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안녕, 태준아. 오래간만이야
사실 나는, 약속이란 것에 염증을 느꼈다.
약속이란 게 쌍방이 기억해야 효력이 있는 것일 텐데 정신 차려 보면 약속했던 사람이 사라져 있고,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다음 회차가 되어 그 사람 머릿속에 기억이 남아 있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 내가 약속을 다시 입에 담게 된 것은, 어이없게도 하스칼 덕분이었다.
영원에 가깝게 사는 존재와 약속을 나누게 되니 심리적인 허들이 낮아졌다.
내가 지킬 마음이 없어도 마왕이라면 알아서 강탈해 갈 테니 부채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더구나 하스칼은, 약속 이후에도 선택지가 주어진다는 걸 알려줬다.
물론 결과를 감내해야 하는 건 내 몫이지만, 더는 지켜지지 못할 미래를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약속을 나누는 순간.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는 그 감정과 분위기만으로도 무언가가 달라졌다.
우윤혁이 속내를 숨기고 목적을 위해 나를 떠보고 있다면, 나 역시 빈말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었다.
아마 하스칼이 알았다면 뒷목을 잡을 거다.
하지만 그놈은 지금 내 눈앞에 없고.
‘내가 이런 건 잘 배우거든.’
나는 슬쩍 입매를 가리며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컨셉을 유지하며,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우리의 거리는 이 정도로 지켜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우윤혁은 조금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이름 얘기라면… 제가 좀 더 주의하겠습니다.”
거만한 놈이 저런 목소리를 내는 게 어이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구에 대체 무슨 일이 생겼나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달라진다던데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거 아냐?’
괜히 이상한 생각이 끼어들자 뾰족하게 날이 섰던 목소리가 절로 한풀 꺾여 버렸다.
만약 내 걱정이 사실이라면 상황이 조금 곤란해졌다.
라엘과 했던 거래 때문에 우윤혁은 유병장수를 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좀 미안한데.’
나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계획했던 뒷말을 마저 꺼냈다.
“그건 당연히 지켜야지. 내가 그런 뻔한 걸 약속하자고 했겠어?”
“그러면, 어떤 약속을…?”
“무슨 일이 있어도 동료는 다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그거 약속해.”
“…….”
거짓으로라도 그러겠다 할 줄 알았는데 우윤혁은 입을 다문 채 침묵했다.
너무 쉽게 대답하면 내가 의심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의심, 처음부터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싫어?”
“싫은 게 아닙니다. 그저 지키지 못하게 될 상황을 계산해 보고 있었습니다.”
“왜 그걸 먼저 계산하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서, 다른 헌터를 두고 가게 되면 당신과의 약속을 어기게 되잖습니까.”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우윤혁만큼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해주고 싶지 않았다.
약간의 구멍을 터주는 순간 녀석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서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고, 끝내 자기 세뇌를 마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뭐, 저놈 성격상 우리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약속 한두 개로 사람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니까.’
나는 악마들처럼 약속을 어길 수 없게 할 능력은 없었다.
더욱이, 우윤혁이 나와 이런 약속을 할 이유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저 천하의 우윤혁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지금이 아니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억지임을 알기에 일부러 더 단단하게 못을 박았다.
“아니. 무조건 다 데려가겠다고 말해. 만에 하나같은 거 없이, 무조건.”
“동료는 무조건 다…, 입니까?”
강하게 못 박자 우윤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동료는 한 사람도 열외 없이. 반드시 모두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특유의 믿음직스러운 어투였다.
물론 여전히 무슨 표정인지는 읽을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 * *
“야, 이 미친놈아! 살아 있었으면 살아 있다고 티를 내야 할 거 아니야!”
얼굴을 후려치는 눈발을 어렵사리 헤치고, 꾸역꾸역 헌터들이 있는 곳에 도달하자 갑자기 웬 희끄무레한 놈 하나가 달려들었다.
움직임이 무슨 땅콩을 발견한 다람쥐만큼 잽쌌다.
하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나는 그 돌발 행동을 여유롭게 피했다.
“윽!”
‘이게 안 피해지네….’
짤막한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분명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의 몸통 박치기에 당한 나는 뒤로 벌러덩 넘어가 버렸다.
비각성자보다 못한 스탯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나 보다.
“어디 좀 봐! 얼굴 내놔 봐!”
내 착잡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몸 위로 올라탄 놈은, 돌연 양 뺨을 잡고 얼굴을 마구 문질러 대기 시작했다.
목소리와 말투로 미뤄 짐작해 보면 녀석은 문규빈인 듯했다.
다만, 우윤혁처럼 금방 확신하기가 어려웠던 건 녀석은 원래 사람과 닿는 것에 질색했기 때문이다.
문규빈은 어쩌다 내가 닿기라도 하면 치를 떨며 욕을 퍼붓고 종종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복수하곤 했기에, 나는 녀석이 보이면 일부러 빙 돌아가기도 했다.
그래서 그 갭에 문규빈이 맞나 긴가민가하는 사이.
“뭔데! 눈깔은 또 왜 이 모양인데!”
녀석은 흡사 절규하듯 내 몸에 올라타서 들썩댔다.
“이 망나니 새끼! 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뭐야. 문규빈이네.’
저 익숙한 호칭에 놈의 정체를 확신하기는 했지만 그와 동시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밤새 하스칼에게 시달린 탓에 아직도 내장이 얼얼한 데다, 문규빈의 체중에 눌린 슬라임이 부르르 떠는 게 영 불길했다.
“아, 꺼져!”
나는 오만상을 쓰며 녀석을 밀어 내려 했다.
하지만 놈은 고집스레 버티며 내 얼굴을 흡사 뭉갤 기세로 주물럭대고 있었다.
특히 살갗을 훑는 놈의 손엔 못 보던 굳은살이 박여 있어 따끔할 지경이었다.
“이거 렌즈야? 아니면 아이템? 이상한 거 아니지? 보이긴 해?”
“좀 나와 보라고!”
“너야말로 좀 가만히 있어 보라니까!”
“야! 이 찰거머리 좀 어떻게 해 봐!”
나는 문규빈 좀 어떻게 해 보라며 우윤혁을 바라봤다.
그제야 우윤혁은 반항하는 다람쥐를 덜렁 들어내고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태준 헌터.”
나는 낯선 호의를 무시한 채 혼자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어 냈다.
그러자 우윤혁은 다시금 제 손을 가만히 쥐었다.
분하면 나오는 습관인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윤혁의 어깨 너머를 살피자, 이 소란스러운 재회가 어색한지 어물쩍대며 다가오지 못하는 남자 셋이 보였다.
얼굴은 안면인식 저항 디버프 때문에 암만 봐도 모르겠어서 지난 회차의 기억을 더듬으며 정보를 끄집어냈다.
‘한 놈은 트레저 헌터고. 한 놈은 원소술산가?’
일단 두 놈의 차림새가 익숙한 걸로 보아, 기억 속에 있는 헌터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쟤는 또 누구야.’
내 시선은, 그들 옆에 서 있는 호리호리한 청년에게 멈췄다.
아무리 살펴봐도 내 데이터에 검색되지 않은 낯선 차림새였다.
헌터는 아이템이 귀한 탓에, 대체로 차림새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더 좋은 아이템을 얻어서 갈아 끼우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 봐야 한두 부위에 불과해, 눈에 익은 특징이 하나쯤은 있었다.
그런데 저 청년은 놀랍게도 눈에 걸리는 힌트가 하나도 없었다.
회귀를 반복하며 오만 데를 다 싸돌아다녀서, 활동하는 대한민국 헌터는 모두 만나 봤다고 자신할 정도였건만.
내 미심쩍은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자, 정체불명의 남자가 수줍은 어투로 말했다.
“안녕, 태준아. 오래간만이야.”
‘오래간만이라고?’
나를 알고 있는 듯한 말투에 놀라 무심코 우윤혁과 문규빈을 보았다.
“저기….”
“왜, 그….”
내 시선에 둘의 입이 동시에 열렸지만, 정작 말을 가로챈 건 다른 사람이었다.
“어이, 그짝 거시기는 누구?”
‘아아, 거시기.’
껄렁한 말투를 듣자마자 알았다.
허웅석이다.
많이 어울려 본 건 아니지만, 여러 지방 사투리가 섞인 말투를 쓰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허웅석은 두 번째로 출발하는 멤버 아니었나?’
어쩌다 첫 정찰 임무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또 골치 아픈 변수가 생겼다.
“이야~ 나는 리더가 어디서 좋은 거 주워 오나 했는데, 사내놈이네?”
“웅석 헌터.”
“아니, 내가 뭐 별말 하려는 건 아니고. 그래도 시체는 아니라 주워 가긴 편하겠다, 이 말이지.”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분위기가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웅석 헌터. 말 가려 가면서 하세요.”
“허미, 시벌. 여기서 지금 말 못 가리는 새끼들이 한 트럭인데, 또 나만 욕먹나?”
“말 가려서 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예. 저 같은 비천한 B급 헌터가 조동이를 잘도 나불댔지요?”
허웅석이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인벤토리에서 급하게 꺼내 입은 내 장비가 초라해 보였나 보다.
무엇보다 비물리계 마법사에게 덮쳐져도 반항조차 못 했으니, 허접한 등급이라 짐작한 것이겠지.
‘눈썰미가 제법 예리한가 본데.’
허웅석이 나를 살피는 만큼, 나 역시 놈의 차림새를 면밀하게 살폈다.
헌터로 지낸 짬밥이 오래된 건지, 녀석의 복장은 활용적이면서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어차피 인벤토리에 담으면 되니 뭐를 바리바리 챙길 필욘 없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부분에는 여차하면 사용할 장비가 알차게 챙겨져 있었다.
무엇보다 내 눈에 걸린 아이템은 한때 애용했다가 다른 헌터가 가져가길 바라며 숨겨 놨었던 ‘여우 꼬리 반지’였다.
‘저걸 찾았네.’
여우 꼬리 반지는 짧은 시간 동안 분신을 만들어 조종할 수 있는데,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고 제법 머리 굴려 사용하지 않으면 하등 쓸모없는 템이었다.
하지만 나는 종종 위급할 때 저 아이템 덕을 봤었다.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면 등급과는 상관없이 좋은 아이템이라는 게 내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와 비슷한 생각이라는 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반대로 비협조적인 태도가 거슬렸다.
머리가 좋은 만큼 의심도 많고, 자신의 실력에 반해 등급이 낮게 책정됐다는 생각에 불만이 있을 거다.
그래서 더 아득바득 능력을 끌어올리고, 회차마다 정찰대로 참여했던 것이겠지.
개인적으로 저런 악바리는 싫지 않지만.
‘시간이 너무 없지.’
나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입매를 감췄다.
사람을 파악하는 데는 제법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놈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고, 놈이 엇나갈 때마다 억눌러줄 힘도 없었다.
결국 모두가 무사히 살아 나가려면 이 이상의 변수는 곤란했기 때문에, 굳이 허웅석이 걸어오는 시비에 장단 맞춰줄 것 없이 슬쩍 무시하기로 했다.
“후우.”
나는 우윤혁이 부르던 이름을 떠올렸다.
원소술사가 지채정이면, 남은 한쪽이 한울일 터.
대강 누가 누군지 파악한 나는 본래부터 주변을 둘러보려 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전투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마물의 시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순록들은 나와 우윤혁이 다가가자 갑자기 뭔가에 놀란 것처럼 우르르 사라져 버렸고.
눈발이 점점 거세지며 오갔던 발자국이 점점 덮이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지체하면 이동조차 쉽지 않으리라.
“갑자기 나타나서 놀란 건 알겠는데, 여기서 야영할 생각 아니면 따라오고.”
“잠시만요, 그 방향이 아닙니다. 입구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우윤혁은 황급히 나를 잡았지만, 나는 놈의 팔을 밀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지옥을 빠져나가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거긴 외부에서 들어오면 닫혀. 출구는 다른 쪽.”
내가 가리킨 곳은 지난 회차의 우리가 길을 잃었다가 슐츠만을 만났던 곳.
얼음 요새, 영원의 감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