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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143화 (143/154)
  • #143

    스피커가 찢어질 듯한 호통과 함께 최 대장의 홀로그램이 뒤틀렸다.

    “낭비할 전력은 없다. 제2파가 시작된다면 우린 서의우를 전선에 내보내 싸우게 해야 해.”

    “그쯤이야 서 대위에게 출격 명령을 내리면…….”

    “권재진을 배제당하고 서 대위가 군의 지시에 순순히 따른다고 확신할 수 있나?”

    “그…….”

    “도리어, 전군이 출격한 상황에 센터를 급습하려 든다면? 빈집이 된 중앙관을 장악하고, 여기 앉은 장성들의 모가지를 따내려 한다면 저지할 방도 있겠나?”

    “…….”

    “지난 대규모 전투에서 확신했지. 서 대위와 권재진 둘이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이 본부실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을 걸세. 그러나 그들은 그 천재일우의 기회에 센터를 습격하기보다도 크리처와 전투하고자 전선에 나갔어. 더 말이 필요한가?”

    최 대장이 서슬 퍼런 표정으로 탄식했다.

    그의 가슴에 세찬 바람이 지나고 있었다. 허무하고 씁쓸한 역풍이었다.

    한평생 군에 충성을 바치고 군의 규율에 따라 먼 길을 거닐었던 여정이 송두리째 흔들려 뒤집히려 하고 있었다. 최 대장의 눈은 이미 먼 너머에 박혀 들었고, 자신이 오랜 세월 걸어온 길의 끝을 짐작하고 있었다.

    “인간은 죽을지언정 인류는 죽지 않는다…… 최선의 선택을 거듭해 온 결과가 이것이라면 받아들여야지.”

    당장은 손 쓸 방도가 없다. 권재진에게 소속을 내주고 중용하는 것 외에는.

    “세월이 흘렀어. 시대는 변했고. 우린 다 죽을 때가 된 게야. 쯧.”

    ***

    “아니, 저 양반 노망났나?”

    전략회의가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최 대장의 통신이 끊겨 홀로그램이 사라진 뒤, 황보기천 중장이 들고 있던 펜대를 내던졌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 쌌어. 자기는 그간 대장 자리 철퍼덕 깔고 앉아서 해 먹을 만큼 해 먹었다 이건가.”

    본부실에 남은 장성들이 저마다 쓴웃음을 지었다. 황보 준장이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듯이 문질렀다.

    “그래, 제 임기 중에 괜한 분란 일으키기 싫다 이거지. 장수말벌 한 마리 잡자고 군을 일으켜 집안 쑥대밭 만들 바에야 모른 척 덮어 넘기고 싶겠지. 그러고 저 양반은 깨끗한 이력 들고 정치판으로 쏙 빠지겠다, 국방부에서 한자리해 드시겠다 이 소리 아니냔 말이야, 지금.”

    “그렇지 말입니다. 똥은 최 대장님이 싸시고 저희가 쌔빠지게 치우게 생겼습니다.”

    “저, 거, 그래서 어찌할 건가. 서의우 권재진 저것들 그냥 놔둬?”

    “아이…… 그럴 수는 없죠. 말이나 됩니까.”

    장성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수군거렸다. 진보파에 속하는 이들이야 결정에 불만은 있더라도 크게 항변할 의지는 없어 보였지만, 보수파 장성들은 상당히 얼탱이 없는 모습이었다.

    군 수뇌부는 오래도록 보수와 진보로 양변으로 나뉜 형국이었다. 그러나 항상 보수파가 우세했다. 팽팽하게 설전을 벌이더라도 결과는 보수 측의 승리였다. 최 대장이 보수 측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크리처 웨이브를 향한 경고를 연구 개발관에서 극비리에 보고받았을 때에도 근거 미달, 현 체제 유지 결정이 난 것이었다.

    그런 최율 대장이 진보 측으로 돌아서는 움직임이 보이니 보수파 장성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믿고 따르던 수장이 갑자기 등을 돌린 모양새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특히나 최 대장의 줄을 잡고 있던 중앙군사령관 황보기천 중장은 더 어이가 없었다. 최 대장의 뒤를 이어 중앙군사총장직에 내정된 상태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최율 대장이 갑자기 보수를 버리고 진보로 돌아선다면 코 푼 휴지짝 같은 신세가 될지 몰랐다.

    ‘설마, 중앙군부사령관 현 중장 이 친구가 뒤에서 무슨 수를 썼나……?’

    아니, 자리다툼이야 늘 있는 일이니 그렇다 쳐도, 진정한 골칫덩이는 그게 아니었다. 서의우, 권재진. 저들을 어찌 처리할 것인지가 문제다.

    보수파 황보기천 중장이건 진보파 현우중 중장이건 누가 차기 대장으로 진급하여 센터를 이끌게 될지 모르겠다만, 둘 중 어느 쪽이 영전한다 해도 오염된 각성자와 돌연변이를 떠안을 순 없었다.

    “실상 문제가 되는 건 서의우인데……. 권재진이야 서의우만 없으면 생포하긴 쉽지……. 그 후엔 연구개발관에 넘기면 되고.”

    황보기천 중장이 넌지시 운을 떼며 옆자리 현 중장을 살폈다. 중앙군부사령관 현 준장은 사람 좋은 듯이 허허 웃으며 통신을 끊었다.

    “그야 그렇지……. 뭐, 그래도 당분간은 지켜봄세. 최 대장님 지시도 있는데. 그리고 군에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겠나? 돌연변이 출신 S급 가이드. 캬, 범상치 않아. 드라마야 아주.”

    미련 없이 사라지는 홀로그램을 보면서 황보기천 중장이 혀를 끌끌 찼다. 신나서 내빼는 꼴을 보니 급한 사람더러 똥을 닦으라는 뜻이 분명했다.

    “저, 저……. 노났군. 노났어.”

    현 중장이 떠난 후로 진보파 장성들도 눈치를 살피다 우르르 자리를 떠났다. 본부실에 남은 건 보수파 장성들뿐이었다.

    황보기천 중장이 말아 쥔 주먹으로 탁자를 퉁 치자 재깍 알아들은 아래 직급 소장, 준장 장성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방안을 토해 냈다.

    “아무래도 징계로 다스려야지 않을지…….”

    “아예 군법을 따져 군사재판소에 세우는 건…….”

    “서 대위를 영창에 보내자는 겁니까? 그걸 과연 순순히 따를지, 허어.”

    “아니, 처분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미적지근 굴 수는 없는 노릇이네. 이미 그런 수준을 지나쳤어.”

    그때, 말석에 박혀 있던 오성화 준장이 슬그머니 눈썹을 치켜들었다. 지금이야말로 황보기천 중장에게 줄을 댈 절호의 기회임을 알았다.

    “저, 그러지 마시고, 적당히 사고사로 처리하면 딱 좋지 않겠습니까?”

    오 준장 제게로 꽂히는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책상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권재진 수색 부대를 도맡은 것도 오 준장이었고, 생포 임무를 지휘한 것도 오 준장이었다. 두 임무가 내리 실패로 무너졌기에 한동안 입을 닫고 몸을 사려야 했지만, 재기하려면 지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원 스타 준장으로 군 생활을 마무리 지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우두머리 자리에 오를 인물감이 아닌 건 본인도 알고 있다. 하지만 대장직에 오르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투 스타, 소장까지는 앞날을 내다보아도 되지 않겠나?

    “서 대위가 게이트 내부에서 전사해 주면 최상의 결과라고…… 그렇게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손대 주무르면 되잖습니까.”

    “전사하도록……?”

    “바로 그렇습니다. 예고처럼 크리처 웨이브 제2파가 조만간 시작되고 서 대위가 출전한다면…… 전투 중에 각성자가 사망하는 거야 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지금 같은 혼란도 얼마 안 가 사그라들 겁니다.”

    오 준장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은밀히 승부수를 띄웠다.

    “전시엔 별별 비극이 벌어지곤 하니 말입니다. 연구개발관 예측이 맞아떨어져 α크리처를 상대하게 된다면 사망자 수가 적지도 않을 테고. 의심을 살 일도 없을 겁니다.”

    “흐음…….”

    “전투 끝물, 서 대위가 이능을 소진하고 지칠 무렵까지 대기하다가 핵을 노리겠습니다. 가능합니다.”

    각자 전투에 집중하느라 서의우가 크리처에 당해 죽었는지, 아니면 아군의 도탄에 맞아 죽었는지 쉽사리 구분할 수 없을 터였다.

    “음, 그래, 그렇지. 서의우만 제거하면 권재진은 우리 입맛대로 굴릴 수 있고.”

    “예, 그렇습니다.”

    “좋군. 썩 나쁘지는 않은 방안이다만……. 오 준장이 해낼 수 있겠나?”

    “맡겨 주신다면야 그럴싸하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또 부채질만 하다가 끝나는 거 아닌가 몰라. 이 친구, 매번 연기만 풍기고 결과가 없어. 어?”

    “아닙니다, 중장님. 이번에는 제대로 작품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저 오성화!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알고 있겠지만 극비 임무다. 발각당하면 내 선에서도 허물을 덮어 주기 어려워. 들키지 않고 해낼 수 있단 말이지?”

    “예. 보안 유지를 위해 정식 특임부대원 아닌, 개인 경호원 대기 인력을 소규모로 차출해 주시면 깔끔히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허…… 그래, 그럼 한번 오 준장이 말벌 사냥 추진해 보게. 이번에 마지막으로 지켜보지.”

    오 준장이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됐다. 쓰러진 진급 사다리를 다시 붙잡았다. 아니, 사다리가 아니라 동아줄…… 그것도 반쯤 곯아 있는 동아줄이지만, 그래도 뭐든 위로 뻗은 것을 붙들었다.

    “옙, 중장님! 다시 기회를 내려 주셔 감사합니다!”

    화급히 팔을 올려 경례하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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