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99)화 (99/154)
  • #99

    “하하, 그러지 말고 반대로 해 버리는 게 어떨까요.”

    “반대로……?”

    “네, 반대로.”

    서의우가 낮게 웃으며 재진의 이마에 입술을 문질렀다. 애교스러운 동작에도 무게감이 느껴졌다.

    2회차 서의우는 풋풋하고 싱그럽다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급변한 만큼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미로는 1회차 서의우보다 더 음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재진 씨 머리를 내줄 게 아니라, 그들 머리를 장악해야죠. 십수 명쯤 될 테니 제대로 성공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

    “어차피 실패해도 상관없는 인간들이니까 몇 명쯤 뇌가 망가져 금치산자 되더라도 내 알 바 아니고.”

    “……그러니까 정신계 이능을 사용하겠다는 겁니까? 군 고위층 인사들에게?”

    권재진이 제법 오래전에 들었던 설명을 되새겨 보았다. 서의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정신계 이능이요. 생물의 뇌파에 간섭할 수 있어요. 숙련자는 개체의 사고, 행동, 오감 등을 조작할 수 있죠. 물론 기억을 읽거나 없애는 것도 가능해요.>

    <활용하려면 허가도 받아야 하고 여러 제약이 따르지만, 재진 씨를 숨겨두는 것부터가 범법행위인데 기억 좀 건드린다고 이보다 더 잘못될 건 없겠죠.>

    “네. 뇌를 진탕 쳐서 조작할 거예요.”

    조작.

    숙련자는 개체의 사고, 행동, 오감 등을 조작할 수 있다…….

    그게 정말로 가능한 건가? 실제로 할 수 있다고……?

    권재진이 퍼뜩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그게…… 됩니까? 정신계 이능 사용자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겁니까?”

    “아뇨, 보통은 안 되죠.”

    “예?”

    “정신계 이능은 원체 까다롭고 난해해요. 원래라면 엄중한 절차와 허가를 거쳐 조금씩 손봐야 하는 거예요. 커다란 수술처럼 오랜 시간 회복기를 가져 가며, 몇 차례씩 반복해야 해요. 적어도 10회 이상.”

    “…….”

    “게다가 조작이라곤 해도 절대적인 건 아니라서요. 무얼 해라, 무얼 하지 마라, 이런 단순한 것만 가능하고……. 하물며 A급 경호원을 줄줄 달고 다니는 장성급 장교의 뇌를 건드리는 건 일반적인 각성자라면 엄두 못 내요.”

    “아…….”

    “또, 재진 씨도 알다시피 정신계 이능을 사용하면 머리에 흔적이 남아요. 다른 누군가 들여다보면 바로 알아챌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서의우 씨는 하겠다는 거잖습니까. 할 수 있다고, 지금.”

    서의우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픽 웃었다.

    “네. 할 거예요. 여러 차례 갈 것도 없이 한 번에 몰아쳐서.”

    “…….”

    “어차피 우린 막다른 길인걸요.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설 생각도 없어. 게다가 이만큼 유효한 방법도 달리 없잖아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독재의 맹점이었다.

    견고하고 폐쇄적인 수직적 조직일수록 위를 장악해 버리면 어렵지 않게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으므로.

    만일 정말로 서의우가 장성급 장교들의 사고와 행동을 조작하는 데 성공한다면, 군부를 개혁하고 각성자와 돌연변이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도 허황한 바람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크리처 웨이브에도 미리 대응할 수 있을 테고.

    “마침 잘됐어요. 재진 씨가 알려 준 웨이브, 그게 딱 좋은 대의명분이 되어 주겠네요.”

    곧 닥쳐올 크리처 웨이브에 대항하기 위해 대대적인 체제 개편을 한다고 하면 그럴듯한 구실이 될 것이다.

    “……그렇습니까.”

    “네, 재진 씨.”

    “정말 하는 거군요.”

    “네.”

    “…….”

    “응, 우리가 하는 거예요.”

    “…….”

    돌이켜 보면, 어처구니없는 정도로 짧은 한때였다.

    봄이 오기도 전에, 반지를 걸어 보기도 전에, 둘뿐이었던 휴가가 막을 내렸다.

    이 잔악한 세상은 한시도 권재진을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다. 끝인가 싶으면 더한 구렁텅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고, 또 다른 시련이 줄지어 떠밀려 오는 것 같았다.

    서의우가 깊고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권재진을 응시했다. 재진이 숨을 쉴 때마다 그의 입가에 흩어지는 뽀얀 입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재진 씨, 지금 무슨 생각 해요?”

    무슨 생각……일까.

    머릿속에 분분히 흩어진 사고의 편린이 여럿이었다.

    꿈에서 보았던 우글거리는 크리처 무리. 불을 뿜는 총성. 제6 거주지구. 키 높은 대나무 숲. 어쩌면 서의우와 함께 살았을지 모를 작은 오두막. 폭발하던 저택과 연막탄. 아우성치던 각성자들. 서의우의 눈짓 한 번에 피를 뿜고 신음했던 그들. 고통. 위험. 위기. 몰살. 서의우. 그의 전지전능한 이능…….

    어느 순간, 가슴 속 밑창이 떨어진 것처럼 쿵 하고 내려앉았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잠에 취한 서의우가 떠오를 것 같았다. 므응거리고 잠꼬대하는, 분홍빛 강아지가 침대에서 데굴거릴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았다. 서의우는 여기에 있었고, 하물며 세상을 향해 엄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서의우 씨 생각합니다.”

    서의우가 사람을 죽이겠다, 죽이고 싶다, 말하는 것만 들어 보았지 실제로 그가 행동에 나서면 어떤 파급력이 있는지, 얼마나 위험한지 마음속 깊이 와닿지 않았다.

    서의우가 제아무리 대단한 S급 에스퍼고, 천재지변 같은 이능을 뿜어 대는 정신 나간 미친 새끼라고 해도 권재진에게는 결코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의우는 권재진을 죽일 수 없다.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권재진이 죽을까 봐 두려워 벌벌 떤다.

    그래서 현실감이 없었다.

    총으로 무장한 각성자들이 성냥개비처럼 쓸려 날아갔다. 전부 훈련받은 정예 특수부대 군인인데도 찍소리 내지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짓눌렸다. 몰랐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권재진은 마태오 소령이 늑대형 크리처 다섯을 노련하게 쏴 죽이는 모습을 이미 본 적 있었다. 비눗방울처럼 여러 빛깔로 빛나던 그의 보호막도 참 강했었다.

    그런데도 서의우에겐 죄다 장난 같았다. 권재진이 도중에 끼어들어 막지 않았더라면 서의우는 정말로 그들 모두의 핵을 깨부쉈을 터였다.

    하물며 서의우는 이제 권재진과 같은 목표를 정하기까지 했다.

    시스템의 개혁. 패러다임의 변화. 세상을 뒤엎고 운명을 뜯어고칠 것이다.

    “서의우라면 해내겠다는 생각.”

    별을 달고 있는 군 장성들. 원 스타. 투 스타. 쓰리 스타. 포 스타. 준장, 소장, 중장, 대장의 머리에 파고들어 그들의 뇌를 조작해 군 조직을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언뜻 보기엔 터무니없는 계획이지만, 서의우라면 해낼 것 같았다. 의심하기엔 그는 지나치게 대단했다.

    그래서 큰일이었다.

    권재진이 세상 밖에 나온 이상, 서의우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됐다.

    서의우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권재진뿐이고, 권재진이 서의우의 고삐를 잘못 틀어쥐면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지구가 멸망할지 모르겠다는 우려마저 들 정도였다.

    막말로 무슨 한물간 판타지 소설 같다. ‘내 S급 남자 친구는 서열 0위 세계 최강’ 뭐 그런 허무맹랑한 제목이 붙은…….

    “……이제야 실감 납니다. 제가 감당할 무게가. 중력이 세 배쯤 강해진 것 같습니다.”

    권재진이 서의우의 등을 그러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서의우가 권재진을 빈틈없이 꽉 껴안았다. 둘 다 실내복 차림이라 아무리 달라붙어 있어도 바닷바람에 한기를 느꼈다. 아직 한겨울이었다.

    “재진 씨, 떨고 있어요.”

    “약간…… 추워서.”

    “그럼 따뜻하게 해 줄게요.”

    “어?”

    “고개 들고, 나 봐요.”

    서의우가 거친 들숨을 짓씹듯이 삼켰다. 얼마간 권재진의 얼굴을 뜯어보던 그가 고개를 숙여 서로의 입술을 맞닿게 했다. 추위에 굳고 메마른 입술이 자연스레 겹쳤다.

    점막이 따뜻하게 젖을 때까지 느른하게 입 맞추던 서의우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혀 내밀어요.”

    “…….”

    재진이 검은 눈동자를 치떠 그를 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혀를 내었다. 앞니에 선홍빛 혀가 걸쳤다. 서의우는 그걸로는 안 된다는 듯 재차 종용했다.

    “더 내밀어.”

    “……더?”

    “더.”

    잠시 망설이던 권재진이 순순히 입을 열고 혓바닥을 내었다.

    새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핏기 가신 하얀 얼굴로부터 선홍빛 혀가 끄집어내졌다. 한 손으로 재진의 얼굴을 받친 서의우가 내어진 혀를 담뿍 빨았다. 타액이 농밀하게 섞이고, 숨결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까지 끊임없이 키스했다.

    혀 밑부분을 긁듯이 문질러 주자 입술이 가늘게 떨리며 눈이 절로 감겼다. 참지 못한 재진이 읏, 하는 비음을 흘렸다. 목을 뒤로 빼려 했는데, 서의우는 얼굴을 받친 손을 놔 주지 않았다.

    커다란 손바닥 안에 권재진의 머리통이 전부 들어가서 붙들린 기분이었다. 서의우가 키스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귓바퀴를 훑었다. 귓등에 따끈하게 열이 오를 때까지 지분거리다가, 예민한 귓구멍 앞쪽까지 파고들어 만졌다.

    “으, 음.”

    “흐…….”

    “응, 아…….”

    귀까지 건드리자 등줄기가 오싹했다. 슬슬 아랫배 쪽에 반응이 와서 재진이 고개를 비틀었다. 서의우가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달라붙는 건 익숙하고 또 당연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었다. 재진이 헐떡이며 그를 재차 밀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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