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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109)화 (109/154)
  • #109

    조금 전보다 더욱 심하게, 최 대장의 형상을 재현한 홀로그램이 파지직거리며 튀었다. 서의우가 내뿜는 살벌한 이능 탓이었다.

    “재진 씨, 그만 됐어요. 말 섞지 말고 가요.”

    푸른 홀로그램 주변으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원격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최 대장이 실제로 여기 있었다면 심장 마비를 일으킬 법한 정도의 흉포한 이능이었다.

    “지금 즉시 장성들까지 전부 옭아매고 좌표 이동할게요.”

    서의우는 당연히도 협상안 따위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강경했고, 권재진을 어떤 위험에도 노출할 마음 없었다.

    “일단 자리를 피한 뒤에 안전한 곳에서 정신계 이능 사용해야겠어요. 그 후에 최율 대장마저 찾아내서 머리 뒤집어 버리면 끝날 일이에요. 쫓기고 싸우면서 하려면 꽤 위험하기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죠.”

    그 말에 여유 넘치던 최율 대장의 안색이 슬쩍 변했다. 옆집 아저씨 같던 태도가 사라지고 조금 굳은 낯으로 중얼거렸다.

    “서 대위. 정녕 그리하겠다는 건가. 끝을 보겠다고?”

    장성들을 전부 납치한다니…….

    생각해 보면 그냥 밑 빠진 허풍이나 허세로 들릴 따름이었다.

    아무리 서의우가 S급 에스퍼에, S급 가이딩을 받았다지만 장성들을 모조리 이끌고서 좌표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건 도가 지나치다. 게다가 저 모든 이들에게 정신계 이능을 사용한다는 건 더욱 어불성설이었다.

    당연히 블러핑이겠거니 싶지만, 아무래도 서의우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군 수뇌부의 최정점에 오른 최 대장의 육감이 미심쩍은 경고를 고하고 있었다. 지금은 논리보다 감을 믿어 보라고.

    “도대체…… 자네들이 원하는 게 뭔가. 돌연변이들의 목숨인가?”

    최 대장이 한발 물러섰다.

    하긴, 서의우가 허세를 부린 게 맞다고 해도, 장성들이 인질로 잡힌 마당에 섣불리 총력전을 벌일 순 없었다.

    “권재진 하나뿐 아니라 그들 모두를 살려 달라고…… 그걸 요구하는 것이야?”

    “원하는 건 단 하나입니다.”

    그에 재진이 단조롭게 대꾸했다.

    “변혁.”

    “……변혁?”

    협상도, 정치도, 저울질도 아니다.

    “체제 변혁.”

    이날, 권재진은 협상이 아닌 혁명을 하고자 온 것이었다.

    “재진 씨…….”

    “의우야, 알겠어. 잠깐만.”

    인내가 끝에 달한 서의우를 겨우 말려 놓고, 권재진이 빠듯하게 숨을 삼켰다.

    “최 대장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피 튀기는 전란의 시대에서 인류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더군요.”

    솔직히 반박할 수 없었다.

    빈틈없는 논리였다.

    권재진이 각성자의 보호 아래 자란 것도 맞고, 일반인으로서 인간성을 유지하며 26년을 살아올 수 있던 것도 잔인한 현 체제 덕분임이 맞다.

    그러나…….

    “……그런데, 그게 대체 언제 적 이야깁니까.”

    재진이 날 선 눈빛으로 서의우를 보았다. 그의 앳된 얼굴을 보고, 다시 최율 대장을 보았다. 주름 잡힌 장년의 얼굴이다.

    “최 대장님께서 그토록 인류의 앞날을 생각하고 계신다면 도리어 여쭙고 싶군요. 도대체 언제까지 기존 체제를 고수할 겁니까?”

    최초의 게이트 임팩트가 벌어진 건 어언 1세기 전이다.

    국가와 군부가 비정하고도 엄격한 통제를 토대로 여태껏 인류를 수호해 온 건 알겠다. 그로 인해 이전 같은 평화와 문명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도 잘 알겠다. 권재진도 그 수혜자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결국 지난 일일 뿐이었다.

    “옛 방식을 끝까지 고집할 거라면 가이딩 약물은 어째서 개발하는 겁니까. 힐링 팩터는 왜 만드는 겁니까. 크리처와 게이트 연구는 왜 계속합니까. 개척지구는 왜 자꾸 늘리는 겁니까?”

    심지어 저들은 S급 돌연변이 가이드인 권재진마저 생포해서 해부하려 했었다. S급 가이드를 연구하려고.

    “그건 다…… 발전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더 나아지기 위해서.”

    “…….”

    “그런 노력은 아낌없이 기울이면서, 돌연변이는 무작정 사살한다? 각성자는 무조건 통제한다? 안일한 대응이지 않습니까. 비겁한 변명입니다. 이중 잣대입니다!”

    고인 물은 언젠가 썩기 마련이었다.

    흐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역시 납득하지 못하겠습니다. 꼭 죽여 없애야 합니까? 열외라도 하면 되잖습니까. 돌연변이를 따로 나누어 교육하고 관리하면 됩니다. 정규 교육을 미수료한 어린 각성자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여 없앨 게 아니라 다른 기회를 주어야 마땅합니다.”

    까마득한 옛날, 신정부가 막 수립했을 시절의 군부에는 그런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만, 아무리 봐도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거주지구는 꾸준히 발전하고 있고, 개척지구도 쉼 없이 확장되고 있다. 특수 거주지구는 더 여유가 넘친다. 서의우만 해도 3천 평짜리 호화 저택에 혼자 살고 있다.

    이런 실정에 통제 불가능한 각성자는 전부 다 죽일 수밖에 없다고 해 봐야 헛웃음만 나온다.

    “당신들은…… 그저 두려운 겁니다. 변화하려면 지금껏 피를 묻혀 온 역사를 까발려야 할 테니까. 그럴 바에는 잠자코 했던 대로 유지하고 싶을 겁니다. 자신들은 절대 틀리지 않았으며,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것뿐이라고 자위하면서.”

    따져 보면 저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돌연변이 살처분, 정규 교육 미수료자 살처분, 정신계 이능의 존재, 핵의 존재, 힐링 팩터, 처참한 가이딩의 실태 등…….

    무엇 하나라도 특수 거주지구 경계벽을 넘어 일반 사회로 새어 나가면 정권이 뒤흔들릴 중대한 사안이다. 어쩌면 일반인 출신인 돌연변이를 살려 두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특수 거주지구에 은폐되어야 할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고작 4개월 전에 발현한 돌연변이라기엔 아는 것이 많군. 가이딩 약물, 힐링 팩터, 연구, 미수료자…… 서 대위가 가르쳐 주었나?”

    최율 대장이 위압적으로 중얼거렸다. 선심 쓰는 척, 여유로웠던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풍겼다. 딱딱하게 굳어 주름진 눈매와 어그러진 입만 보였다.

    이것이 그의 본모습 같았다. 게다가 홀로그램이 뒤틀리기까지 해서 상당히 기괴한 꼴이었다.

    “아, 예. 제가 4개월을 4년처럼 보내서 말입니다.”

    “허어, 그렇군.”

    권재진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고, 최 대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서의우고 권재진이고 아직 한참 젊어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면 손쉽게 회유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그렇지 않았다.

    서의우는 훈련받은 정규 각성자라곤 생각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리만치 상부에 적대적이고, 권재진은 불과 얼마 전까지 일반인이었던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도록 각성자 사회에 박식하고 냉철했다.

    최율 대장이 서의우와 권재진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어떻게 하더라도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모양이라면, 차라리 늦기 전에 결단을 내리는 편이…….

    그런 그때, 권재진이 한마디 덧붙였다.

    “크리처 웨이브도 알고 있습니다.”

    권재진의 입에서 ‘크리처 웨이브’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최 대장의 표정이 볼만하게 흐트러졌다. 눈알만 겨우 굴리고 있던 다른 장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걸 어찌?”

    극비 정보다.

    다른 건 서의우 대위가 가르쳐 주었다 해도, 크리처 웨이브만큼은 연구개발관에서부터 접근 제한 연구로 분류되어 극소수의 연구자만 알 수 있는 특수 등급 기밀이었다.

    정식 각성자인 서의우라고 해도 전투원은 결코 알 수 없는 정보고, 하물며 돌연변이인 권재진이 알고 있다는 건 불가능했다.

    “다른 협력자가 있었나. 연구개발관 연구자 중 누군가?”

    “곧, 크리처 웨이브가 발발할 겁니다.”

    권재진은 의심하는 최 대장에게 할 말만을 전해 주었다.

    “피해가 막심할 겁니다. 개척지구 셋과 일반 거주지구 하나가 폐쇄될 것이고, 사망자 수는 최 대장님의 임기 중 최고치를 찍을 겁니다. 또한 이 자리에 있는 장교들 중 절반이 책임을 지고 불명예 사퇴할 것이며, 최율 대장, 당신도 그중 한 명이 될 겁니다.”

    “뭐라……?”

    “최 대장님 후임으로 차기 중앙군사총장직에 오르는 건 국방부 차관인 변자성 의원입니다. 아, 아직은 차관이 아니던가? 그나저나 최 대장님 공식 은퇴사가 참 인상 깊더군요. ‘인간은 죽을지언정 인류는 죽지 않는다’였던가……. 혹시 좌우명이십니까?”

    차츰 장성들의 눈빛에 경악이 떠올랐다. ‘인간은 죽을지언정 인류는 죽지 않는다.’ 전략회의 때마다 내뱉어 온 최 대장의 입버릇이었다.

    이런 걸 돌연변이가 알고 있을 리가…….

    “먼저 협상을 원하셨으니 지금 협상안을 똑똑히 밝혀 드립니다. 우린 크리처 웨이브에 대비할 겁니다. 몰려드는 크리처와 싸우며 대대적인 군 체제 개편을 이룰 것입니다.”

    “…….”

    “시간이 얼마가 필요할지, 얼마만큼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방향성은 확고합니다. 앞으로 돌연변이는 죽지 않을 것이고, 가이딩은 인도적인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고, 원한다면 어느 거주지역이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바뀔 겁니다.”

    “…….”

    “그렇게 수십 년, 수백 년 흐르면 당신들 전부 과거의 인물이 될 것이고, 통제와 규율 그리고 격리 따위 과거의 유물이 될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협상이 되겠습니까?”

    궁금했다.

    군 수뇌부가 정말 인류를 위한 사명을 갖고 최선을 다했던 것뿐인지.

    “거절한다면 서의우가 여기 계신 장성분들을 다 데려가 정신계 이능으로 머리통을 헤집을 겁니다. 우리 입맛대로 사고를 조작해서 당신들이 여태 각성자들에게 해 온 그대로 당신들을 통제할 겁니다.”

    입장이 반대가 된다고 해도 떳떳할 수 있을지.

    “그리고 최율 대장, 당신은 우리를 피해 숨어야 할 겁니다. 언제 붙잡힐지 몰라 숨죽이고 지냈던 돌연변이의 고통을 당신도 겪어 보게 될 겁니다.”

    과연 최 대장이 뭐라고 대답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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