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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42)화 (42/80)

42. 시스템 / ♥♥♥♥♥♥♥♥♥♥

밀랍 날개로 태양을 탐하다 떨어졌던 어리석은 남자처럼 헛된 희망을 품었던 헌터가 맥없이 추락했다.

모든 재생이 끝났다는 듯, 천장에 붙어 있던 거울이 퍽하고 터져 나갔다.

머리 위로 조각난 유리가 떨어지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막았지만, 거울은 허공에서 녹아 사라져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사라졌네요. 거울.”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허웅석은 당황스러워하며 얼음벽에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그러다 실수로 제가 뱉어 버린 사탕을 밟고는 펄쩍 뛰었다.

“어씨, 깜짝이야! 거울이 또 깨진 줄 알았네!”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리니까 그렇죠.”

지채정이 타박하자, 허웅석은 억울하다는 듯 사탕을 으적으적 밟아 부쉈다.

“에헤이! 버리긴 뭘 버려. 길 찾는 용도로 표시해 둔 거지! 오히려 알차게 버리고 튄 건 내가 아니라 마법사 놈…, 윽!”

말이 끝맺기도 전 문규빈이 허웅석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안 버렸어!”

“뭐야, 시벌!”

“안 버렸다고!”

“아, 이거 놓으라니까!”

“규빈 헌터! 진정 좀 하세요!”

우윤혁에게 붙잡혀서 떨어져 나간 문규빈은 철천지원수처럼 허웅석을 노려봤다.

그에 허웅석도 지지 않고 문규빈을 쏘아보면서 목 주변부를 쓰다듬었다.

“허미 시발. 갑자기 돌아 버렸나? 왜 가만히 있는 사람 멱살을 잡어? 잡길.”

“나는… 안 버렸다고.”

무언가 자극받은 사람처럼.

“나는 안 그래….”

문규빈은 과하게 화를 내며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혼자 지쳐 나가떨어졌다.

“안 버렸으면 말지,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실까? 진짜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베?”

어린놈이 과하게 난리 치기에 일부러 더 도발하기는 했지만 사실 허웅석은 거울이 보여준 영상을 믿지 않았다.

애초에 누가 만든 공간인지도 모르는데, 아무런 필터 없이 모두 믿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서울에 저런 괴물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

더욱이 저 정도 능력이면, 그 이상한 녀석이 최소 S급 헌터라는 건데.

S급 헌터가 다시 나타났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버려진 걸로 치면, 그 사기꾼 새끼한테 우리가 버려진 거지.’

허웅석은 영상과 반대 상황을 의심하고 있었다.

저 미치광이 같은 랭커들이야 그놈에게 홀려서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지만.

절묘한 타이밍에 갑자기 사라진 것 하며, 결과적으로 이 밀실에 남은 게 우리뿐인 것까지 퍽 수상쩍지 않은가.

‘아아, 첫 끗발이 개 끗발이니까.’

허웅석은 다시금 카악 침을 모아 뱉었다.

그러자 그게 어떤 버튼이라도 누른 듯 바닥에 박혀 있던 거울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며 익숙한 목소리가 웅웅 울려 대기 시작했다.

「당신을 위해 재미난 걸 준비했습니다. 지금부터 진실을 토해 내기 전까지, 우린. 아주 오래도록 보게 될 겁니다.」

헌터들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하자.

잔뜩 지친 표정으로 의자에 반쯤 걸쳐진 태준과 냉혹한 표정으로 그를 내리깔아 보는 우윤혁이 거울 너머로 비쳤다.

* * *

‘왜 하필.’

나는 벌써 스무 번이나 지난 회차를 다시 겪고 있었다.

발칸에게 허무하게 죽어 버렸던 회차.

인류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취조실에서 짧은 여생을 보냈던 회차.

협회의 연구실에 갇혔던 회자.

악마에게 홀린 헌터가 먹인 극독에 당했던 회차.

그 외에도 십여 번.

세계 멸망을 막지 못하고 실패했던 회차의 최후를 반복하고 있었다.

순서는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지만, 계속 겪다 보니 느낀 것이 있었다.

‘우윤혁과 문규빈이 내 최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회차들만 뽑았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나는 모든 회차를 통틀어 가장 지독했고, 가장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었던 회차에 내몰려 있었다.

“하아….”

그걸 깨닫자마자 앞이 막막했다.

왜 하필 이 회차일까.

다른 회차는 비교적 덤덤한 마음으로 짧게 반복되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동료들에게 배신당한 뒤 깊고 어둡고 뜨거운 틈새 어딘가에 버려졌던 이번 회차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지독한 어둠.

기약 없는 고독과 적막함.

자신의 무능함을 향한 자책.

끝없는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정제되지 않은 배신감과 설움까지.

한 치 앞도 살필 수 없는 구덩이에 빠져 죽기 전까지 내가 모두 감내해야 했던 것들이었다.

그것을 다시 반복하라니.

이보다 더 지독한 고문이 있을까 싶었다.

이성이 무너져 최소한의 인간성과 자의식이 모두 부스러져 가는 기분을 느끼고.

가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어서 자기 자신을 무서워했던 나날이 반복되고.

그러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지 않은가.

‘나르카스.’

텅.

나르카스를 소환하자, 검이 맑은 금속음을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르카스.’

다시금 나르카스를 불렀지만, 야속한 검은 바닥 어딘가에 꽂혔는지 푹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아, 제발 나르카스….’

몇 번을 다시 불러도 허공에 소환된 나르카스가 내 급소를 향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내 목 아래로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헌터의 자가 치유로도 회복되지 않을 만큼의 큰 부상을 당했기에 내 손으로는 검을 쥘 수조차 없었다.

그 까닭에 지난 회차에서 수없이 시도했던 행위를 습관처럼 다시 반복하고 있지만 사실 의미 없는 짓이긴 했다.

귀속형 무기는 어떤 방법으로도 주인을 해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거지.’

하필 헌터라서 혀를 깨물어도 죽지 못하고, 몸속 에너지가 모두 동날 때까지 수십 일을 산 채로 말라 죽을 것이다.

‘차라리 힘이라도 돌아오지 않았으면, 더 빨리 죽었을 텐데….’

왜 필요할 땐 없다가 필요 없어지니 힘이 돌아온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잠깐만.’

나는 투덜대며 시스템의 무능함을 욕하다가 시스템이야말로 이전 회차와 달라진, 중요 포인트라는 걸 깨달았다.

‘시스템아?’

미심쩍음 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반으로 시스템을 불러 봤다.

그러자 평소보다 더 크고 우렁찬 알림음과 함께, 야광으로 빛나는 글씨가 떠올랐다.

나, 불렀어? ⸜(˶'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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