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 죽기 싫으면 선하게 살면 된다
귓가에 파고드는 듣기 좋은 저음은 꼭 영혼을 탐내는 악마처럼 은근한 어조로 미카엘을 현혹했다.
이리 와서 편안해지라고.
나에게 대적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 내 너의 적들을 모두 무참히 말살해 주겠노라고.
절로 입안에 타액이 고일 정도로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 어떤 악마도 데미안보다 더 능숙하게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개소리 좀 작작 하시지, 선생. 누가 겁을 먹었다고?”
하지만 미카엘은 그 말을 듣고 도리어 제정신이 돌아온 듯 새파란 눈동자에 날을 세웠다.
그는 언제 움츠러들었냐는 듯 섬세한 눈썹을 매섭게 치켜세운 채 자기 잇자국으로 얼룩덜룩해진 데미안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거칠게 움켜쥐었다.
“내가 박고 싶을 때 당신이 다리를 벌리는 계약이었을 텐데? 그 반대가 아니라.”
짐승의 으르렁거림과도 같은 경고였지만, 데미안은 그저 평온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떡일 따름이었다.
“물론 그 계약의 내용은 기억하고 있네.”
미카엘의 대답 자체가 그리 중요하진 않은 것처럼.
“자네가 강한 사람이란 것도 이미 잘 알고 있고.”
데미안은 저항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미카엘의 나머지 손을 들어 제 심장 위에 올리기까지 했다.
언제든 그가 자신의 숨통을 거머쥘 수 있도록 한 손엔 목덜미를.
언제든 그가 자신의 심장을 으스러뜨릴 수 있도록 한 손엔 심장을.
두 급소를 순순히 미카엘에게 내준 데미안은 여전히 담담한 낯빛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데미안 또한 일개 생명체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손바닥 아래에선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자넬 신뢰하고 존경하는 거지.”
그의 말속엔 뒤틀린 진의 따위는 숨겨져 있지 않을 것이다.
데미안이 겉과 속이 다른 남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그의 부드러운 말은 경계심이 강한 미카엘에게도 쉬이 녹아들었다.
“내게 매달리고 싶지 않다면, 그만 자기 발로 서게.”
미카엘의 발밑으로 흘깃 시선을 던진 데미안이 흡사 어린 제자를 훈계하듯이 한마디 했다.
“자네라면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 그의 말대로 미카엘에겐 뜨뜻한 담요 따위가 필요 없었다.
그의 영혼은 지글지글 끓는 지옥에서 막 올라온 참이니 훈훈한 온기 따위가 필요할 리 없었다.
‘설마 정신 차리게 하려고 일부러 도발한 건가.’
머리카락을 삐쭉삐쭉 서게 했던 분노와 투쟁심이 가라앉자, 미카엘은 자신의 발밑에 드리워졌던 시커먼 구멍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는 걸 인지했다.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지그시 데미안을 노려보았지만, 오히려 미소까지 지어 보인 데미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따름이었다.
“충고는 고맙게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미카엘은 제 어깨를 감싸고 있던 데미안의 손을 들어 아래로 내려놓았다.
이번엔 날카로운 방어가 아니라 단호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미카엘이 그의 목덜미에서 손을 거두고는 말을 덧붙였다.
“제 머리 위로 기어오르지 마세요.”
대천사에게 하는 말치고는 아주 시건방진 말이었다.
툭하면 그의 머리 위로 올라앉는 미카엘이 하기엔 염치없는 말이기도 했고.
“그리하지. 용서해 줘서 고맙네.”
하지만 데미안은 응당한 요구를 들은 사람처럼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머쓱한 웃음을 지은 그는 오히려 조금 송구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뇨…….”
차라리 데미안이 위압을 가했다거나 마주 성질을 부려 줬다면 좋았을 텐데.
날카로운 경계심이 누그러지자, 그 자리를 메운 건 한심한 행동에 대한 후회였다.
자연스럽게 미카엘의 입에서도 머뭇머뭇 사과하는 말이 흘러 나왔다.
“저야말로 까칠하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자네도 까칠하단 건 아는군?”
“선생님. 반성하고 있잖아요…….”
놀랍다는 얼굴로 눈썹을 들어 올렸던 데미안이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하네. 나도 자네를 용서하도록 하지.”
“예전 기억을 떠올리면…….”
미카엘은 절로 가빠지려는 숨을 간신히 억누르며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져서 저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작용해 전환(Conversion)…… 어, 그러니까 평소에 내가 제어할 수 있었던 신체 기관이 통제 불능이 되는 것 같아요.”
미카엘은 자기 상태를 객관적인 시점에서 이론적으로 설명하며 점점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 탓에 공황에 빠지게 되는 것 같고요.”
데미안은 신중한 태도로 물었다.
“다음에 같은 증상이 나타나면 혼자서 대처할 수 있겠나?”
“으음. 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잘된 일이군.”
아아, 그러고 보니 심리학을 공부해 보라고 권한 것도 데미안이었지.
인간을 유혹하려면 그들의 심리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두 사람이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던 때의 일이었다.
‘설마 이 모든 게 그의 계획인 건 아니겠지.’
미카엘의 시선을 느꼈는지 데미안이 그를 마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아니, 그건 아니지.’
다른 사람도 아닌 데미안이 겨우 자신의 인생을 조지려고 1년에 걸쳐 커다란 판을 짜 두었을 것 같진 않다.
막말로 그는 1천 살이나 먹은 대천사이고 미카엘은 아직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어린 악마였으니까.
그가 부수고자 마음만 먹었다면 미카엘은 진작 잿가루가 되어 버렸으리라.
‘그보다 그, 라는 말은 남자라는 뜻인데. 아버지인가?’
머릿속이 맑아지자, 자연스럽게 사고는 도로 데미안의 과거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미카엘은 생전의 기억보다 데미안의 과거사에 더 관심이 많았으니까.
‘데미안은 생전에 성교해 본 적이 없다고 했지.’
제아무리 절절한 연인 사이였다 할지라도 잠자리 한번 가져 본 적 없는 이를 위해 천 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할까?
제아무리 데미안이 순고한 남자라고 해도 그건 너무 과한 것 같았다.
“밀레이(Milley)로군.”
시야가 탁 트인 옥상에서 바라보자, 강변을 따라 부두 쪽으로 이동하는 여섯 대의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는 극소수의 부유층만이 소유할 수 있을 정도로 고가였기에 두 사람은 그들이 이 나라, 벤트리(Ventry)를 쥐락펴락하는 토착 갱단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다.
또한 그들은 유리시아 신을 따르는 극단적인 광신도들로, 그분을 모시는 데미안 역시 그들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항쟁이 일어날 것 같네요.”
미카엘이 부둣가에 있는 남자들에게 흘깃 시선을 던졌다.
다소 허름한 옷차림을 한 그들은 거의 나하무트(Na'hahmute)에서 이민 온 자들로 밀레이에 맞서는 신생 갱단이었다.
그들은 일명 카람(Kharam)으로 불리며, 블람을 따르는 과격파로 알려져 있다.
여태까지 이렇다 할 화력을 갖추지 못해 매번 밀레이에게 일방적인 피해를 보더니 마침내 그들도 나하무트의 동맹국인 미라 대국으로부터 총기를 들여온 것 같았다.
“유리시아께서도, 블람께서도 이런 건 원하지 않으실 텐데 말이야.”
부두는 주거 지구나 상업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집값이 싼 곳을 찾아 몰려든 하층민들로 인해 골목 사이사이에 불법으로 건축된 연립 주택이 섞여 있었다.
벽은 물론이거니와 현관문 한 짝조차 없는 허술한 주거 공간은 사생활이라고는 전혀 보장되지 않는, 흡사 닭장 수백 개를 꽉 욱여넣은 것만 형태의 주택이었다.
그곳에 사는 수백 명에게 총알을 막을 수단 따위는 당연히 없어 보였다.
“어느 쪽을 편드실 건가요? 역시 밀레이인가요?”
“둘 다.”
“흐음. 양측의 싸움을 막아서 평화로 이끄시겠다는 거군요? 꽤 어려운 임무가 되겠네요.”
“둘 다 죽여야지.”
미카엘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데미안은 참 때때로…… 아니, 미카엘은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수가 많을 때는 어떻게 하죠, 선생님? 한 명 한 명 저울 위에…… 아하.”
데미안이 권총을 두 정 꺼내 들자, 미카엘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마음 같아선 기관총을 쏘고 싶네만, 이 시대의 기관총은 아직 집탄율이 그리 좋지 않거든.”
철컥. 철컥.
미카엘은 무심한 얼굴로 총을 장전하는 데미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마디 했다.
“선생님. 만약 제가 선생님께 반하게 된다면, 전 어떻게 될까요?”
데미안은 흘깃 그를 돌아보면서 답했다.
“사랑을 하면 행복해진다고 하니 하루하루가 행복해지겠군.”
“악마로서 망하는 게 아니라요?”
미카엘 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인 데미안이 그의 콧등에 난 연갈색 점을 혀로 날름 핥고는 미소 지었다.
“그 대신 천사로서 흥하면 되지 않나.”
블람 신만큼이나 끈질긴 남자였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가 절 설득하는 게 썩 싫지 않았기에 데미안의 반듯한 눈썹을 마주 혀로 핥아 주고는 웃음 지었다.
“미안해요, 선생님. 지은 죄가 많아서 있어서 천사가 될 순 없어요.”
데미안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미카엘의 긴 속눈썹 위에 입술을 깊이 묻었다가 떼어 내고는 씩 웃어 보였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젠장. 그렇게 근사하게 웃지 말라고.
어두컴컴한 밤하늘 속에서도 빛이 나는 듯해 당신이 있는 곳을 적들이 금방 알아차릴 것만 같으니.
“선생님, 저는 뭐 안 주시나요?”
데미안이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앉자, 건물 벽을 손바닥으로 짚은 채 미끄러지듯이 바닥으로 내려온 미카엘이 그의 곁에 서면서 물었다.
“날 도와줄 텐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야 없지요. 명색이 악마인데 천사 손에만 피를 묻힐 순 없잖아요?”
데미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치 기도를 하듯이 손바닥을 마주 댔다가 천천히 좌우로 벌렸다.
손바닥 사이에 알 수 없는 공간이 열렸다가 닫힌 것처럼 그의 손안에서 진한 선홍색의 가죽끈 위에 금색 실로 수를 놓은 검잡이를 지닌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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