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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122)화 (122/154)
  • #122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좀 전까지는 권재진도 정신이 없었다.

    마치 권재진을 향해 무수한 운석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돌연변이, 등급 테스트, 최초의 S급 가이드, 이능의 향상, 크리처 웨이브, 최 대장, 잊어버린 가족들, 우주 꿈, 1회차 서의우……. 하나하나가 권재진을 강타하는 거대한 운석이었다.

    그래서 조급했다.

    크리처 웨이브라는 가까운 미래를 앞두고서, 어떻게든 기존 체제를 변혁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잊어버린 가족들도 신경 쓰이고, 임시 휴전에 놓인 지금 상황을 빠르게 개선하고 싶었다.

    에스퍼의 이능을 향상시킨다는 가이딩으로 권재진이 상황을 반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때문에 시야가 좁아졌다.

    사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인데.

    서의우와 권재진, 함께할 둘의 삶인데…….

    “괜찮다고 말하지 말아요.”

    울컥한 서의우가 있는 그대로 내뱉었다.

    “재진 씨 다쳤어요. 안에 찢어졌고 피도 흘렸어요……. 내가 아프게 했다고요.”

    “글쎄, 안 아프다니까…….”

    “됐어, 재진 씨 아픈 거 못 견디잖아요. 솔직하게 말해요. 내 잘못 맞고, 내가 가해자라고요.”

    “……후, 그럼 똑같이 잘못했다고 합시다. 원인 제공은 제가 했고, 마무리는 서의우 씨가 했습니다.”

    권재진은 서의우보다 변혁을 우선했고, 서의우는 권재진보다 치정을 우선했다.

    그랬기에 권재진은 서의우를 상처 입혔고, 서의우도 권재진을 상처 입혔다.

    서로 상대를 고통에 빠트린 셈이다. 똑같이.

    “맞아요. 내가 잘못했어요.”

    서의우가 서늘하게 혼잣말했다.

    “아까는 정말…… 더 크게 잘못할 수도 있었어요…….”

    만일 권재진이 계속 가이딩 하겠다고 고집했다면, 그랬다면 지금쯤 아마도…….

    서의우는 아직도 모순에 사로잡혀 있었다.

    서의우가 다시금 침묵에 빠졌다. 차가운 정적이 머물렀다.

    불온의 낌새를 읽은 권재진이 서의우를 멈춰 세웠다.

    “……그만, 이제 됐습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건 이쯤 합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톱니바퀴가 어긋났을 때, 잘못 맞춘 퍼즐 조각을 발견했을 때, 끊어진 매듭을 보았을 때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솔직히 서의우나 권재진 모두 한계였다.

    감정적으로 위태롭고, 그런 허점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 브레이크를 밟지 않을 수 없었다. 액셀만으로 계속 몰아치다가는 오해만 쌓이고 관계도 비틀릴 것 같았다.

    결국은 쌍으로 나란히 거꾸러져 추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소용돌이치는 현 상황은 잠시 제쳐 두고, 서의우와 권재진 둘에게 온전히 집중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예전처럼. 일상처럼.

    “우린 좀……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람 다.”

    복잡한 문제는 잠시 잊고, 그냥, 원래대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 말은, 의우야, 그…….”

    권재진이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이럴 때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사실은 대중이 없었다. 딱히 이렇다 싶은 타개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주변이 좋은 것도 아니고. 경험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어린 애인과 화해하는 방법…….

    뭐…… 뭐가 있더라…….

    남들은 어떻게 하더라…….

    “음.”

    가슴…….

    가슴 만질래……?

    는, 이미 실컷 만졌을 테고…….

    “눈…….”

    권재진이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눈알 핥을래……?”

    서의우는 조용했다.

    아무 반응 없는 그를 보고서 권재진이 이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아.”

    뭐가 있더라. 평소 서의우가 하고 싶다고 졸라 댔던 게.

    “발톱…… 깎아 줘도 됩니다.”

    “…….”

    “아기라고 불러도 됩니다. 오늘만.”

    “…….”

    “왜요. 다 마음에 안 내킵니까? 별론가…….”

    서의우는 여전히 조용했다.

    안면 근육에 미동 하나 없었다. 눈을 뜬 그대로 넋이 나가서 살아 있는 조각상처럼 권재진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단풍이 든 것처럼 그의 얼굴이 차츰 벌겋게 익어 갔다.

    미려한 눈가, 뺨, 그리고 귀 끝까지 분홍빛이 된 서의우가 입술을 뻐끔 벌렸다.

    “……뭐?”

    ***

    그 후. 권재진은 전등 나간 욕실에서 씻겨지며 눈알을 빨렸다.

    서의우는 못 말릴 새끼였다. 샴푸 칠 한 번 해 주고 눈알 핥고, 린스 칠 한 번 해 주고 눈알 핥고, 바디워시로 온몸 닦아 주면서 핥고 또 핥고. 보이는 것 하나 없는 칠흑 속 욕실에서 뒤엉켜 그러는데, 서의우는 오히려 안 보이는 상황이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서의우는 권재진의 발톱을 잘라 줘야 한다면서 발을 특히 공들여 씻겼다. 양쪽 발을 번갈아 가며 거품 칠하고 닦고, 어찌나 만져 대는지. 발바닥이고 발가락 사이 사이고 하도 주물럭대서 간지러웠다.

    이쯤 되자 깎을 발톱이 남아 있을지 모를 정도였다. 거품과 함께 다 씻겨 없어진 것 같았다.

    “서의우…… 그만해 이제.”

    “응? 응.”

    “대답만 응, 하지 말고 그만하라고.”

    “응…….”

    “물 낭비야. 수도세 아깝습니다.”

    “알았어. 보채지 말아요. 내 아기.”

    “너 진짜…….”

    “칭얼대는 재진 아기.”

    “……하.”

    “말랑 아기.”

    “…….”

    “애인 아기.”

    아오…… 이걸 씨.

    “애인 아기는 또 뭔…… 아니, 대답하지 마. 안 궁금합니다.”

    “그래요? 그럼, 안 궁금한 아기.”

    이…… 씨발…….

    권재진이 아주 작게 씨발, 하고 혼잣말했다. 그걸 또 들었는지 서의우가 웃었다.

    “씨발 아기? 하하, 귀여워……. 재진 씨 정말 귀여워요. 진짜 왜 이렇게 귀엽나요?”

    결국, 기다리다 못한 권재진이 서의우의 손에서 샤워기를 홱 뺏어 들었다.

    이 정도 씻었으면 됐다. 이제는 서의우가 발톱을 깎든 발톱을 먹든 상관없을 정도로 깨끗해졌다. 현재 지구상에서 권재진 발이 가장 깨끗할 것이다.

    권재진이 어둠 속에서 감으로 샤워기 물을 뿌려 발에 남은 거품을 씻어 냈다. 그러곤 하도 핥아져서 뻑뻑한 눈가도 물로 한번 씻어 냈다. 샤워기를 끄고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서의우가 한층 더 크게 웃으며 뒤따라붙었다.

    욕실에 그의 웃음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그 듣기 좋은 울림이나 허리에 감기는 팔뚝 등이 참 익숙해서 어둠으로 가려진 서의우의 표정이 일순 훤히 보이는 듯했다.

    아마도 권재진이 잘 알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둘의 일상처럼.

    “재진 씨 조심해요. 안 보이잖아요. 급하게 나가다 미끄러지면 어떡해.”

    서의우가 좋은 구실을 대며 권재진을 안고 나갔다.

    몸에 로션 발라 주고, 샤워 가운 입혀 주고, 젖은 머리도 타월로 말려 주고, 그런 뒤 서의우의 손에 손톱깎이가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깎을 순 없으니 장소를 옮겨야 했다.

    층계참. 햇볕이 내리쬐는 창가, 창턱에 앉아 서의우가 권재진의 손발톱을 하나씩 깎아 주었다.

    뚫린 벽으로 겨울바람이 새었다. 서늘한 바람 소리, 또각이는 손톱깎이 소리가 이중주를 이뤘다.

    폐허나 다름없는 저택에서 이러고 있는 게 참 인상적이긴 했다.

    주변은 전쟁터인데 어울리지 않게 두 사람만 평화롭다.

    서의우가 무릎에 올린 권재진의 발을 다정하게 붙들고서 공들여 모양을 냈다. 네모반듯하면서도 모서리는 동그랗게. 살점은 조금도 집지 않고 발톱만 세심하게 자르는 작업은 꽤 집중을 요했고, 서의우는 그걸 즐겼다.

    권재진에게 집중하는 자체가 서의우에겐 즐거움이었다.

    “……서의우 너는, 이런 걸 왜 좋아하는 겁니까.”

    “이런 거라뇨. 재진 씨인데.”

    서의우가 매끈하게 잘린 발톱을 엄지로 살살 훑었다.

    “요리가 재밌는 이유랑 똑같아요. 내가 재진 씨에게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개입한다고?”

    “내가 자른 모양 그대로 재진 씨 몸에 흔적 남는 거요. 내 흔적이 양손 양발 각각 다섯 개씩이나, 권재진 몸에 24시 내내 붙어 있는 거잖아요.”

    “아니, 어차피 다시 자라는 건데. 이해가 안 됩니다.”

    “자라는 것도 좋아요. 내가 또 깎아 줄 수 있으니까. 지속 가능하죠.”

    “……더 모르겠습니다.”

    이유를 들은 후에도 공감하기 어렵다. 이게 좋은…… 좋은가?

    서의우가 좋다니 그런가 보다 싶긴 하지만…… 역시 권재진은 모르겠다. 키스하는 게 훨씬 좋은데.

    권재진은 간지러운 발끝을 움찔거리며 괜스레 창문 밖 정원이나 내다보았다.

    바람은 차지만 햇빛은 환했고,

    서의우는 애 같고, 개 같고, 귀여웠다.

    ‘하…….’

    재진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이렇게 시시콜콜한 대화로 한가롭게 하루를 끝마칠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지금쯤이면 상부에 보고 올라갔을 테지.’

    권재진의 등급 테스트 결과, 가이딩 의향, 그리고 서의우가 권재진을 데리고 좌표 이동으로 사라진 사실까지도.

    무엇 하나 빠짐없이 보고됐을 터였다.

    <점막 접촉 아닌 피부 접촉. 손을 잠깐 잡는 정도라면 가이딩 해 볼 의향 있습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권재진의 입으로 직접 밝혔던 의사다. 센터 측에서 저 말을 어찌 받아들였을지, 어떤 대응을 해 올지,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생각에 빠져드는 그때, 호출음이 울렸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알림. 무척 오랜만에 듣는 듯한 그 소리가 두 사람의 짧은 평온을 깨트렸다.

    재진이 퍼뜩 고개를 들었고, 서의우의 투명한 회색 눈동자와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긴급 호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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