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따뜻하긴 하네
“쯧.”
허웅석은 이 상황이 썩 달갑지 않았다.
균열이 발견된 후 가장 먼저 진입한 것은 분명 자신들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우윤혁이 갑자기 전투 중 이탈하더니 던전을 홀로 돌아다니는 놈을 데리고 왔다.
하는 말들을 듣자 하니 원래부터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던 것 같고, 뭣보다 이곳 지리를 잘 아는 듯 보였다.
그 뜻은 우리가 들어온 곳 말고 또 다른 입구가 있거나, 저들이 숨겨 놓은 정보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
‘하. 귀환 놈들, 이빨 좀 까네?’
허웅석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그러고는 제 뒤를 느릿하게 따라오는 두 청년을 위아래로 훑었다.
저 한울이란 놈도 태준이란 놈과 아는 사이 같아 보이지만 친한 것 같진 않으니 보류.
그나마 지채정이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 같았다.
“어어, 춥다.”
허웅석은 팔뚝을 비비며 은근슬쩍 지채정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그러고는 인벤토리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담뱃갑에서 피우다 만 장초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 지채정을 향해서도 한 개비 내밀었다.
지채정이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젓자 허웅석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면서 담배를 꺼낼 때 함께 손에 쥔 소리 차단 장치를 눌렀다.
“어이, 형씨. 지금 우리 둘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된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네에. 아무 생각 안 해요.”
허웅석의 얼굴 위로 순간 짜증이 스쳤지만, 이내 다시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 마빡 좀 굴려 보라고. 만약 여기서 금싸라기라도 얻으면 우린 어떻게 되겠어. 바로 좆 되는 거야.”
“그런가요?”
“왜, 감이 안 와?”
“으음, 딱히요.”
영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허웅석은 지채정의 팔을 잡아챘다.
비물리계 특유의 낭창한 몸이라 휘청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휘청댄 건 허웅석이었다.
‘무슨 책벌레 놈들 몸이…!’
뭐 한 거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본 순간, 허웅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야. 너, 지금 내 말 허투루 듣냐? 여기서 편먹을 게 우리 둘뿐이라니까?”
“편이요?”
“무슨 일 생기면 저놈들 저거, 분명 뒤통수친다고.”
허웅석은 제 뒤통수를 턱턱 치며 장초 끄트머리를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우윤혁은 리더라는 놈이.
다른 헌터는 따라오거나 말거나 뒷전이고, 태준이라는 놈에게서 시선을 못 떼고 있었다.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문규빈 역시 걷는 내내 태준의 주위를 맴돌며 관심 좀 달라고 딸랑이를 쳐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눈꼴 시려서 다시금 카악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앞에, 보여?”
“그럼요. 제 눈도 앞에 달려 있는걸요.”
“…….”
허웅석은 지채정의 평온한 말을 듣는 순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까먹어 버렸다.
저 말투는 컨셉인 건지 아니면 어디서 몹쓸 개그를 배워 와서 써먹는 건가 가늠이 안 됐다.
이런 놈을 정말 구슬려 봐야 하나 고민됐지만 원래 여론전이란 건 머릿수 싸움이 아니던가.
허웅석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지채정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네. 눈 잘 달려 있으니까 좋네. 그러면 그 눈으로 좀 보다가, 여차하면 나한테 붙어. 그럼 너는 내가 책임지고 챙겨준다.”
“챙겨준다고요.”
“분명 말했다? 여차하면 딱 붙어. 수틀리면 우리 둘 다 끽이야, 끽.”
“무슨 말을 하는진 알겠는데, 바로 결정하기는 어렵네요.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
“하, 쓰발. 너 사람 간 보냐?”
허웅석은 제 머리를 거칠게 벅벅 긁더니 한껏 씹어 놓은 담뱃대를 투 뱉었다.
피우지도 못할 거, 물고 있어 봐야 짜증만 났다.
“…시간 얼마나 필요한데.”
“글쎄요. 확답할 수는 없지만.”
지채정은 물끄러미 허웅석이 뱉은 담배를 보더니 이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눈 위로 새겨진 발자국 틈에서 그림자가 꿈틀대더니 허웅석이 뱉어 낸 담배를 휘감고 지채정 발치 아래로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네요.”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해가 기울고 밤이 될 즈음.
눈발은 어느새 눈보라가 되어 휘몰아쳤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바람이 거세서 눈사람 여섯 개가 만들어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우리는 어찌어찌 동굴에 다다를 수 있었다.
“흐미, 추워 디지겠네.”
“오.”
“이런 곳이 있었군요.”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는 커다란 공동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얼핏 봐서는 들어왔던 곳 말고는 다른 입구는 보이지 않는, 그냥 크기만 큰 굴 같았다.
천장에는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구멍 사이로 눈발이 흩날려 들어왔다가 동굴의 열기에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듣던 대로네.’
타이밍이 꽤 좋았다.
눈발을 헤치고 오는 동안 살폈던 달은 이질적일 만큼 크고 붉었다.
지옥의 보름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보름이 지나고 새벽 동이 트는 순간에만 지하 입구가 반짝 생겼다 사라지기 때문에 불침번을 서며 시간을 계속 체크해 주어야 하지만.
‘왠지 미리 말해주면 안 될 것 같단 말이지.’
나는 곁눈으로 허웅석을 바라봤다.
놈은 원소술사와 시시덕대는 중에도 묘하게 나를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아마 내가 허웅석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눈도 제법 자주 마주쳤으리라.
본인 딴에는 숨긴다고 숨기는 것 같았지만, 그 누구보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많이 만나 봤던 내겐 저런 부정적인 기류는 특히 쉽게 읽혔다.
놈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만큼 내가 앞으로 가져가야 할 수밖에 없는 거슬림이었다.
“보호석 설치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때, 소리 없는 긴장감을 뚫고 우윤혁이 돌아왔다.
“리더. 마지막 불침번은 나 주쇼. 먼저 잡니다.”
허웅석은 돌아온 우윤혁을 보자마자 벌러덩 눕더니, 몇 초도 되지 않아 드르렁 코를 골며 자 버렸다.
뒤이어 정체를 알 수 없는 헌터 놈과 원소술사도 벽에 기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어디 캠핑 온 것도 아닌데 긴장감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쉴 수 있을 때 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직 뭘 모르는 어린애들 보는 심정으로 씁쓸하게 입매를 쓸었다.
그간 겪었던 지옥은 말 그대로의 ‘지옥’ 같아서, 늘 치열하고 비참하고 처절했는데.
그 끔찍했던 기억밖에 없는 지옥에서 한가롭게 불멍이나 때리다니 어쩐지 꿈을 꾸는 듯, 현실감이 없었다.
“…….”
숯 일부가 무너져 내리며 불티가 탁탁 튀어 올랐다.
노랗게 번지는 불티 사이로 그림자가 일렁이며 묘한 분위기를 그렸다.
이따금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가 내 기분도 노곤노곤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눈만 감으면 잠이 들 것 같았다.
“그간.”
그때.
고요한 정적을 가르고 문규빈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어떻게 지냈냐?”
짜기라도 했는지, 우윤혁과 똑같은 물음이었다.
우윤혁도 그걸 느꼈는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딱히 대답해줄 말이 없어서 불쏘시개로 공연히 모닥불이나 뒤적이자, 문규빈이 재차 말을 걸어왔다.
“상처는 어떻게 했냐고.”
“알아서 잘.”
“……그거 알아? 이제 아픈 거 숨기면 잡혀가.”
녀석의 말이 끝나자 내 손이 덜컥 멎었다.
뭐 하나 바꾸자고 할 때마다 돈을 들통으로 쏟아부어도 미적지근하던 협회 놈들이 그럴 리가 없는데 싶다가도, 저 친화력 없는 두 놈이 같은 말을 하는 거 보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가 보다 싶었다.
“내가 법 같은 걸 퍽이나 무서워하겠다. 아픈 데 없으니까 신경 꺼.”
“근데 왜 아까부터 아무것도 안 먹는데. 독 같은 거 안 탔다고.”
놈의 고개가 내 쪽을 향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언제 또 내가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체크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좆같은 슬라임이 배 속에 자리 잡고부터는 정말 신기하게도 식욕이 돌지 않았다.
오히려 음식 냄새가 조금 역하게 느껴져서 나는 모닥불에 불쏘시개를 툭 던져 넣으며 말했다.
“왜. 밥 안 먹는 것도 잡혀간대?”
“어.”
“…….”
“농담 같아?”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진담인지 알 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문규빈은 뜨끈뜨끈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내밀었다.
“…뭔데.”
“뭘 씹는 게 안 내키면 몸이라도 녹이라고.”
“…….”
그렇게 예민하던 녀석이 자신이 쓰던 식기를 나눠 준다는 게 어이없어 다시금 말을 잃었다.
그 호의가 낯설어 물끄러미 녀석의 손만 내려다보자, 여태 조용하던 우윤혁이 컵을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왜. 쟤 마시는 건 좀 해.”
“아아. 규빈 헌터가 어쩐 일로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랑 홍차를 그렇게 많이 챙기나 했습니다.”
“…남이야 커피를 챙기든 말든.”
“그래도 빈속에 커피는 안 좋아요.”
“뭐래.”
우윤혁이 손을 치워주지 않자, 문규빈은 처음부터 자기가 마시려고 했다는 듯 커피를 호로록 마셔 버렸다.
물론 한 모금 마시고 더는 입에 대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다시금 적막한 고요가 내려앉고.
깨어 있는 모두가 타오르는 모닥불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미칠 듯한 어색함이 견디기 어려워 자세를 고쳐 앉자 두 헌터 놈이 움찔 떨었다.
“어디 가게.”
“내가 이 날씨에 어딜 가. 왜, 지금이라도 사라져줘?”
반쯤 농담 삼아 바깥을 가리키며 말하자, 문규빈은 커피 잔을 탁 내려놓으며 시근덕거렸다.
“그딴 소리 하기만 해 봐! 묶어 놓고 감시할 거니까!”
예상보다 드센 반응에 놀라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문규빈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으리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진짜 죽은 줄 알았다고, 이 망나니 새끼야.”
“…….”
“그렇게 떨어져서 시체도 못 건지는 줄 알았어. 그게 끝인 줄 알았으면, 내가 그런 개소리는…. 하.”
뒷말을 잇기가 어려운지, 놈은 갑자기 양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 댔다.
그 심란해 보이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심란해졌다.
“그게 끝인 줄 알았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말지, 뭘 또 여기까지 찾으러 왔어. 우리가 사람 죽는 꼴을 한두 번 봐?”
“그럼 동료가 위험에 빠졌는데 그냥 손가락 빨고 있어?”
“나?”
“당연한 거 아니냐! 너 때문에 지금 길드가!”
다소 얼떨떨해서 나를 가리키며 “동료?” 하고 한 번 더 묻자 우윤혁이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규빈 헌터.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 알겠지만, 지금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돌아가면 그때, 시간을 갖고 천천히 대화하죠.”
말리는 척, 묘하게 불편한 플래그를 세우는 우윤혁을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이대로 머리통을 한 대만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두 번은 안 맞아주겠지.’
나는 애써 쥔 손을 풀어내고는 문규빈이 마시다 만 커피 잔을 끌어와 쥐었다.
‘따뜻하긴 하네.’
실체 없는 깃털의 온기보다 양손에 닿는 온기가 조금 더 기꺼웠다.
하지만 몸을 녹이는 온기와는 달리 마음속 한구석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저런 쉬운 말을 믿기엔 내가 당한 게 좀 많았다.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걸 보면, 무슨 꿍꿍이인지 좀 궁금해지는데.’
나는 행여 표정에서 들킬까 눈을 내리깐 채 문규빈이 마신 쪽을 피해 한 모금 들이켰다.
놈들이 내 경계를 늦출 생각이라면, 그것에 기꺼이 응해줘 볼 생각이었다.
‘응?’
향은 익숙했지만 기억보다 떫고 씁쓰레한 액체가 혀에 고여 들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즐겨 마시던 커피 맛이 아니었다.
‘이 새끼, 나한테 뭘 타 준 거야.’
그 경악할 맛에 뱉어 내려는 순간, 기대감 어린 “어때?”라는 질문을 듣고 무심코 삼키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경쾌한 알림이 울렸다.
※주의! 카페인에 노출되었습니다. 각성 효과로 일시적인 흥분 상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