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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125화 (125/154)
  • #125

    키이이익!

    시시싯, 시시싯!

    외경계벽 너머, 제2 개척지구를 향해 새까만 파도가 밀려왔다.

    튀어 오르고 가라앉으며 몰아치는 검은 파도의 정체는 진격하는 마물의 군단이었다. 각양각색의 형상을 한 크리처들이 개미 떼처럼 우글거리며 집단으로 남하했다.

    후미에 따라붙는 무리는 아직 까마득히 멀어 보였지만, 선두에 선 무리는 벌써 제2 개척지구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경계 보초를 서던 각성자들이 선봉을 막고 있기는 하나, 그들만으로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크리처의 사취가 코를 찌르고, 초목은 짓밟히고, 기껏 정비한 도로도 모조리 뒤집혔다. 힘들여 되찾은 땅이 무참히 휩쓸려 나갔다.

    본디, 개척지구란 뜻깊은 지역이었다.

    승리의 상징이자 희망의 등불이다.

    왜냐하면 한때 크리처에게 빼앗겨 황폐해진 땅을 인류의 힘으로 되찾은 구역이기 때문이었다.

    장기 출장 나간 각성자들이 몇 달간 열악한 환경에서 주둔하며, 지대를 점령한 크리처를 수색해 죽이고, 콘크리트 플라스틱 고철 등 썩지 않는 구시대 인류의 폐기물 잔해를 처분하고, 외곽에 외경계벽을 덧세운다. 그런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개척지구 하나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 후에 유예 기간을 두고서 건물을 짓고, 이주민을 정착시키면 겨우 일반 거주지구로 기능하게 된다.

    그러니 인류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개척지구는 필히 지켜 내야 하는 지역이었다.

    단지 개척지구의 상징성 때문이 아니라, 개척지구 하나를 정비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이 대단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용뿐 아니라 인력, 시간, 자원 등 모든 요소가 허투루 낭비해선 안 될 것뿐이다.

    우르르릉!

    먹구름이 세찬 비를 퍼부었다. 예사롭지 않은 전황을 좇아 기상도 악화하고 있었다.

    하늘엔 짙은 먹구름이 해를 가리고, 지표는 시커먼 크리처 떼가 뒤덮어 파도를 이뤘다.

    온통 어두컴컴한 암흑천지 속에서 암운을 헤치고 수송기가 줄지어 날아왔다.

    그 모습이 마치 어둠 속을 항해하는 군함처럼 보였다.

    수송기는 늦지 않게 외경계벽 위에 멈추어 섰고, 배가 갈라져 열렸다. 내려뜨려진 밧줄을 타고 훈련받은 정예 각성자들이 떼 지어 강하했다.

    굵은 빗방울을 맞으며 땅에 내려선 이들이 거대한 대형을 이루었다. 이만한 수의 부대가 한 임무에 합세하는 건 전에 없던 일이었다.

    -전방에 β크리처 다수 접근!

    -형을 특정할 수 없습니다. 개체 수는…… 족히 수백입니다.

    -외경계벽이 뚫리고 있습니다. 무너집니다. 어서 지시를!

    다급한 통신과 보고가 난무했다.

    크리처 웨이브를 알고 있던 장성들이라면 모를까, 정보가 전혀 없던 현장 전투원들은 이 상황이 심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전투에 익숙한 특임부대원이라 해도 이만한 수의 크리처 무리를 한 번에 상대할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형도 뒤섞여 있으니 구분하는 것조차 난관이었다.

    온갖 동물의 형상을 빼앗은 마물들이 경계벽 아래로 우글우글 몰려왔다. 서로의 몸을 밟고 올라서며 보호막을 찢기 시작했다.

    발톱으로 헤집고 송곳니로 물어뜯고 부리로 쪼았다.

    -사살! 크리처를 사살하라!

    결국, 눈앞의 재앙을 파악할 새도 없이 당장 전투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난전이 시작되었다.

    특임부대원들이 앞다투어 크리처를 향해 발포했고, 장대비 못지않게 수없이 많은 총알이 쏘아 떨어졌다.

    -전열을 가다듬고 전진한다!

    -크리처를 개척지구 밖으로 내몰도록!

    -전선을 앞으로 밀어라! 전진!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검은 피가 강처럼 흘렀다.

    크리처들을 개척지구 밖으로 밀어내야 했다. 개척지구 밖, 미개척지구까지만 몰아내면 그 후에는 전폭기로 폭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키에에에에!

    그 순간, 하늘에 새까만 새 떼가 수직으로 낙하했다.

    거대한 독수리를 닮은 형태의 크리처들이 발톱을 내밀고 수송기로 돌진했다. 두터운 비행선 장갑은 발톱질에도 거뜬히 버텼지만, 프로펠러는 그렇지 못했다.

    독수리형 β크리처 한 마리가 프로펠러 속으로 딸려 들어갔고, 비행체의 평형이 무너졌다.

    수송기가 땅으로 추락하며 완벽했던 전열이 확 흐트러졌다.

    전선 중간이 분단되었으며, 전진하던 특임부대원들의 기세도 꺾였다.

    그 틈을 타서 크리처들이 반격을 시작했다.

    “으아악!”

    “비켜! 물러서라!”

    “빈틈을 메워! 즉각 전열을 가다듬도록!”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들리고, 피가 흘렀다.

    땅에 내리꽂힌 수송기의 등을 타 넘고 크리처들이 외경계벽 위까지 도약했다. 후방에 자리 잡고 있던 지원병들이 물어뜯겼다. 머리통이 뜯어지고 팔뚝이 날아갔다.

    단숨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능 사용이 눈에 띄게 잦아졌다.

    보이지 않는 힘이 솟구치고 날뛰며 불꽃이 튀고 바람이 불었다. 폭발음이 들리기도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좋지 못한 징조였다.

    에스퍼는 이능을 사용할수록 불균형이 심해지고, 가이딩을 갈구하게 된다. 그리고 한계치를 넘어 버리면 그 뒤는 폭주뿐이다.

    가이딩 대체 약물이 있긴 하지만 그 또한 힐링 팩터 같은 보급품이었다. 물자는 언제나 한정적이다.

    그렇기에 전투 시 이능력을 남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능 사용은 장기적으로 보고 유의해서 사용해야 마땅했다. 그것도 적이 이렇게 까마득하게 많이 몰려올 때는 더욱.

    빗발이 세지고, 전투는 점차 혼돈으로 추락해 갔다.

    전열을 가다듬으려는 지휘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단된 대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허리가 끊긴 듯한 형국이었다. 그 틈을 타 파고든 크리처들과 특임부대원들이 마구잡이로 뒤엉키고 뒤섞였다.

    결국,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후퇴! 후퇴하라!

    그러자 이제는 물러서는 각성자들을 크리처들이 사냥하기 시작했다.

    힐링 팩터를 사용하는 와중에 공격당하거나, 이능 사용으로 불균형이 심화될 때 공격당하거나, 퇴각하는 와중에 공격당하거나…….

    마물의 검은 피 웅덩이 위에 인간의 붉은 피가 더해졌다.

    살점이 뜯기고 뼈가 갈렸다. 아비규환이었다.

    바로 그때,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짙은 어둠을 가르고 떨어진 선명한 하얀 벼락이 하늘과 땅을 이었다.

    불빛이 번쩍하며 점멸하더니, 사나운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뇌성벽력이 포효했다.

    나팔이 울리면 전쟁과 심판의 때다.

    줄기차게 쏟아지던 빗물이 일제히 멈춰 섰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물방울이 보석처럼 허공에 맺혀 있다가, 환하게 터지는 빛과 함께 폭발하듯 사방으로 분출했다.

    그 가운데, 좌표 이동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참혹한 전장의 한복판 위에 서의우와 권재진이 올라섰다.

    둘의 주변에 좌표 이동의 잔흔인 빛 방울이 오로라처럼 신비로운 여러 빛깔로 흩어졌다.

    두 사람의 극적인 등장 때문에 후퇴하며 공격당하던 각성자들이 잠시 얼어붙었다.

    그러더니, 서의우를 알아본 특임부대원들 몇 명이 눈을 크게 홉떴다. 그들은 지난 권재진 생포 임무에 나섰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고 돌아온 특임부대원들이었다.

    하물며 서의우의 곁에 서 있는 권재진까지 알아보았을 때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충격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날의 재림을 보는 듯했다.

    서의우, 그리고 권재진…….

    크리처 웨이브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던 것처럼, 이들은 권재진이 정식으로 등급 테스트를 받고 S급 가이드 판정을 받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수색 부대가 해체되었다고만 전달받았지, 군 수뇌부의 협상 등 자세한 내막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경악할 따름이었다.

    ‘돌연변이가 어째서 이곳에……?’

    심지어 권재진은 전투복을 갖춰 입고 소총을 든 차림이었다. 매끈한 이마 위에는 고글이 얹혀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정식 각성자들과 똑같은 차림새였다. 완벽한 특임부대 전투원의 모습이었다.

    ‘대체 어떻게 돌연변이가?’

    의문을 해소할 틈도 없이, 폭풍이 몰아쳤다. 서의우에게서 막대한 이능이 용암처럼 솟구쳤다.

    서의우가 가볍게 손을 뻗치자 빗물이 기적처럼 갈라지고, 외경계벽 위에 올라선 크리처들이 삽시간에 쓸려 나갔다. 파격적인 염동력이 저항하며 날뛰는 크리처들을 바닥으로 메다꽂았다.

    그렇지만, 모든 크리처들을 한 번에 솎아낼 수는 없었다. 개중에 특임부대원들을 덮쳐 누르고 한 덩이처럼 엉겨 붙은 개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을 다 내던지면 엉킨 사람까지 죽을 위험이 있었다.

    서의우는 딱히 인간 죽는 꼴을 권재진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몇 마리쯤은 외경계벽 위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그건 권재진에게 완벽한 표적이 되어 주었다.

    눈살을 찌푸린 권재진이 소총을 견착하고 겨누었다.

    날씨 탓에 시야가 좋지 못했고, 지독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이 떨렸고, 몸에 열이 났다. 진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솔직히 시체가 쌓인 아래쪽은 아직 내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권재진은 움직였다.

    외경계벽 위에 남은 크리처를 조준했고, 수없이 연습했던 그대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 당겼다. 뜻한 바대로 발포했다.

    탕!

    총구가 불을 뿜었다. 희미한 탄약 냄새가 피어올랐다.

    기절한 특임부대원의 허벅다리를 씹어 삼키던 크리처의 머리통 한가운데 구멍이 뚫렸다.

    예전 크리처 한 마리와 맞닥뜨렸을 때, 마구잡이로 총알을 난사했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명중이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