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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124)화 (124/154)
  • #124

    전투복에 하네스까지 갖춰 입은 권재진이 선반에 놓인 소총을 집어 들었다. 망설임 없이 능숙하게 장전하면서 그 옆을 힐긋 보았다.

    전원이 꺼진 상태로 진열되어 있는 여벌 고글이 눈에 띄었다.

    <써 봐요.>

    <됐습니다. 전 이거 사용할 줄도 모릅니다.>

    <알아. 일단 해 봐요. 익숙해지면 도움 될 거예요.>

    마른침을 삼켰다. 목젖이 오르내렸다. 옆에서 서의우가 권재진을 재촉했다.

    “재진 씨, 이제 가요. 좌표이동 할 거예요. 손잡아.”

    “아, 예. 갑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권재진이 선반에 놓인 고글을 휙 집어 들었다.

    한 번도 써 본 적 없으면서.

    꿈에 나왔던 게 전부인데.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걸렸다.

    슬슬 희미한 의심이 든다.

    24살, 1회차 서의우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꿈을 꾼 게 단순한 우연일까? 무의식의 발현일 뿐인가?

    <도망칠 수 없어요. 재진 씨는.>

    <도망쳐선 안 돼요.>

    ……어쩌면 처음부터 그가 권재진을 어디론가 이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등골이 짜릿하더니 먼 곳에서부터 이명이 들려왔다.

    권재진은 2회차 서의우와 새 삶을, 제대로 된 삶을 살아 보고자 다짐했다. 2회차 서의우와 함께하는 인생 2막이 시작되었노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왜인지 조명이 비추지 않는 무대 밖 검은 그림자 속에서 1회차 서의우가 아직 권재진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

    날씨마저 암울한 전조 같다.

    하늘에 시커먼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대비가 쏟아질 것처럼 보였다.

    새삼스러운 감상을 느낄 겨를조차 없이 센터 중앙관 위로 좌표이동을 끝마쳤다. 빛 방울이 사그라들었고, 아래 살풍경한 광경이 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격벽이 열린 외부 비행장. 끝없이 늘어서 수송기에 무장한 각성자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어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권재진을 생포하기 위해 임시로 결성되었던 수색부대 같은 소규모 인원이 아니었다.

    센터의 정식 본대, 특임부대 사단이 집결하고 있었다.

    대인원이 출격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보자마자 날카로운 위기감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이 긴급 호출은 허튼수작 따위가 아니었다.

    실제 상황이고, 실제로 전투가 벌어질 현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 크리처가 몰려오는 것이다.

    꿈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무수한 마물의 군단이 파도처럼 끝없이 밀어닥치는 것이다.

    권재진이 소총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크리처 웨이브에 완벽하게 대비하고, 전쟁에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고 까진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크리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정도는 갖추었다.

    꾸준한 사격 연습,

    싸우고자 하는 마음가짐,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센터 측과의 임시 휴전.

    권재진은 이제 전장에 나설 수 있었다.

    서의우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집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의 곁에서 직접 총을 쏠 수 있었다.

    권재진을 비정하고도 잔혹한 세상으로 굴러 떨어뜨린 원흉, 우글대는 검은 마물을 향해서…….

    수송기가 하나둘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출발하는 특임부대원들을 보며 권재진이 물었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제2 개척지구로 출격하는 겁니까?”

    “네. 그렇겠네요.”

    “그럼 서의우 씨도, 가야 하는 겁니까?”

    “…….”

    서의우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곁을 돌아보니, 서의우가 짙게 가라앉은 어두운 눈으로 권재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회색 눈동자에 담긴 갈등을 권재진이 바로 읽어 냈다.

    “저도 가겠습니다.”

    “재진 씨.”

    소집 명령을 확인하는 것까진 서슴없이 권재진과 동행했지만, 전장까지는 함께 나가자니 염려스러운 것이다.

    “방해될 일 없게 하겠습니다. 같이 가는 게 더 안전하다며. 두고 가지 마.”

    재진이 결연하고 단호하게 부탁했다. 목소리가 단단했다.

    어느덧 검게 흐려진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르릉거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을 보니 뇌우였다.

    서의우가 조용히 손바닥을 펼쳐 권재진의 머리 위를 가려 주었다. 비에 맞지 않도록.

    “……정말 괜찮겠어요? 험한 꼴을 보게 될 거예요.”

    “괜찮습니다. 각오됐습니다.”

    “나는 크리처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눈앞에서 죽을지 몰라요. 한두 명이 아니라 셀 수도 없이.”

    “…….”

    “이건 실전이고, 심지어 대규모 전투예요. 어떤 식으로든 재진 씨에게 후유증이 남을 거예요. 영혼을 갉아먹을 거예요. 그래도 상관없겠어요?”

    서의우가 한숨을 삼키고 호소했다. 그의 앳되고 미려한 얼굴에 빗방울이 또륵 맺혔다.

    “재진 씨가 심지 곧은 사람인 거 알아요. 여간한 일엔 흔들리지 않는 성격인 줄도 알고, 쉽사리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사람인 줄도 알아요. 하지만 재진 씨는…….”

    “……연약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아뇨, 재진 씨는 정의롭잖아요.”

    마주친 시선을 따라 전해지는 본심이 선명했다. 서의우는 언제나 맹목적이었고, 광적이었고, 그렇기에 권재진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재진 씨는 부당하게 죽어 나가는 목숨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성격이 아니잖아요. 자기 목숨은 아까운 줄 모르면서, 다른 사람 목숨만 챙기고, 늘 그렇잖아요.”

    “…….”

    “수색부대까지 보냈던 군부와도 협상해 주고, 에스퍼 새끼들 가이딩까지 해 주겠다고 나서고, 재진 씨는 매번 남들만…….”

    “그래도.”

    권재진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이번마저 가만히 숨죽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서의우의 걱정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직접 전선에 나서는 건 권재진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이는 각성자라면 누구나 감당하는 삶의 무게였다.

    서의우는 한평생 크리처와 싸우며 살아왔다.

    저 아래 보이는 각성자들 모두가 그랬다.

    “솔직히, 제가 정의롭다는 생각은 살면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습니다. 오히려 이건 개인적인 원한에 가깝습니다.”

    “원한이요…….”

    “저는 4년 동안 마모되며 살았습니다.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하고 마모되며, 부당함에 익숙해졌습니다. 매일 싸우지도 못하고 패배하며 살아왔던 겁니다. 그러니 지금 저는 복수하는 겁니다.”

    크리처는 두려운 존재고, 크리처 웨이브는 더욱 끔찍한 참사다.

    하지만 그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빨리 맞서고 싶을 따름이었다.

    한참 전부터, 권재진은 몸이 달아 있었다.

    “군부를 개혁해서든, 가이딩을 해서든, 크리처를 죽여서든. 지난 생보다 이번 생이 나아질 거란 확신이 있으니 움직이는 겁니다. 어제보다 내일이 나았으면 하니까. 너랑 더 잘 살아 보고 싶으니까. 발을 내딛는 거라고.”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서의우가 손바닥으로 가려 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권재진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지금은 둘이 함께 비를 맞는 수밖에 없었다.

    서의우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두 팔을 넓게 벌려 권재진을 품 속에 가두듯이 꽉 껴안았다.

    “……그래, 그랬죠. 우리 같이 뒤엎기로 했죠.”

    <난…… 다 뒤엎고 재진 씨와 살고 싶어요. 제대로.>

    <운명을, 뜯어고칠게요. 재진 씨를 위해서.>

    “아는데, 그거 다 아는데, 괜히…….”

    “의우야…….”

    “나도 잘 모르겠어요. 아까부터 불분명한 충동이 들어서, 내가 좀 헷갈려요.”

    서의우는 아직 모순적인 치정을 품고 있었다.

    권재진을 소중히 아껴 주고 싶었지만 상처 입혀서라도 뜻을 꺾어야 했다.

    권재진의 정의롭고 올곧은 면에 이끌리지만, 한편으론 아무도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자신만 봐 줬으면 싶었다.

    권재진이 원하는 건 뭐든 이뤄 주고 싶지만, 저 깊은 곳에 숨은 이기심은 은연중에 그를 잡아 가뒀으면 좋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권재진이 서의우의 집 안에 얌전히 갇혀 지낼 때는 이런 고뇌를 할 필요가 없었다.

    권재진은 항상 서의우의 이능이 닿는 권역에 상주하고 있었고, 사고가 있었던 한 번을 제외하곤 울타리 밖으로 벗어난 적 없었다.

    덕분에 서의우는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서도 자연스럽게 권재진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권재진은 차츰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만큼 서의우의 집착도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권재진을 독점하는 건 점점 어려운 일이 되어 갈 테니까. 구속하고픈 음험한 욕구가 무의식중에 강해지는 것이다.

    “헷갈린다니, 왜. 뭐가 말입니까.”

    “……그게.”

    서의우가 내리뜬 눈에 힘을 주었다. 동공이 희고 선명하게 빛났다.

    “나중에 말할게요.”

    아니, 괜한 걱정이다.

    크리처 웨이브를 막아 낸 후에는 성가신 군부를 전복하고 끝내 버리면 이 걱정도 사라질 일이었다.

    권재진을 잡아 가두고 싶은 충동이 드는 건 지금 상황이 불안정하기 때문일 테고, 모든 일이 일단락될 즘이면 예전처럼 둘만의 세상에서 서로만 바라보고 연애하며 지낼 수 있을 테니까.

    그때가 오면 온종일 권재진의 옆에 붙어서 같이 먹고, 자고, 데이트하고, 물고, 빨고. 권재진이 싫다는 더러운 짓도 하고, 밖에 나가고, 간지럼 태우고, 기념일도 축하할 것이다. 처박고, 싸지르고 달래 주고, 아양 떨어야지. 밤이건 낮이건 관계없이 권재진과 함께 둘이서만 붙어먹는 거다.

    양치질도 해 주고, 사랑니 만지작대고, 쬐끄만 점에 키스하고, 무릎 베고, 머리 쓰다듬어 달라고 졸라 대야지……. 서의우는 권재진이 이따금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빗어 주며 가르마를 이리저리 넘길 때의 손길이 참 좋았다.

    “가요, 같이.”

    그래…… 다른 생각 할 필요 없다.

    단순하게, 크리처를 몰살하고 돌아가는 거다.

    먼 곳에서 천둥이 내리쳤다. 번개가 번쩍이는 순간, 플래시를 터트린 것처럼 세상이 까맣고 하얗게 점멸했다.

    찰나의 흑백 속에서 서의우가 빙긋 미소 지었다. 유려하게 휘어지는 기다란 눈매가 비인간적일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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