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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146화 (146/154)
  • #146

    “난 상대가 나 자신일지라도 재진 씨 마음 나눠 가질 생각 없어요.”

    “…….”

    “4년 후의 나는…… 그놈은 그냥, 앞으로도 계속 가엽고 불쌍해야 해요. 재진 씨랑 제대로 된 연애는커녕, 사랑도 모르고 끝나야 해요. 알겠어요?”

    “…….”

    “그쪽은 첫 만남을, 첫 시작을 가졌잖아요……. 그러니 마지막은 내게 주어져야 맞잖아.”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뚫고 생존한 마물들이 뛰어 달려왔다. 머릿수가 줄기는커녕 그 뒤로 아직 까마득하게 남아 있었다. 시커멓게 떼 지어 움직이는 크리처의 파도가 개척지구 앞까지 성큼 당도했다.

    “전방 3km 앞!”

    “2km!”

    “소총 유효사거리에 들어오면 1열부터 발포한다!”

    “1km!”

    아우성 같은 총포음이 쏟아졌다.

    번쩍거리는 이능이 크리처를 압도하여 짓뭉개고 핵을 으스러뜨렸다.

    권재진은 서의우에게 아무 답변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장전한 소총을 견착하고 보이는 크리처마다 족족 쏴 죽였다.

    숨이 끊어지는 마물의 단말마와 검게 흐르는 피가 인간의 정신을 난잡하게 파헤쳤다.

    연이어 터지는 총성에 귀청이 따가웠다. 고통스러운 소음과 비릿한 냄새, 거칠어진 숨 때문에 머리통이 어질어질했다. 권재진은 괜스레 심란하고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윽…….’

    튀어 오르고 굴러 나자빠지는 마물들을 실수 하나 없이 해치우면서도 목이 멨다. 가슴 아래 돌이 걸린 듯하고 정신 하나 없이 몽롱했다.

    다름 아닌 크리처 웨이브다.

    그토록 권재진의 속을 태우던 크리처 웨이브.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온갖 사투를 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중대한 시점에 이르러 왜 이렇게 머릿속이 어지러운지 모를 노릇이었다.

    ‘크리처 웨이브가 지나면, 그러면…….’

    <임시 휴전일 뿐입니다. 오래 가지 않을 겁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크리처 웨이브를 넘길 때까지만. 그때까지만이라면…….>

    <끝나기는커녕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잠자코 기다려요. 내가 나중이라고 말했잖아요.>

    ‘무엇이 끝나고, 무엇이 시작되는 거지……?’

    <아직 날 원망할 때가 아니에요. 그건 멀었어요.>

    <재진 씨는 이제 나만, 나만 사랑하는 거예요. 이것만은 양보 못 해.>

    ‘대체 언제까지…….’

    뱃속이 끓고 애가 탔다. 권재진은 다만 서의우와 마음 편히 지내고 싶을 따름이었다.

    자유롭고, 행복하고, 인간답게.

    제대로.

    그렇게 살고 싶을 뿐이다. 그 일념을 이루기 위해 이제껏 달려왔다. 도망치지 않고 올바른 길을 택했다고 자부했고, 도처에 널린 장애물도 외면하지 않고 하나씩 치워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겨우 다다른 지금이다.

    이제야 권재진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 떳떳해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다만 1회차 서의우 하나만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그를 떠올리면 가슴 깊은 곳, 겹겹이 덮어 감춰 둔 안쪽이 괴롭도록 울렁거렸다. 원망스럽고. 애틋하고. 두렵고. 안타깝고. 성가시고. 미안하고. 짜증 나고. 신경 쓰이고. 애증…… 그래, 애증이다. 그렇지만 권재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른 척 피하고 싶을 정도다.

    ‘나더러 뭘 더 어떡하라고…….’

    <난 상대가 나 자신일지라도 재진 씨 마음 나눠 가질 생각 없어요.>

    서의우가 말한 대로 해야 하는 걸까.

    <4년 후의 나는…… 그놈은 그냥, 앞으로도 계속 가엽고 불쌍해야 해요.>

    1회차는 가엽고 불쌍하다, 죽었으니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잊어버리면 그만인가.

    <재진 씨랑 제대로 된 연애는커녕, 사랑도 모르고 끝나야 해요. 알겠어요?>

    기억 지운 나쁜 놈, 가족과 유년기의 추억을 앗아 간 개새끼…… 1회차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채 작별을 고하고, 무결한 2회차와 새 인생 살아가면 정리되는 것인가.

    인생 2막, 기적 같은 기회, 다시 없을 2회차를, 정말 이렇게……?

    칼로 자르듯이, 1회차 서의우만 딱 도려내서 매듭짓는다고?

    1회차는 배드 엔딩이었고, 2회차는 해피 엔딩으로.

    근본적으로 똑같은 사람을 두고,

    그렇게 끝……?

    ‘왜, 뭘 새삼 고민하는 거지? 나조차도 1회차 서의우는 과거일 뿐이고, 이젠 그를 망각에 묻어 둘 날만 남았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뒤늦게 연민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양쪽 다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인가? 당장 권재진이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1회차 서의우가 뭘 꾸미는지도 모르는데.

    그가 권재진의 죽음을 맞이하고서 어떻게 되었는지, 어떤 방법으로 꿈에 나타나는지, 무엇을 기다리라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대책도 없이.’

    참 등신 같다, 권재진…….

    재진이 이를 악물고 총을 연사했다. 탄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쉼 없이 쏴 갈기고 하네스에 매 둔 탄창을 뽑아 거친 동작으로 재장전했다.

    그 순간, 뭉개지는 크리처 군단의 뒤로 이질적인 몸체의 마물이 위용을 드러냈다.

    일반적인 β크리처 수십 마리를 합친 것처럼 거대한 괴체가 전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크워어어어어-!

    그것의 표효가 창공을 찢고 하늘까지 닿았다.

    한눈에 보아도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짐승의 형태를 모방한 β크리처와 달리, α크리처는 닮은 무언가를 떠올릴 수조차 없는 오리지널 종이었다. 몸길이는 범선만 했고 형상은 신화나 전설 속에 묘사되는 괴물 같았다.

    땅을 기고 있는 시커먼 배는 절지 관절과 겹비늘로 빼곡히 덮여 있으며, 꼬리는 세 갈래로 갈라져 홰를 쳤다. 촉수 같은 다리는 여덟 개, 발굽이 달린 팔은 네 개. 우뚝 솟은 머리통은 다섯 개가 꽃잎처럼 붙어 있으며 중앙에 둥글고 커다란 눈알이 하나 꿈뻑이고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정수리, 그리고 등까지 뾰족한 뿔이 잘게 돋아 있고, 등판에 구멍이 숭숭 둘려 있었다. 뚫린 구멍이 입처럼 아가리를 쩍 벌리면 사이로 뭉툭한 하마 같은 이빨, 혹은 돋아난 뼈가 보였다.

    부정한 생물이다.

    아니,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마물이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α크리처의 출현에 멍하니 사고가 멈추었다.

    저런 것과 싸워야 하고, 하물며 숨을 끊어 멸절해야 한다니…….

    사방에 날아든 총알이 등짝과 배판에 수십 발 쏘아 박혔지만, α크리처는 끄떡 않고 전진하고 있었다. 두꺼운 피부를 뚫지 못한 총알이 크리처의 핵까지 들이박히지 않아서였다.

    “물러서라! 교대!”

    “α크리처를 우선해서 처치한다!”

    이제 주 임무로 게이트를 파훼하는 최정예 특임부대가 나설 차례였다.

    제1특임부대원들을 필두로 제2, 제3 부대가 뒤따랐다. α크리처의 핵을 부수기 위해서는 총격이 아닌 이능을 사용해야 했다.

    특임부대원들이 제각각 이능력을 끌어올렸다. 정교하게 합을 맞춰 훈련해 둔 전술에 따라 방어계 에스퍼가 전열에서 크리처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살상력과 파괴력이 뛰어난 계통의 에스퍼가 빈틈을 노려 핵을 공격하는 식이었다.

    보통은 장기전으로 이어지는 게 당연하지만, 이 전투엔 상식을 뛰어넘는 누군가가 있었다.

    서의우가 성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염동력을 일으켜 α크리처를 머리부터 짜부라트렸다.

    음료수 캔이 우그러지듯, 거대한 α크리처의 뼈와 관절이 뒤틀리며 빠드득빠드득 껍질이 터져 나갔다.

    놈이 거세게 꿈틀대고 저항하며 갈라진 꼬리로 땅을 휩쓸었다. 홰를 치는 꼬리 짓에 뒤따르던 β크리처들이 얻어맞고 나동그라졌다. 험악하게 바르작대는 발길질에 채인 β크리처도 몇이나 되었다.

    히끼이이이이익!

    기괴한 괴성을 내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α크리처 때문에 지진 난 것처럼 지표가 갈라지고 커다란 구덩이가 패었다.

    뒤틀린 껍질 사이로 검은 핏물이 핏핏 쏘아지더니, 다섯 개의 머리통 사이에 달덩이처럼 커다란 외알 눈알이 팡! 터져 버리고 속에 깊숙이 감춰졌던 핵이 드러났다.

    핵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자 이능을 창처럼 날카롭게 세워 콱 찍어 누르는 것만으로도 부숴 버릴 수 있었다. 피에 물들어 시커먼 코어가 산산이 부서졌고, 그 순간 크리처가 움직임을 멈추고 축 늘어졌다.

    단신으로 α크리처를 처치하다니.

    할 말을 잃어버린 특임부대원들이 얼이 빠져 턱을 벌렸다. 최정예 부대가 최소 2시간에서 최대 48시간가량 사투를 벌여야 처리할 수 있는 α크리처를 서의우 혼자 죽여 버린 것이다.

    “집중한다!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경계벽을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수비해라!”

    권재진이 흠칫 정신을 차리고 소총을 견착했다.

    넋을 놓을 틈이 없었다.

    그 뒤로 게이트 심부에서 기어 나온 오리지널 α크리처가 네댓 마리나 줄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오리지널이기에 같은 α크리처라 해도 각각 다른 기괴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어떤 괴체는 팔다리가 달린 수레바퀴 같은 모양새였고 어떤 괴체는 이끼 낀 암석을 등에 짊어진 거인 같은 모양새였다. 놋쇠 같은 피부 속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보이기도 하고, 번쩍이는 무수한 눈알이 덮개 속에서 청옥처럼 빛나기도 했다.

    다만 어떤 크리처든 전신이 새카만 것만은 공통된 사항이었다. 놈들은 삿된 기운을 품은 검은 괴수들이었다.

    서의우를 비롯한 제1, 2, 3 정예 특임부대원들이 α크리처를 상대했고, 끝없이 몰려오는 β크리처는 권재진과 남은 특임부대원들의 몫이었다.

    권재진은 고글에 잡히는 적군 표식을 향해 쉴 새 없이 총을 쏘고 또 쏘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각성자들 모두 혼신의 힘을 짜내 전투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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