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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64화 (6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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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내가 새로운 지부로 옮겨 가면 항상 날 전담하는 천사가 하나씩 따라붙거든. 어머니께 충성을 다하는 천사 말이야.”

“감시자 말이군요.”

“그래.”

한 번 무릎 위에 앉더니 아예 맛을 들였는지 긴 소파 위에서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온 미카엘이 기어코 다시 데미안의 무릎을 차지하고 앉았다.

“어머니라고 해서 하루가 1백 시간인 건 아니야. 신도도 살피고 천사도 지켜보면서 악마도 경계해야 하지. 동시에 나도 감시해야만 하고.”

“왜 굳이 선생님만 감시하시는 거죠? 선생님이 너무 강하시기 때문인가요?”

데미안은 왜 뻔한 걸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헛웃음을 토해냈다.

“악마보다 더 악질적인 패륜아 아닌가.”

“어…….”

미카엘이 할 말을 잃은 얼굴을 하자, 데미안이 비로소 진지하게 답했다.

“난 생전에도 신앙심이 없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래.”

데미안은 사제복을 입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머쓱한 듯 괜히 빳빳한 목깃을 한 번 만지작거렸다.

“그런 주제에 힘만 강하니 당연히 어머니께서 경계하실 수밖에. 날 이렇게 강하게 만들어 주신 게 바로 어머니지만 말이야.”

“선생님을 경계하신다면서 대체 왜요?”

“내가 유리시아의 천사가 되는 조건으로 세 가지 소원을 빌었다는 걸 기억하나?”

당시엔 데미안이 이미지 관리를 하느라 소원이라는 앙증맞은 표현을 사용했지만, 실제론 차디찬 계약 조건이었다.

“네. 첫 번째 소원으로 생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해 달라고 하셨다면서요.”

데미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두 눈을 내리떴다.

긴 속눈썹이 반듯한 얼굴 위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자, 우수에 젖은 낯빛이 한층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두 번째 소원으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상관없으니 날 그 누구보다 강한 존재로 만들어 달라고 했거든.”

정말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할 줄은 몰랐지만.

데미안은 쓴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공작의 사생아였던 데미안은 유년기를 사창가에서 보냈고, 소년기를 용병단에서 보냈다.

페르페오 공작가의 장자가 사망한 후 비로소 절 불러 준 공작에 의해 공작가의 일원이 되긴 했지만, 데미안은 절 극도로 혐오하는 어머니와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여동생, 그리고 불편한 연정을 보내 오는 남동생 사이에서 겉돌다가 도망치듯이 성기사단에 들어갔다.

하지만 성기사가 된 후 용병 시절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대부분 범죄 행위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무고한 종교쟁이들을.

많은 성기사들이 그 이교도 사냥에 회의감을 느끼고 정신적인 병까지 얻었지만, 데미안은 아주 멀쩡했다.

거세당했을 때도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대신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짜로 당신 아들을 유혹해서 내 엉덩이에 그 잘난 왕자의 좆을 박아 봐야겠다고 이를 간 데미안이다. 그는 시련을 겪을수록 더 악을 품고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신의 시련은 어찌나 지독하던지 그 데미안조차 몇 번이나 미치게 했다. 그래서인지 데미안은 지금도 종종 의심하곤 했다. 내가 지금 제정신이 맞는 걸까? 하고.

어쩌면 눈앞에 있는 미카엘은 환각이고, 실제로 나는…….

“그럼 세 번째 소원은요?”

미카엘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데미안의 현실 감각을 일깨웠다.

두 눈을 느릿하게 몇 번 깜빡거린 데미안은 제 손등을 검지로 긁어 대는 미카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의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었다.

“그건 말해 줄 수가 없어.”

“그렇군요.”

나와 관련된 소원이겠군.

미카엘이 말없이 두 눈을 내리뜨자, 데미안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그는 미카엘이 더 조르거나 서운한 티를 낼 줄 알았나 보다.

“정말로 말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 게 아니야.”

“알아요.”

“안다고?”

“바보가 아니잖아요. 저는.”

숨조차 죽인 데미안이 검은 눈동자로 집요하게 미카엘의 푸른 눈동자를 좇았다. 하지만 뜨거운 광기까지 느껴지는 눈빛과 달리 그의 저음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무엇을 안단 말이지?”

“아직 과거의 일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데미안의 커다란 손을 끌어 제 가슴 위에 올린 미카엘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탄탄한 가슴팍을 짚었다.

“당신께서 제게 최선을 다해 오셨으니 이젠 제가 그래야 한다는 걸요.”

“하지 마라.”

데미안이 감동에 젖은 얼굴로 눈물을 흘려 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저렇게까지 냉담하게 대꾸할 줄은 몰랐기에 미카엘의 눈은 자연스레 뾰족해졌다.

“뭘 하지 마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넌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나 하면서 숨이나 쉬면 돼.”

미카엘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까지 다 나왔다.

“선생님은 대체 절 뭐로 보시는 거예요?”

“밥 먹고 똥 싸고 털 날리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도 좋으니까 그냥 건강하기만 하길 바라는 고양이.”

미카엘은 저 말을 듣고 좋아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벙싯거리다가 툭 뱉듯이 물었다.

“그렇게 고양이를 좋아하세요?”

보기 좋은 입매를 위로 올린 데미안은 근사하게 미소 짓고는 답했다.

“개보다 많이 먹긴 했지.”

“맙소사, 데미안!”

두 눈을 크게 뜬 미카엘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도, 데미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개는 먹어 버리기엔 써먹을 구석이 너무 많지 않나.”

중세 시대 사람이란!

미카엘은 치를 떨었다가 그 욕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오는 걸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왜 절 고양이로 비유하셨던 건데요!”

“비유는 비유일 뿐이지. 천사들은 죄다 좆같지만, 넌 천사처럼 아름답지 않나.”

미카엘은 그 말이 별로 납득이 안 가는지 데미안의 어깨에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비벼 대다가 아예 그를 콱 깨물어 버렸다.

“그래. 이런 거나 해라.”

데미안은 그의 금발을 부드러이 쓰다듬으면서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괜히 네가 최선을 다할 필요 없어.”

모래사막처럼 버석거리는 말은 무척이나 달아서 건조한 쿠키를 한 움큼 집어 먹은 것처럼 목이 메었다.

입술을 꼭 깨문 미카엘은 투정을 부리는 척 그의 어깨에 얼굴을 마구 문질러 대며 물기를 닦아냈다. 데미안은 제가 짜증을 내는 것보다 우는 걸 더 싫어할 테니 말이다.

“평생 신을 위해 봉사하며 사셨다고 했잖아요.”

꿀꺽 침을 삼켜서 뻑뻑한 목 안을 적신 미카엘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화를 재개했다.

“그래. 하지만 신앙심이 깊어서 그랬던 건 아니야. 그건 그냥…….”

데미안은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사랑받는 왕자를 자살로 내몬 게 자신이라고 자책했다.

“나 스스로 내린 벌 같은 거였지.”

그가 어렸을 때 좀 더 다정하게 대해 주었더라면. 해 달라는 걸 다 해 주진 않더라도 듣는 시늉이라도 해 주었더라면. 너 때문에 거세당한 거라고 원망하지 않았더라면. 마음속에 싹튼 감정을 그리 오래 부정하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더라면. 그가 방황하지 않도록 좀 더 단단하게 지지해 주었더라면. 위태로운 눈으로 절 바라보는 그에게 더 믿음을 주고 신뢰를 주었더라면.

‘같이 도망가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나이가 들면서 죄악감과 후회는 서서히 희미해졌지만, 데미안의 망막엔 여전히 남은 생명력을 불태워 웃는 것처럼 해사하게 웃음 짓던 미카엘이 눌어붙어 있었다.

“수도원 생활도 그래.”

성 밖에서 미카엘을 기다리던 데미안은 일주일 주 뒤 왕자가 서거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도로 왕궁으로 돌아갔다.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하지만 왕비는 데미안을 죽도록 싫어했음에도 왕자가 그에게 남긴 유서를 전해 주고는 그를 그저 국외로 추방해 버렸다. 다른 나라에서 평생 편하게 먹고살 수 있을 만한 거금과 함께.

데미안은 명예도, 지위도, 가문도 모두 잃어버렸지만, 애초에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기에 그게 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을 벌해 줄 이를 찾아 자기 발로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건 그저 나 스스로 내린 판결의 결과였어.”

무기 징역.

그게 바로 데미안이 그 자신에게 선고한 형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감 생활 덕분에 천사가 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어머니께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난 그분께 절대적으로 복종하기로 했어. 하지만 그건 기간 한정 계약이었지.”

미카엘은 무의식중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가 유리시아에게 목줄을 건네준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내 소원은 거의 다 이루어졌어.”

데미안은 유의미한 눈길로 미카엘을 응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한 발자국만 남은 상태이지.”

“……그런데요?”

미카엘은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내가 유리시아의 호수천신이 되면 더는 그분의 뜻에 저항할 수 없게 돼.”

데미안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의 깊은 저음은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미카엘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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