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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기 싫으면 선하게 살면 된다
데미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빠르게 겉옷을 들고 온 미카엘이 그의 등 뒤에 서면서 물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시려고요?”
“대피? 아, 그런 방법도 있지.”
데미안은 그의 시중을 받는 게 아주 당연한 것처럼 미카엘이 들고 온 재킷 안으로 팔을 한쪽씩 밀어 넣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될 걸세. 그사이 무고한 자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겠지.”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예의 그 황금빛 천칭을 꺼내 든 데미안이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담담히 답했다.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면 될 거 아닌가.”
빠르게 창문을 연 데미안이 꼭 새가 날아가는 듯한 가벼운 움직임으로 옥상에 올라서자, 미카엘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물었다.
“저도 따라가도 되나요?”
데미안은 진한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면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 따라오지 않을 텐가?”
미카엘은 바로 옥상으로 훌쩍 뛰어 올라서면서 싱긋 웃었다.
“당연히 따라가야죠.”
* * *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부두에는 수십 명의 남자들이 거대한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그들이 옮기는 상자 안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총이네요. 미라 대국(Mi'rha Great Kingdom)에서 들여온 건가 본데요.”
미카엘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했지만, 데미안은 아무런 말 없이 그 광경을 그저 지켜보기할 뿐이었다.
정확히는 하나둘 거리로 몰려드는 흰 강아지와 검은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유리시아 교는 죽은 자의 영혼을 인도하는 존재를 사신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모두 흰 강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블람 교에서 신령이라 불리며 검은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오늘 이 자리에서 두 신을 섬기는 신자들이 대량으로 죽어 나갈 거라는 의미였다.
“안녕하세요, 데미안 장군님. 오랜만이에요.”
데미안을 알아본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훌쩍 다가와 발치에 뺨을 비벼 대자, 데미안이 몸을 낮춰 앉은 채 그의 턱 밑을 긁어 주었다.
“장군이 아니라 천사일세.”
“고집두 참.”
기지개를 켜듯이 등을 뿌드드 털던 고양이가 꼿꼿이 세운 꼬리로 슬쩍 데미안의 종아리를 건드리고는 훌쩍 거리로 뛰어내렸다.
“언제든 오세요. 블람께선 항상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미카엘은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다가 슬쩍 데미안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방금…….”
“개종을 권유받았지. 종종 있는 일이라네.”
“어, 그래도 되는 건가요?”
미카엘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슬며시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혹시 유리시아 신과 블람 신의 사이가 안 좋다거나?”
“그렇진 않네. 그분들은 그저 당신의 의지를 대행할 대리인이 동시대에 필요하신 것뿐이지.”
곁에 있는 남자가 갑자기 멀고도 신비한 존재처럼 느껴져서 미카엘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선생님은 신을 만나 보신 적이 있나요?”
“있네. 유리시아 신과 블람 신을 만났지.”
데미안은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을 덧붙였다.
“유리시아 신께선 내게 천사가 되기를, 블람 신께선 내게 장군이 되라고 권하시더군.”
아, 그래서 블람 신이 여전히 그에게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시다는 거군.
이 죄 많은 남자는 남녀노소뿐만 아니라 신까지 홀려 버리는 모양이었다.
“어, 그렇게 두 신으로부터 고용 제의가 들어올 수도 있는 건가요?”
고용 제의라는 표현이 퍽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데미안은 짧게 웃었다.
“나는 딱히 유리시아 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전파하며 살진 않았네. 그저 보편적인 정의와 선을 행하며 절제된 삶을 살았지.”
아무래도 그 삶의 모습이 두 신의 교리에 모두 합당했던 것 같다며 조금 쑥스러운 듯 웃는 데미안은 평소 여유만만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조금 풋풋해 보였다.
잠깐이지만 대천사 데미안이 아닌 성기사 데미안의 모습을 살짝 엿본 것만 같았다.
“그럼 왜 하필 유리시아 신을 선택하신 거죠?”
하필, 이란 표현이 좀 이상한가.
미카엘은 말을 고치려 했지만, 데미안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답할 따름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세.”
“선생님은 온화하신 분이니 제가 그 이유를 물어본다고 해서 제게 천칭을 들이대시진 않겠죠?”
미카엘이 당돌하게 묻자, 데미안은 쓴웃음을 흘리고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머뭇거리다가 운을 떼는 데미안은 약간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게 소중한 사람이…… 유리시아 신의 지옥에 떨어졌기 때문이네.”
충격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를 배려해 말을 아끼는 대신 질문에 추격을 가했다.
데미안의 과거사를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으니까.
“그 말은 그분이 유리시아 신의 신자였다는 말이군요.”
데미안은 쓴웃음을 흘리고는 L이 오른쪽 방향으로 누운 듯한 모양의 펠름 문양 목걸이를 손으로 한 번 쓸었다.
그 문양은 한 번 절벽에서 추락한 이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 아주 독실한. 그에 비교하면 난 불량한 신자였지.”
그렇게 독실한 사람이 왜 지옥에 떨어진 거죠?
미카엘은 주변부는 아무렇지 않게 갉작일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은 결국 목 안으로 삼키고 말았다.
차라리 데미안이 슬퍼하거나 그리워하는 얼굴을 했다면 아무렇지 않게 질문했을 텐데.
두 눈을 내리뜬 데미안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도리어 이질감이 들 정도로 평온한 낯빛이었다.
그건 오랜 세월 풍파를 겪어서 닳을 대로 다 닳아 버리고, 소진할 대로 다 소진해 버려, 더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듯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런 이에게 차마 무얼 더 내놓으라고 손을 벌릴 순 없었다.
“나는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유리시아 신께 귀의하여 천사로서 임무를 다하며 매일 기도했네.”
“얼마나요?”
“천 년.”
천 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무거운 시간이 가슴을 무섭게 짓눌렀다.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것도 모자라 그 후 천사가 되어서까지 노력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압도될 수밖에 없는 위업이었다.
“유리시아 신께선 한번 지옥에 떨어진 영혼을 구원하시지 않는 거로 아는데요.”
지옥에 떨어진 자의 영혼을 매년 한 번씩, 총 아홉 번 씻은 뒤 다시 인간계로 돌려보내는 블람 신과 달리 유리시아 신은 지옥에 떨어진 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영혼의 소멸을 의미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와 자살은 지옥에 떨어질 만큼 큰 죄였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지 않나. 그러니 언젠가 지옥에 떨어진 영혼이 구원받는 날도 올 걸세.”
데미안의 말은 얼핏 희망차게 들렸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래서 천 년 동안 줄곧 기도해 오셨던 거군요. 누군가가 그를 위해 계속 기도하는 한은 판결이 유예되니까요.”
여러 명이 기도한다고 해서 여러 날짜가 유예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하루에 한 번 기도하면 딱 하루만 늘려줄 뿐.
그 말은 데미안이 하루라도 기도를 거르는 순간 지옥에 있는 소중한 이의 영혼도 소멸된다는 뜻이었다.
“잘 아는군.”
그래, 이상하리만큼 잘 알았다.
겨우 미카엘 홀리브링어라는 이름과 자신이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 단 두 가지만 알고 있었던 자신이.
마치 바느질을 할 줄 알았던 것처럼, 요리를 할 줄 알았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배워서 몸에 익힌 듯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두 가지와는 다른 것이 있었다.
“그렇……네요. 내가…… 잘 알고 있네요, 이런 걸…….”
매일매일 몸에 쑤셔 박아서 일상에 밴 듯한 지식이었다.
‘불은 뜨겁다’, ‘비는 차갑다’라는 걸 아주 당연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그야말로 일상과도 같은 지식이었다.
“왜 내가……”
갑자기 가슴이 불안하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춥지도, 덥지도 않았던 몸이 서늘한 한기에 휩싸인 채 덜덜 떨려 왔다.
발밑이 끝을 알 수 없는 시커먼 구렁텅이로 변한 것만 같았다. 이제 남은 건 그 아래로 추락하는 것뿐이었다.
“뭘 두려워하나.”
턱.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미카엘을 커다란 손이 붙들었다.
데미안이었다.
천 년을 살아온 대천사는 궁지에 몰린 듯한 얼굴을 한 미카엘을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위로 쑥 끌어 올렸다.
마치 바닥에 닿아 버린 천칭의 반대편을 손으로 꾹 누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악마는 타락한 천사이니 그들이 교리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세.”
데미안은 아직도 덜덜 떨리고 있는 미카엘의 어깨를 한 손으로 그러쥔 채 그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대천사의 품속은 그 어떤 어둠도 감히 발을 디디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고 안온했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것을 보고 겁먹은 아이가 후다닥 파고든 이불 속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로 가득한 그 안은 감히 불길하거나 불온한 것은 침범할 수 없는 성역처럼 느껴졌다.
“신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자네가 악한 존재라는 건 변함이 없다네.”
바짝 긴장했던 가슴이 그 말을 듣고 은근하게 풀어졌다.
그래, 내가 저 어둠의 일부라고.
미카엘이 두려워하던 구렁텅이가 원래 자신이 속한 곳이라고 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왜 그러지? 아주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대천사의 팔을 뜨뜻한 담요처럼 뒤집어쓴 미카엘이 여전히 파리한 낯빛을 하고 있자, 도톰한 입술을 비튼 데미안이 도발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두렵다면 이제부터라도 내 품속에서 사는 건 어떤가?”
미카엘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검지로 쓱 쓸어 올린 데미안이 검붉은 색의 향수가 잘 어울릴 것만 같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 위에 훅 숨을 불었다.
남색에 관심이 없던 남자조차 절로 달려들게 할 정도로 매혹적인 숨결이었다.
“난 자네와 달리 아주 상냥하게 안아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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