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108)화 (108/154)
  • #108

    권재진이 서의우의 곁에 서며 최 대장과 대치했다.

    “……아니, 경계경보를 울릴 생각이라면 이미 했을 겁니다.”

    공격할 심산이었다면 처음부터 기습을 택했을 터.

    최 대장은 굳이 홀로그램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서의우와 권재진에게 말을 걸었다. 심지어 정식으로 소개까지 했다.

    얕보는 걸까?

    아니다.

    달리 바라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젊은이들. 난 혈전을 벌일 생각 없네. 장성들이 모조리 인질로 잡힌 이런 상황에선 더욱.”

    “…….”

    “저치들이 아무리 징글징글해도, 짜내면 아직 써먹을 구석들이 있어. 치약 같은 거지. 죽염. 다 쓰이지도 못했는데 벌써 황천길을 건너게 하면 쓰나…….”

    최 대장이 혼자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스피커를 통해 나온 그의 웃음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이상하게 긴장이 고조되었다. 최 대장은 평범하게 농담하며 웃고 떠들고 있는데, 그런 노련함에 오히려 방심해선 안 된다는 경각심이 일었다.

    “젊은 친구들이 딱딱하군. 그래, 진지한 얘기를 해 보자면…… 조금 전, 오 준장이 보고 마쳤다네. 서 대위가 단신의 힘으로 포위망을 뚫고 특임부대원들을 일시에 제압했다지? 북서부 협곡의 지형을 날려 버린 것도 서 대위 작품일 테고, 북 방위 내경계벽을 헐어 버린 것도 서 대위 작품일 테야…….”

    “재진 씨.”

    “보고받을 때만 해도 황당무계하다고 여겼건만, 지금 상황을 보니 틀림없어 보이는군. 서 대위가 다 죽자고 달려들면 지금 센터 내부 가용 인원이 사분지 일, 오분지 일은 없어질 것 아닌가. 피차 최악은 피해야지.”

    경계경보를 울리고 총력전을 벌인다면 장기적으론 센터 측이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S급 에스퍼와 S급 돌연변이 가이드 단둘을 잡자고 정식 각성자들과 군수품을 무한정 소모할 순 없었다. 그야 물론, 전폭기에 미사일까지 동원하면 서의우라도 제거할 수는 있을 터다. 문제는 그 책임을 고스란히 최 대장이 짊어져야만 한다는 데 있었다.

    “지금 자네 둘 때문에 내 모가지가 간당간당하게 생겼어.”

    이미 내경계벽이 무너진 상태다. 만일 붙잡힌 장성들이 모조리 죽고 센터까지 무너진다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최율 대장의 경력에 크나큰 오점이 남고 자진사퇴로 마무리 지어질 터다.

    개싸움으로 이어지면, 피차 말미가 더럽다.

    “뭡니까. 그럼 협상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그래, 협상이네.”

    “…….”

    “의외라는 표정이군. 몰랐나? 정치는 원래 이렇게 돌아간다네.”

    정치?

    정치라고……?

    권재진이 비릿하게 냉소 지었다. 최 대장은 새파랗게 젊은 두 사람에게 선심이라도 쓰듯 먼저 협상안을 제시했다.

    “그간 서 대위가 저지른 범법행위는 전부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네. 그리고 권재진은 돌연변이이나 최초의 S급 가이드라는 특례를 인정하여 사면토록 하지.”

    “…….”

    “보고에 따르면 S급 가이드의 가이딩은 에스퍼의 이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더군. 지금 서 대위의 이능력을 보니 틀림없는 듯하고. 어떤가.”

    ……이능의 향상?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서의우는 본디 타고난 이능을 사용하지 않고서 억눌러 두었던 것뿐이다. 권재진의 가이딩을 받아 향상된 게 아니다. 센터 측에서 단단히 착각하고 오해한 것 같다.

    그렇지만 어차피 지금 중요한 논지는 권재진의 가이딩이 얼마나 특별하고 대단한지가 아니었다.

    “센터에 들어오게나. 정식 각성자로서. 그렇게 한다면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하겠네. 정식으로 등급 테스트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여타 각성자들처럼 교육훈련관에서 기본적인 교련을 받을 수 있도록 편의를 도모해 주겠네.”

    “…….”

    “그렇대도 돌연변이로서 위화감을 조성하며 다른 각성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소지가 있으니, 비밀 유지 서약은 필히 맺어야 할 것이야. 일반 사회에서 겪은 일은 일절 입 밖에 내선 안 되네.”

    위험한 이능을 사방으로 내뿜고 있던 서의우가 낮고 섬찟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듣지 말아요. 저런 협상 받아들일 필요 없어.”

    위협적인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목소리였다.

    “당장은 회유해 놓고 나중에 틈을 타서 재진 씨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요. 나도 물론 마찬가지일 테고.”

    “……예, 그렇겠죠.”

    권재진도 같은 생각이었다.

    방심시켜 놓고 불시에 죽여 버리거나, 아니면 살려서 해부하거나, 기억을 지워서 다루기 쉽게 만들 수도 있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거참. 그토록 불신할 필요 없네. 이는 서로에게 칼을 들이밀지 말자는 협상일 뿐이라네. 제 살 깎아 먹지 말자는 뜻이지. 자네들이 국가에 협조하는 한, 자네들을 내칠 이유가 없어. 이만한 자질을 선보인 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를 처분하기엔 사실 아깝지…….”

    “아깝다……?”

    듣다 못한 권재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니 잠자코 있는 편이 이성적인 판단일 테지만, 저런 말까지 듣고서는 도저히 입 다물고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럼, 군부에서는 여태껏 그런 얄팍한 논리로 돌연변이들을 처분해 왔던 겁니까?”

    4년에 걸친 숙원이 말로써 뱉어졌다.

    머리통이 뜨거우니 떨리는 목소리가 나올 줄 알았건만, 권재진의 음성은 서릿발처럼 싸늘했다. 오히려 핵심을 찌르는 듯 한없이 냉정했고, 흔들림 없이 또렷하게 들렸다.

    “위화감을 조성하고 쓸모가 없어서 다 사살했다고……?”

    권재진은 내심, 불가피한 이유라도 숨겨져 있는가 싶었다.

    돌연변이를 죽일 수밖에 없는 어떤 비밀스러운 딜레마가 있어서, 수뇌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잔혹한 시스템을 유지해 왔을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협상, 정치, 그리고 아깝니 마니 하는 저울질…….

    돌연변이의 목숨은 고작 저런 것에 좌우되는 문젯거리였다. 이제껏 권재진이 죽어 마땅한 취급을 받고, 4년간 마음 편히 햇빛 아래 한 번 나와 보지 못하고 갇혀 살았던 인생이, 고작 저딴 것에 좌우되고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요. 저 같은 S급 돌연변이 가이드는 죽이기 아까워 보이니 살려 놓고, 다른 돌연변이는…… 다 어쩔 생각입니까. 지금껏 그래 왔듯 발현하는 족족 죽일 겁니까? 그리고 그 행태를 저더러 모른 척 덮고 넘어가라고, 그런 협상을 하는 겁니까?”

    최율 대장은 권재진에게 합리적인 제안을 해 준다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실상 그의 말은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돌연변이는 다 죽일 거지만 잘난 너 혼자만 특별히 살려 주겠다는 뜻일 뿐이다.

    권재진이 맹점을 지적해 오자, 최 대장이 또 눈썹을 쓱 올리며 여유롭게 웃었다.

    “그런 비난 하지 말게. 가이딩을 해 봤다면 알 것 아닌가……. 일반인 출신인 돌연변이들이 각성자식 가이딩을 어찌 받아들일지. 끔찍하다고 여기겠지. 거부할 테고. 자네도 몸소 겪었을 터인데.”

    “예, 겪었습니다. 그렇기에 문제가 있는 줄 잘 압니다.”

    그야 물론.

    효율 중시의 가이딩. 참혹할 정도로 경험해 봤다.

    “돌연변이를 사살할 게 아니라, 각성자식 가이딩을 바꾸면 될 일입니다. 점막 접촉 아닌 피부 접촉만으로 가이딩은 이뤄집니다. 손만 잡더라도 될 것을…….”

    “효율이 다르지.”

    최 대장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생사가 걸린 전장일세. 그런 허술하고 무른 방식으론 안 돼. 자네도 각성자가 되면 이해할 것이라네.”

    “저는 이미 각성자입니다. 당신들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각성자일 뿐.”

    “…….”

    권재진의 강건한 검은 눈동자에 불이 붙었다. 그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야 최율 대장의 입가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들이켠 최 대장이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권재진. 자네의 안타까운 사정은 이해하겠다만, 우리는 쾌락 살인마가 아닐세. 무지하고 오만한 권력가도 아니고.”

    그의 푸른 홀로그램이 비지직거리며 뒤틀렸다.

    “우린 최선의 결단을 내렸을 뿐이라네. 한평생 사명을 담아서, 국가와 국민을 지켰어.”

    “뭐……?”

    “자네, 한 번이라도 어린아이의 시체를 본 적 있나? 각성자의 보호 없이 신생아와 유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들의 교육은? 전란의 시대에 무방비하게 휩쓸린 아이들이 성인으로 자랐을 때, 무리 없이 현대 사회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보나?”

    “…….”

    “일반 거주지구 출신이면 알 것 아닌가. 자네가 고등 교육을 받고, 직장을 갖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엄격한 통제하에 관리된 각성자들이 저 밖의 크리처와 싸우고 있기 때문이지. 자네의 그 이상적인 인간성은 우리의 보호 아래 자란 걸세.”

    “…….”

    “자네는 우리를 잔혹하다고 매도하고 싶겠지만, 그 잔혹한 짓을 누군가 하지 않았다면 이 사회가 어찌 됐을 것 같나? 각성자를 통제하고 관리하지 않았다면, 이들이 과연 인류를 지키는 무기가 되었겠나? 아니라면 인류를 위협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겠나? 엄정한 규율을 만들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각성자를 처분하는 건…… 절대다수의 인류를 지키기 위함일세.”

    인류의 존속. 인류의 평화. 인류의 미래.

    오직 그것만을 위해 쌓아 올린 비정한 체제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돌연변이의 목숨쯤은 아깝지도 않다.

    “우리는 안전하고 튼튼한 장벽을 세우는 것뿐이라네. 보호하기 위한 장벽이니 지켜야지.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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