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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144화 (144/154)
  • #144

    이른 봄. 세상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계절. 전환기를 맞이해 곳곳에서 새로운 시작의 신호가 눈에 띄었다. 청명한 공기는 건조하지 않고 수분기를 머금고 있으며, 새로 돋은 풀이 달콤한 향기를 흩뿌렸다.

    점차 길어지는 낮의 가운데, 높이 뜬 태양을 어른거리는 잿빛 구름이 가렸다. 어렴풋이 나타난 구름은 곧 바람에 흘러갈 전망으로 보였으나, 지금만큼은 한낮의 태양을 가리는 위협이었다.

    하루 이틀, 날이 지날수록 예견된 크리처 웨이브를 기다리는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한가로운 지금조차 평화가 아닌 폭풍의 전야처럼 느껴졌다.

    군 수뇌부에서 끝내 크리처 웨이브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정식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지난 대규모 전투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전투를 앞두고 특임부대원들은 합동 훈련해 가며 마물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날이 갈수록 불온한 낌새가 풍기고 열기도 짙어졌다.

    슬슬 정찰기에 남하하는 크리처가 포착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으며, 돌연변이나 S급 가이딩 등의 소란보다도 생과 사를 건 혈투에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당면한 위험에 따른 긴장이 차올랐고, 등에 짊어진 의무와 책임으로 인한 중압감이 늘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각성자들을 좀먹어 갔다.

    오랜 세월 끝없이 훈련했지만, 전투에는 어떤 확신도 없음을 알았다. 아무리 만전을 기해도 유망한 특임부대가 찰나에 전멸하기도 하고,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궁지에서 악착같이 귀환하는 부대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맞서 싸우는 것이고, 승리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대의를 믿고, 훈련해 온 세월을 믿고, 무장하여 맞선다. 그들은 군인이었고, 인류와 신념을 위해 싸우고 살아남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의의였다.

    그러니 결국은 그랬다. 그들의 총구는 서로가 아닌 크리처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권재진의 각성자등록코드가 발급되었다.

    소속과 직급에 따른 인식표가 주어졌으며, 기본적인 보급품도 제공되었다. 전투복 5착. 전투제복 1착. 전투화 2족. 전투장갑 2조. 안면마스크 1개. 전투모 1개. 개인화기 소총 2개. HMD 고글 2개. 개인 호출기 1개. 육군 휘장. 하사 약장. 그리고 힐링 팩터까지.

    권재진은 군번줄 달린 인식표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차마 목에 걸 수 없어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옆에서 권재진을 지켜 보던 서의우도 재발급 나온 인식표를 똑같이 주머니에 쑤셔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뒤, 드레스룸에 전투복을 정리하는 권재진을 향해 서의우가 넌지시 일렀다.

    “기기 확인해 봐요. 불량이면 돌아가서 교환해야 하니까요.”

    “아. 그래.”

    권재진이 바로 고글을 눌러 쓰고 전원을 켰다. 그러자 서의우가 보낸 메시지가 푸른 홀로그램 창에 휙 떠올랐다.

    [재진 씨. 잘 보이나요?]

    옆을 돌아보니, 서의우가 잘난 낯짝에 고글을 얹고 웃고 있었다.

    불현듯 서의우와 쉴 새 없이 문자 주고받던 옛 생각이 나, 재진의 입술 끄트머리가 들썩였다. 무력하게 웃어 버릴 뻔했지만 잘 참아 넘겼다.

    [어때요. 문제없이 보여요?]

    [와 근데 나 지금 재진 씨 개인 회선으로 연락하고 있는 거네요. 우와.]

    [재진 씨 회선이라고요. 재진 씨한테 직접 문자 하는 거예요.]

    권재진이 더듬더듬 고글 설정 창을 눈으로 훑었다. 작은 픽토그램이 달린 설정 창을 열고 음성 모드로 돌려 두었다.

    “잘 보여.”

    대답하자, 고글 화면에 똑같은 문자가 즉각 입력되었다.

    [잘 보여.]

    전송하자 서의우에게 제대로 보내졌는지 그가 짙은 미소를 띠었다. 흠 없이 정교한 얼굴 옆에 볼우물이 팼다.

    [네. 저도 잘 보여요. 이상 없나 봐요.]

    음성은 되는 것 같고…….

    권재진이 다시금 설정 창으로 들어갔다. 느릿하게 조작해 기존 자동 모드로 되돌린 뒤, 메시지 창에 대고 눈동자를 굴렸다.

    핸즈프리, 시선 추적만으로 문자를 입력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야 전투 상황에 유효하다고.

    [의우야]

    재진이 얼마간 눈동자 움직임에 집중해 문자를 입력했다. 자판이 생김새가 익숙하지 않아서 당황했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의우야’를 작성할 수 있었다.

    서의우는 어색하게 고글을 조작하는 권재진을 장난감에 적응해 노는 아기 보듯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의우야] 하는 문자가 떠오르자 놀라 탄성을 터트렸다.

    서의우가 쏜살같이 회신을 보내 왔다. 어찌 저렇게 빨리 입력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뭐야 벌써 터득했어? 우리 아기 천재예요?]

    이 문자를 읽자 버티지 못하고 입술 끝이 허물어졌다. 피실 올라가는 입 모양을 내리누르고 권재진이 답장을 입력했다. 이번에는 빠르게 보낼 수 있었다.

    [.]

    서의우가 돌아온 점 하나를 보고 한껏 웃음을 터트렸다. 쿡쿡거리는 낮은 웃음소리를 들으니 권재진도 웃음기를 숨기지 못했다. 그냥 편안하게 미소 띠며 문자를 이어 나갔다.

    [재진 씨 진짜 너무 귀엽다]

    [.]

    [그리고 그거 알아요? 개인 회선 문자 저장되는 거]

    [.]

    [보관할 수 있어요. 암호 걸어서 잠글 수도 있고. 그 말이 무슨 뜻이겠어. 재진 씨 메시지 이제 다 내 거다?]

    얼마간 서의우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눴다. 서의우는 권재진이 [.]을 보내려다 삐끗해서 [,]을 보낸 것에도 미친 듯이 즐거워했다.

    [진정해]

    권재진이 고작 세 글자 완성하는 동안 서의우는 문자를 몇 개나 보내는지 모르겠다.

    서의우가 스리슬쩍 자세를 낮추었다. 커다란 근육질 몸체를 완전히 수그려 버리고 침대에 모로 뉘어 권재진의 얼굴을 낮은 각도에서 올려다보았다. 고글 아래 좁은 틈새로 움직이고 있는 검은 눈동자를 엿보기 위해서였다.

    재진의 콧등과 고글 화면 사이로 열중한 눈동자가 감질나게 살짝 보였다. 냉철하고 이지적인 눈이었다.

    권재진이 알까 모르겠지만, 고글로 사진도 찍을 수 있고 영상 촬영도 된다. 서의우는 집중한 재진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 저장하곤 둘이 사귄 날짜를 비밀번호로 걸어 두었다. 그런 뒤에는 사진을 첨부해서 메시지로 전송했다.

    [사진]

    화면 가득 떠오른 자신의 얼굴 사진을 보자, 권재진이 ‘뭐야?’ 하고 혼잣말했다. 서의우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당황한 재진의 모습을 서의우가 또 연속 촬영한 다음 와르르 전송했다.

    [사진]

    [사진]

    [사진]

    [사진]

    재진이 그만하라고 말리자 이번엔 그만하라는 음성이 담긴 영상을 찍어 보냈다.

    참다못한 재진이 설정을 꼼꼼히 뒤적였다. 기어이 촬영 모드를 찾아내고는 보복하듯 서의우를 찍었다. 흔들린 모습의 서의우가 여러 장 찍혀 저장되었다. 사진 속 서의우는 고글을 쓰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재진 씨, 고글 사용법 원래부터 알고 있었나요?]

    [이것도 미래의 내가 가르쳐 줬나? 그럼 그렇다고 얘기하지 그랬어요.]

    서의우가 가볍게 묻자, 권재진의 입매가 조금 굳었다.

    치료하지 않고 덮어 두었던 상처를 무심코 지적당했을 때 보일 법한 표정이었다.

    “아…….”

    고글은,

    고글 사용법은…….

    꿈에서…….

    파스슥, 얇은 유리가 깨진 것처럼 평화롭던 순간이 바스러졌다.

    권재진의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1회차 서의우가 기다리고 있노라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고…….

    “…….”

    찬바람이 든 것처럼, 머릿속이 한구석이 싸늘해졌다. 대체 왜, 잠깐조차 느긋하게 지낼 틈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권재진이 말없이 고글 전원을 끄고 머리에서 벗었다.

    “뭐야. 왜 벌써 벗어요. 좋았는데.”

    서의우가 고글을 벗느라 흐트러진 재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었다. 앞머리를 쓸어 넘겨 이마가 드러나게 젖혀 보며 장난을 쳤다. 권재진은 저항 없이 머리카락을 내주다가 시선을 멀찍이 돌렸다.

    “……그게.”

    “응? 왜요.”

    서의우가 나른하게 읊조리며 눈앞에 놓인 권재진의 하얀 이마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러곤 드러난 이마에 당연하다는 듯 입술을 붙였다. 웃는 낯이 가까웠다.

    간지러운 탓에 재진이 발끝을 좀 움찔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24살 서의우를 알려야 했다.

    그가 나오는 꿈을 꾼다고 얘기해야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재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이 있어.”

    24살 서의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가사의를 두고 권재진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술렁였다.

    “꿈을…… 실은, 전부터 좀 이상한 꿈을 꿨는데.”

    “아, 응. 재진 씨 가끔 악몽 꾸곤 했죠.”

    “그래…… 그게.”

    재진이 공들여 표현을 골랐다.

    “크리처가 떼로 몰려오는 꿈입니다. 크리처와 싸우는……. 그리고 그…….”

    “그리고? 뭔데요.”

    미묘한 침묵에 감춰진 갈등을 간파한 서의우가 은근한 눈빛으로 재촉했다. 회색 눈동자가 자못 침착했다.

    권재진이 막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체념한 손으로 눈가를 덮어 가리곤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서의우 씨가 나옵니다.”

    “…….”

    “회귀하기 전, 24살이었던 서의우 씨가.”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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