 충성심을 의심하는 데미안에게 화가 나기보다 그간 조금씩 모았던 조각을 맞춰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카엘!」
처음 만났을 때 마치 구면인 것처럼 자기 이름을 불렀던 데미안.
「왜, 어떻…….」
고통과 슬픔으로 일그러진 눈으로 자신을 황망히 바라보던 데미안.
「내게 소중한 사람이…… 유리시아 신의 지옥에 떨어졌기 때문이네.」
신앙심도 없으면서 소중한 이를 위해 천 년간이나 유리시아에게 기도한 데미안.
「그래서 천 년 동안 줄곧 기도해 오셨던 거군요. 누군가가 그를 위해 계속 기도하는 한은 판결이 유예되니까요.」
자기 이름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주제에 판결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던 자신.
「죄를 지은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신과 자신이 죄를 지은 자와 그 자신에게 용서받아야만 하네.」
강조하듯 속죄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데미안.
「오지 마세요, 미카엘! 영혼이 더러워집니다!」
데미안과 달리 단 한 번도 미카엘을 악마라고 칭한 적 없는 유르엘. 샤르티엘과 같은 악마라고 하기엔 위화감이 드는 경고를 미카엘에게 했던 그녀.
‘악마가 아니었어.’
그렇다면 나는 대체 뭐지?
왜 데미안은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아니.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만일 데미안이 거짓말을 했다면 그건 분명 이유가, 그것도 미카엘을 위한 이유가 있을 거다.
「금색으로도, 붉은색으로도 나눌 수 없도록 영혼이 뒤섞여 버렸으니.」
데미안은 그와 자신의 영혼을 하나로 묶으면서 분명히 말했다.
「이제 그 무엇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으리라.」
금색이 천사를 뜻한다면, 붉은색은 뭘 뜻하는 걸까. 미카엘은 단순히 그게 악마를 뜻하는 색깔이라고 생각했는데.
‘죄인…… 아아, 나는 죄인이야.’
어째서 데미안이 그더러 악마라고 했는지 알 것만 같다.
지금이야 데미안이 설사 자신을 죽이려고 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를 신뢰하지만, 1년 전만 해도 미카엘은 낯선 곳에 홀로 놓인 새끼 고양이만큼이나 경계심이 강했으니까.
데미안에게 한눈에 반한 것과는 별개로 그의 배려를 의심하고, 그의 의도를 잘게 뜯어 보려고 했다. 혹시 그 안에 독이라도 들었나 하고.
심지어 미카엘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으니, 만일 데미안이 동종 업계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바로 그를 경계했을 거다.
이 사람은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줄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경계심 없이 다가오는 거지? 하고.
비록 경찰과 도둑만큼이나 정반대 위치에 놓여 있지만, 대부분의 악마가 한때 천사였다고 생각하자, 그가 왜 자신을 형제처럼 친근하게 대해 주는지 이해하고 마음을 놓았다.
아마 그게 데미안의 노림수였을 거다.
아무런 기억도 없는 미카엘이 경계심을 낮추고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그런 짓을 무려 1년 동안이나 하다니.
새삼 데미안이 얼마나 인내심이 많은 무서운 계략가인지 깨달았다.
“……읏!”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뒤에야 미카엘은 자신이 아직도 데미안에게 목덜미가 잡힌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목이 욱신거리고 혀뿌리가 찌릿찌릿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상념에 잠겼던 모양이다.
“제가 왜 선생님을 배신해요? 전, 저는 정말, 저에겐 선생님밖에 없는데…….”
너무 놀라서 말을 더듬을지언정 미카엘의 눈동자는 신실해 보였기에 데미안은 비로소 그를 놓아주었다.
“내가 널 5분간이나 목 조르고 있었어. 알아? 왜 대답을 안 해.”
굳은 얼굴의 데미안이 혹여 손자국이 남진 않았나 미카엘의 목덜미를 살피며 말했다.
책망하는 투의 말이었지만, 자책하는 듯한 어조였다.
“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사과의 말에 데미안이 진한 눈썹을 꿈틀거리자, 미카엘이 빠르게 말을 고쳤다.
“죄라도 지었어요, 제가? 좀 늦게 대답할 수도 있지. 왜 닦달해요!”
그 뻔뻔한 대꾸에 데미안은 황당하단 얼굴을 했지만, 이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 순순한 대답에 갑자기 코끝에 물기가 찡 하고 어리는 것만 같아서 미카엘은 홱 고개를 돌려 데미안을 외면했다.
자기가 주눅 드는 걸 볼 바엔 차라리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걸 더 좋아하는 데미안.
그가 정말 분에 넘치도록 절 아낀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가슴에 와닿아서 절로 눈가가 뜨거워졌다.
‘날 위해 천 년간이나 기도했나요? 나는 무슨 죄를 지었어요? 내가 당신을 배신한 건가요?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그럴 수 있죠?’
제 목덜미에 팩 얼굴을 파묻어 버리는 미카엘이 토라진 거라고 착각했는지 데미안이 그의 등을 가만히 도닥이며 말했다.
“아까 그 이야기는 잊어. 네가 어떻게 그리 강한 거냐고 물어봐서 대답한 것뿐이니까.”
미카엘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데미안이 피로한 듯 자기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이젠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과거의 일이라서 그래. 잊어.”
미카엘이 여전히 아무 말이 없자, 데미안이 그를 태운 무릎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대답을 채근했다.
“미카엘. 대답해야지?”
“……네.”
데미안이 대놓고 턱을 간질이며 고양이 취급하는 데도 미카엘은 울적한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대답을 들어서 안심한 듯 데미안은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내 자지가 불쌍하면 제발 불어 터질 때까지 빨지 좀 말고.”
“제가 예뻐해 준 거예요.”
그제야 좀 기운이 났는지 미카엘이 다정한 손길로 데미안의 중심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데미안은 병아리를 지나치게 조몰락거려서 이삼 일만에 죽여 버리는 어린이를 바라보듯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눈동자로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걘 혼자 쉬고 싶대.”
“안 돼요. 천 년 동안이나 혼자 있었잖아요. 자꾸 손이나 입을 만나서 사회성을 길러야죠.”
씨발. 말이나 못 하면.
데미안은 조막만 한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냈다가 미카엘이 절 바라보자, 바로 표정을 바꿔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튼, 너의 내면 무기는 아직 날카로우니 조심해라.”
“……네.”
미카엘이 도로 침울한 얼굴을 하자, 그가 화낼 만한 일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던 데미안이 바로 포기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낭처럼 메고 다닐까.”
데미안이 짐짓 진지한 어투로 말하자, 미카엘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저를요?”
“그래.”
“어떻게요?”
“이렇게.”
무릎 위에 앉은 미카엘을 그대로 뒤로 돌려 업은 데미안이 아기를 어르듯 그를 위아래로 둥개둥개 흔들자, 미카엘이 이게 뭐냐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역시 화내는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이 좋지.
데미안은 어여쁘게 웃는 미카엘을 따라 미소 지었다.
“다리가 다친 것처럼 붕대를 감을까요? 그럼 계속 업혀 다녀도 될 이유가 생기는 거잖아요?”
진지한 얼굴로 농담한 데미안과 달리 미카엘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진담을 뱉었다.
“음…… 내가 굳이 밖으로 부른 이유는 유렐을 피하기 위함인데.”
정말로 그를 늘 업고 다니고 싶은 건 아니었기에 데미안이 슬그머니 화제를 전환하면서 미카엘을 옆자리에 앉혀 주었다. 데미안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어쩔 수 없이 거두면서 미카엘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으아, poiumnbv 님!
원고료 쿠폰 선물해 주신 걸 이제야 확인했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그리고 꾸준히 원고료 쿠폰 선물해 주시는 아레온 님!
항상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