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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28)화 (28/80)

28. 여의도 하수구 입구

여의도 하수구 입구.

비밀리에 자원한 수백의 지원자를 뚫고 정찰대 임무를 맡게 된 고위 랭크 헌터가 다섯.

그중 팀을 이끌게 된 S급 헌터 우윤혁이 던전 오염 측정기 버튼을 눌렀다.

삐빅- 삑-!

응집된 마기의 수치가 일정 범위를 넘어서자 측정기에서 시끄러운 알림음이 울렸다.

그 요란한 소리에 정찰 임무를 맡은 헌터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와 씨,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오염도가 천이백 퍼센트? 아주 그냥 바지에 지리겄어.”

신경질적인 인상의 중년 남자가 투덜대며 말하자, 헌터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남자는 그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 혹은 제 말에 호응해 달라는 듯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입구 때깔이 불그죽죽한 게 딱 봐도 수상하잖아. 누구, 던전에서 이런 때깔 본 적 있어?”

“…….”

극도로 긴장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말이 불평이라 분위기가 한껏 더 가라앉았다.

“밖에서 저 수상한 입구만 닫으면 될 걸, 뭣 하러 인력 낭비를 하나 몰라. 그냥 전술핵 한 방 갈겨 버리지.”

“그래서요. 아저씨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남자의 불평이 계속 이어지자, 오트밀 색 후드티를 입은 20대 초반의 청년이 삐딱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 말에 혼자 투덜대던 남자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씁.”

남자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청년을 위아래로 훑었다.

분위기나 풀어 보자고 몇 마디 했더니, 돌아오는 말투가 영 거슬렸다.

저놈이 마탑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는 A급 마법사 문규빈만 아니면 들이받았을 텐데.

남자는 상대를 씹어 대듯 담배 필터를 씹으며 주변을 휘 돌아봤다.

“아니, 내 말으은-. 어차피 지원금 나오잖아. 그냥 여기서 좀 죽치고 있다가, 대강 보고하고 지원금이나 챙기면 안 되겠냐고.”

정말 몰라서 물은 게 아님에도 남자가 눈치 없이 한마디를 더 보태자, 문규빈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나 참. 개나 소나 다 헌터라고, 어디서 쫄보 새끼가 끼어들어선 물 흐리고 앉아 있네.”

말투만 들으면 혼잣말인데, 문규빈의 목소리는 귀 밝은 헌터가 못 들을 리 없을 만큼 컸다.

“뭐라고?”

“딱 보니 능력은 쥐뿔도 없어 보이고. 임무 이해도는 바닥이고. 뼈 삭은 아재가 돈 몇 푼이 탐나서 자원하셨어요?”

저보다 나이도 어린놈 말본새가 막장을 달리자, 남자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아까부터 보자 보자 했더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시끼가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씨불이네? 등급만 높으면 다야?”

“그걸 아직도 몰랐어요? 요즘 세상에 당연히 등급이 다죠. 그런 기본도 모르니까 아저씨가 B급밖에 안 되는 거 아녜요.”

“와 이거 완전 사람 대구빡 돌게 하네?”

문규빈이 지지 않고 받아치자, 남자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탑에서 책이나 보는 약골 새끼가 입 함부로 놀리다가 처맞았다는 얘긴 못 들어 봤는가?”

하지만 문규빈은 그의 손을 더럽다는 듯 쳐 내고는 훌쩍 멀어지며 코웃음을 쳤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마법사가 책만 본다는 사람이 있네? 그 정도로 모자라야 B급 주제에 A급한테 대드나?”

“좁쌀만 한 새끼가 눈깔에 힘 안 빼냐!”

“와! 갈매기 길드 모체가 조폭이라더니, 말투 한번 고급지네. 아재요, 쪽팔리니까 어디 가서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요.”

“이걸 확 그냥!”

갑자기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우윤혁이 측정기 알람을 껐다.

“허웅석 헌터, 문규빈 헌터.”

“…….”

“…….”

우윤혁이 엄격한 목소리로 둘의 이름을 부르자, 방금까지 소란스럽던 장내에 불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우린 지금부터 위험한 곳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모두가 한마음이어도 임무 수행이 어려울 수 있는데, 고작 팀원 갈등으로 임무를 망쳐서야 되겠습니까?”

“아니, 근데 리더. 저 어린노무 시키가 먼저 시빌 거는데 어떻게 참습니까.”

“허웅석 헌터. 제가 지금 농담 따먹기나 하자는 것 같습니까.”

“…….”

“나는 시간에 예민한 사람이라, 계속 이렇게 말이 길어지면 두 사람 다 임무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 정의롭다고 소문난 남자가 표정 하나 없이 살벌하게 말하자 허웅석은 찔끔한 표정으로 문규빈을 흘겼다.

그에 반해, 몇 마디 더 할 것 같았던 문규빈은 사고 치다 걸린 고양이처럼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우윤혁은 그런 문규빈을 힐긋 보고는 몸을 돌렸다.

“지금 우리가 바깥에서 소모하는 1초가, 나중에 죽도록 후회스러울 수 있음을 명심하세요.”

“…미안.”

“예예, 알겠슴다.”

어느 정도 둘의 갈등이 잠잠해지자, 우윤혁은 조용히 눈치를 보던 B급 원소술사에게 손짓했다.

“바깥으로 새 나오는 수치만으로도 내부 오염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겁니다. 지채정 헌터는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공기부터 순환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울 헌터는 혹시 모를 일을 방비해서 팀에게 쉴드를 걸어주세요. 지속 시간은 얼마 정도 나오죠?”

“사람에게 걸 때는 2시간 정도이고요. 사물에 인챈트 할 때는 대상이 파괴되지 않는 한, 일주일 정도요.”

“좋네요.”

우윤혁이 좌표 팔찌 다섯 개를 꺼내 한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B급 버퍼 한울은 팔찌에 주문을 외워 쉴드 스킬을 부여했다.

팀 모두에게 팔찌가 주어지고, 사용자 정보를 인식한 팔찌가 주인의 손목 둘레만큼 알맞게 변했다.

“지속 시간은 늘어났지만, 최대량은 정말 한 줌이에요. 강한 공격에 벗겨질 수 있는데, 괜찮을까요?”

“상관없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오염 물질만 막을 수 있으면 됩니다.”

우윤혁의 말에 한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은 팔찌를 제 왼팔에 끼웠다.

모두의 몸 주변으로 옅은 금빛 쉴드가 생기자 우윤혁은 하수구 입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던전이 미스테리 등급이기 때문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뿔뿔이 흩어지거나, 낙오자가 생기면 팔찌 좌표 500, 500에서 보는 걸로 하죠.”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확인한 순간.

우윤혁이 균열을 밀어 내자 검붉은 기운이 한껏 쏟아져 나오며 다섯 헌터들의 몸을 날름 집어삼켰다.

* * *

“흐흥….”

오닉스는 만면에 즐거운 미소를 띤 채, 균열로 들어가는 인간들의 뒤를 밟았다.

균열에 설치해 둔 결계가 이상해서 와 봤더니 몹시 흥미로운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인간 따위가 균열을 잡아 벌리는 게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제법인걸?”

오닉스는 인간들의 신형을 날름 삼킨 균열을 더듬었다.

그러자 강한 에너지가 파지직 튀어 오르고,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겁도 없지.”

균열은, 시공간이 뒤엉킨 초차원에 구멍이 생기는 현상이었다.

그 안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고위급 악마가 꽤 무리해야만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등한 종족이 균열에 감히 흠집이라도 낼 수 있다면 손뼉을 쳐줄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해냈다.

덜 여문 균열에 강한 에너지를 퍼붓고 억지로 열어 낸 것이다.

“우리 용사님 세대가 뭔가 다르긴 다른 모양인데.”

오닉스는 턱을 쓸어내리며 눈빛을 빛냈다.

그간 마왕을 물리쳐 보겠다며 맞서던 종족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세대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

마치 악마들이 세운 계획을 읽고 있다는 듯 앞서서 망쳐 놓거나, 막을 수 없는 재난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결과를 비틀어 피해 규모를 줄였다.

거대한 힘에 침략당해 본 적 없는 종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른 방비였다.

물론 그 바람에 마왕이 직접 지구로 현신하게 되었지만.

인류가 그대로 멸망하더라도 악마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회자될 만한 업적이었다.

하지만, 변수가 또다시 생겨났다.

인간 하나가 마왕을 저지하고 지옥으로 뛰어들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고위급 악마가 지구에 현신하는 건 상당한 리스크를 짊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근시일 내로 다시 시도하는 건 불가능했다.

미개한 인간 하나가 마왕에게 큰 엿을 날린 셈이었다.

그 까닭에 하스칼이 자신의 계획을 어그러뜨린 인간을 곱게 죽이지 않으리라고 오닉스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모든 것에 무심하던 마왕이.

“그 인간에게 홀려서 물고 빨게 될 줄 그 어떤 악마가 짐작이나 했을까.”

오닉스는 당장에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곤란한 기색을 띠며 입매를 가려 봤지만, 어깨가 자꾸만 들썩들썩 춤을 추고 있었다.

정말이지, 용사님 덕에 오닉스는 하루하루가 즐거워서 가슴이 뻐근해질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태준을 곁에 두고 세포 하나까지 뜯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하지만 하스칼이 태준을 잡고 놔주질 않으니, 도통 기회가 생기질 않았다.

본래도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라던데.

먹고 맛봐도 질리지 않는 화수분 같은 용사님을 찍어 먹어 본 게 다였으니 얼마나 애가 닳겠는가.

그래서 그를 대체할 만한 물건이 있나 다른 인간들을 유심히 살폈다.

정기도 충만하고, 튼튼한 게 제법 싱싱해 보였다.

나이대도 여럿이고 외모나 특성도 모두 제각각이라 골라 먹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어쩐지 성에 차질 않았다.

“아아, 정말이지. 편식이라곤 모르던 악마였는데. 우리 귀여운 용사님이 내 입맛을 고급으로 만들어 놨네.”

점찍어 두고 군침 흘리던 디저트를 두고 다른 걸 아무리 맛본들 그 허기가 충족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지금 보니 까망이가 마왕님뿐 아니라 나까지 홀려 놨잖아?”

방금까지 축 처졌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우리의 용사님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애꿎은 악마를 흥분시켰다.

“요망하기도 하지.”

오닉스는 후후 웃으며 무언가의 형상을 덧그리듯 균열 입구를 연거푸 더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눈을 반짝이며 입술을 핥았다.

재미난 생각이 떠오른 까닭이다.

잡기 쉬운 사냥감은 구미가 당기지 않는 법이니, 더 큰 물고기를 낚기 위해 작은 물고기 여럿을 미끼로 준비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오닉스는 영업을 마친 가게의 셔터를 내리듯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러자 균열이 츠츠츠 소리를 내더니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어디 그럼 월척 낚을 준비를 해 볼까나.”

악마는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인간들의 뒤를 쫓았다.

시커먼 그림자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더니 이내 자그마한 점 너머로 빨려 가듯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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