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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147화 (147/154)
  • #147

    시간이 흐르고, 피비린내가 짙어졌다. 산을 이룬 시체 더미를 밟고 외경계벽까지 넘어서는 크리처를 힘겹게 잡았다.

    인간은 체력에 한계가 있지만 마물은 그렇지 않았고, 아무리 서두른다 해도 몰려오는 크리처를 모조리 처치하기 전에는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헉…….”

    “큭, 허억…….”

    하늘에 뜬 해가 기울고 땅에 선 자들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권재진이 쏜 탄피가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모래알처럼 발치에 흩뿌려져 있었다.

    이제는 손끝으로 방아쇠를 걸어 당기는 것조차 지친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팔꿈치가 흔들려 조준이 엇나갔다. 피로한 눈은 뻑뻑함을 호소했고, 전투복 안쪽은 땀으로 흠뻑 젖어 찜통이었다.

    주변을 보니 다른 각성자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총구가 땅으로 처지고, 총알은 빗나가고, 에스퍼들은 이능을 한계까지 짜낸 상황이었다. 전투 막바지에 이르자 서의우의 막대한 이능까지도 고갈되기 직전이었다.

    그렇지만, 끝이 보였다.

    α크리처는 모두 처리했고, 검은 파도처럼 끝없이 몰려오던 β크리처도 어느 하나 외경계벽을 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전방에 듬성듬성 보이는 마지막 남은 무리. 저것들의 숨통만 끊으면 해내는 것이다.

    크리처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막아 낸 것이라고.

    각성자들이 너덜너덜해진 육신으로 힘겹게 적을 마주했다.

    권재진도 필사의 인내와 결의로 마지막 힘을 짜내 소총을 들었다. 서의우는 바닥을 드러내는 이능력을 한꺼번에 갈퀴처럼 끌어모아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재진 씨, 뒤로 물러나요.”

    장엄하고 사특한 경외스러운 힘이 그의 손바닥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높은 이명이 불협화음으로 귓전을 때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서의우의 손아귀를 떠나 아직도 생존해 있는 크리처들을 짓뭉개 처단했다.

    눈앞이 번뜩이며 이능을 휘감은 밝은 빛이 퍼졌고, 검은 핏물이 흐르던 땅이 하얗게 물들었다. 세상이 희게 감싸였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무언가가 서의우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피슛!

    도탄으로 위장한 이능이 살의를 담고 강력하게 쏘아졌다.

    ***

    크리처 웨이브로 전투원들이 출격하고 센터를 비운 시점. 군사전략총책임본부에서는 은밀한 지령이 내려지고 있었다.

    장성급 장교들의 경호원들이 여섯 명가량 뒷짐을 지고 일렬로 서 있었고, 그 앞에 장교 제복을 갖춘 오 준장이 서 있었다.

    경호원은 A급 각성자 중에서도 자질이 뛰어난 자들로만 유년기에 선발하여, 전투원과는 다른 과정의 교육을 이수하고 수료한다. 그들의 최우선 임무는 요인을 안전히 보호하며, 위협이 되는 적을 배제하는 것이다.

    보통 각성자들이 특임부대에 배정되어 크리처를 표적으로 훈련하는 것과 달리, 경호원들은 온갖 표적을 상정하고 훈련한다. 그들과 같은 각성자, 연구원, 하물며 민간인이라 할지라도 표적이 될 수 있고, 누구라도 거리낌 없이 막아 내야 한다.

    “자, 극비 임무다. 지금부터 전선에 나선 서의우 대위를 처리하도록 한다.”

    오 준장이 목소리를 깔고 지시하며 경호원들을 훑어보았다.

    “서 대위는 본부실에 무단으로 침입하였고, 무단으로 이능을 일으켜 장교들을 공격했다. 자네들도 늙은이들이 의무실로 줄줄이 실려 간 꼴을 보았으니 알 건 알겠지.”

    “아닙니다, 준장님!”

    “아는 사실 없습니다!”

    “그래, 보안 유지 한번 철저하군. 다들 제대로 훈련받았어. 쓸 만한 친구들이야, 허허.”

    오 준장이 경호원들의 어깨를 한 명씩 짚어 치하했다. 경호원은 요인의 곁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더라도 몰라야 했다. 섣불리 아는 체라도 했다간 최소 징계, 혹은 파직이었다.

    “그럼 오늘 내가 무슨 지령을 내렸는지도 잊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겠지. 발각당하지 않고 은밀히 임무에 성공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야…….”

    긴말 주고받을 필요 없다.

    오 준장이 경호원들의 개인 회선으로 자세한 요건을 전해 보냈다.

    <적당히 사고사로 처리하면 딱 좋지 않겠습니까?>

    <전투 끝물, 서 대위가 이능을 소진하고 지칠 무렵까지 대기하다가 핵을 노리겠습니다.>

    쉽게 말해 어부지리, 견토지쟁, 전부지공이다.

    크리처와 싸우느라 이능이 바닥난 서의우를 암살하는 임무. 싸움은 크리처와 각성자들이 하고 이들은 뒤에 빠져 있다가 손쉽게 승리를 주워 돌아오면 된다.

    “보다시피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네. 반신반의하던 크리처 웨이브가 실현되었어. α크리처가 몰려왔단 말이야, 알겠나?”

    “예, 오 준장님.”

    “알겠습니다, 준장님.”

    “음, 좋군. 좋아. 군용 헬기를 하나 내줄 테니 어서들 다녀오게나. 혹여 들통이 나더라도 자네들 소속은 끝까지 함구해야 하고.”

    “……예.”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함구하라는 말은 보통 입을 닫으라는 뜻이지만, 이런 때엔 조금 의미가 달랐다.

    정신계 이능으로 기억을 읽히지 못하도록 제때 알아서 자결하란 뜻이다.

    “아니, 함구는 무슨……. 임무 실패는 있어선 안 될 일이지. 안 그런가? 으허허.”

    오 준장이 빠르게 경호원들을 내보냈다. 혹여 진보파 장성들에게 꼬리를 밟혀 들통나기라도 했다간 번거로운 일이 되고 만다.

    ‘그래. 필히 성공해야 해. 암, 그렇고말고…….’

    오 준장의 출셋길이 걸린 문제다.

    보수파 황보기천 중장의 줄을 잡는 것이 잘한 선택인가 모르겠다만, 당장은 이것저것 재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내리 도맡은 임무를 실패한 오성화 준장은 한시가 급했다. 이대로면 다음 분기에 조용히 자리를 내주고 은퇴나 해야 할 판이었다.

    ‘쯧. 이번만큼은 중장님께 쓸 만한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오 준장이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느적느적 본부실로 올라갔다.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고대하면서.

    ***

    피슛!

    도탄으로 위장한 이능이 살의를 담고 강력하게 쏘아졌다.

    푸른 전류를 머금은 힘이 나선으로 돌며 서의우의 등에 직격했다. 전투복을 찢고 들이박혀 살점을 뚫었다.

    “……!”

    다행히도 심장에서 약간 빗나갔다. 서의우의 어깻죽지에 움푹하게 상처가 남았다.

    “서의우! 의우야!”

    권재진이 다급히 가슴 포켓을 열어 힐링 팩터를 꺼냈다. 이로 뚜껑을 뜯어 열어 버리고 서의우의 목에 주사했다.

    “아, 괜,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권재진은 놀라 숨이 멎을 것 같은데, 서의우는 인상만 좀 구길 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하긴, 서의우는 각성자였다. 팔뚝이 날아가고 다리가 뜯어지는 게 일상인…….

    힐링 팩터 효과가 돌며 그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틈을 기다려 주지 않고 또다시 공격이 날아들었다.

    특임부대원들 틈에 섞여 몸을 숨긴 경호원들이 살상을 목표로 이능을 터트렸다. 하필 전투 끝물이라, 서의우는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고 불균형에 온몸이 위태롭던 참이었다.

    시계는 뿌옇고, 뇌는 절절 끓고, 높은 이명이 들리고, 불쾌한 환청에 헛구역질까지 일어날 지경이다.

    서의우가 짙은 눈썹을 거칠게 찡그리며 시커멓게 뒤틀린 이능을 심연 속 밑바닥에서 긁어냈다.

    불안정하고 위험한 힘이 꾸역꾸역 토해졌다. 사특하고 맹렬한 힘이었다.

    “크흑…….”

    눈살을 찌푸린 서의우가 이능을 끄집어 응수하자 A급 경호원이라도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날아들던 힘은 모조리 서의우에게 먹혔고, 되레 반격을 돌려주었다.

    서의우의 이능에 직격당한 경호원들이 곳곳에서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권재진이 경악하며 외쳤다.

    “그만해!”

    서의우의 목깃 위쪽, 곧은 목덜미에 검게 물든 얼룩 같은 것이 보였다.

    박 중위가 떠올랐다.

    에스퍼의 폭주 위험 수치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럴 때…….

    “하지 마! 됐어, 하지 마.”

    권재진이 다급히 소총을 내던지곤 양쪽 장갑을 벗었다. 맨손으로 서의우의 얼굴을 감싸고 검게 물드는 곳을 손바닥으로 덮어 힘껏 눌렀다.

    “잠깐만 이대로…….”

    “으, 괜찮, 다니까요.”

    “쉿, 쉬이. 가만히, 좀 있어! 그냥!”

    권재진이 다급한 나머지 서의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서의우는 눈썹을 묘한 형태로 일그러트리더니만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로는 폭주 안 하는데.”

    “시끄러.”

    “간당간당하긴 해도 아직 여유 있어요.”

    “시끄럽다고. 다물어. 이능 쓰지 마.”

    서의우가 다물었다.

    여유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한계였다. 어느 정도냐면 눈앞이 흐려서 권재진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하…….”

    서의우가 나자빠진 경호원들을 곁눈으로 살폈다. 일어설 기미가 없는 듯하자 그제야 힘을 풀고 권재진을 푹 끌어안았다. 둘 다 몸뚱이가 불덩이 같았다.

    “재진 씨…… 나 계속 다물어요?”

    “어. 닫아.”

    “와, 무섭네…….”

    “꾹 닫아.”

    “움.”

    “…….”

    권재진이 조심스레 손바닥을 치워 보았다. 검게 물들었던 그의 목덜미가 착각이었던 것처럼 깨끗한 모습이었다. 힐링 팩터까지 약효가 돌았는지 어깨에 뚫린 상처도 차차 아물었다.

    재진이 검은 눈동자를 잘게 떨다가 희미한 한숨을 겨우 흘렸다. 서의우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권재진은 잘 모르겠다.

    피부를 맞닿고 있긴 해도 가이딩이 잘되고 있는지,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의 핵과 공명할 수도 없고 파장을 읽을 수도 없으니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혹은 얼마나 회복된 건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돌연변이라도 서의우의 가이드가 되는 데 지장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때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피부 접촉만으로 괜찮을까? 점막 접촉 해야 하나? 키스라도 해? 그따위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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