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98)화 (98/154)
  • #98

    “결국 크리처 때문입니다. 마물과 싸우고, 마물로부터 생존하고, 그 참혹한 짓을 1세기 동안 되풀이하다 보니 이따위 부당한 체제가 고착된 겁니다. 통제와 격리, 효율만 좇는 세상이 된 거라고.”

    기개 있는 목소리로 말을 뱉으면서도 세게 말아 쥔 재진의 주먹은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뒷덜미는 서늘했고 입 안은 칼날이라도 씹은 것처럼 비릿했다.

    “될지 안 될진 모르겠지만, 같이 뒤집어 봅시다. 이거.”

    “…….”

    “돌연변이라도 상관없이 살 수 있도록 전제를 엎어 버리자고요.”

    빙산처럼 큰 뜻을 품고 만 권재진을, 서의우가 그림처럼 멈춰 버린 눈으로 응시했다.

    별처럼 번뜩이는 저 검은 눈동자와 파리한 뺨, 메마른 듯한 입술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곤 어디론가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의우는 권재진에게 매몰되어 가고 있었다.

    하염없이 파고들어 빠져나올 수 없었다. 여태 그랬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서의우는 언제나 권재진에게 끌렸지만, 지금 이건 고작 끌리고 말고 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단단히 사로잡혔다. 혼에 상대가 아로새겨져, 두 번 다시 들어 낼 수 없도록 각인되어 가는 것 같았다.

    “서의우 씨도 아쉬워했잖습니까. 우리가 둘 다 정식 각성자였다면.”

    <하, 저희가 둘 다 각성자였다면 이런 일 없었겠죠. 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로 서로와 단일 매칭되어서, 어떤 새끼도 감히 끼어들 수 없게끔 굳건하게 그랬을 텐데…….>

    “차라리 다 일반인이었다면.”

    <아니, 차라리 저희가 둘 다 일반인이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일반인들 하는 연애, 그거 우리가 하고, 사귀고, 그랬겠죠. 굳건하게.>

    “평범하게. 누리고 살았을 거라고.”

    권재진이 한마디 내리눌러 뱉을 때마다 세찬 이능이 차츰 수그러들었다. 광풍의 방향이 뒤집혔다.

    권재진의 각성을 망막에 낱낱이 새겨 넣으며, 서의우가 섬찟하게 답했다.

    “……네, 맞아요.”

    그의 깊은 마음 안쪽 바닥에 진득한 것이 한 방울씩 떨어져 맹렬한 감정 아래에 고이기 시작했다. 연정과 욕정보다도 밀도가 높아 가라앉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만, 쉽사리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나는…… 나는 그래요.”

    서의우는 오래전부터 못 박아 소리쳐 두고 싶었다.

    권재진 서의우 거고, 권재진 서의우 가이드고, 권재진 서의우 애인이라고.

    “재진 씨와 굳건하길 원해. 우리 사이를 그 무엇도 침범하지 못하면 좋겠어요.”

    결의는 진즉 마련되어 있었다.

    각성자를 몰살하고, 다 버리고 도망가고, 그런 각오쯤 서의우에겐 우스웠다. 이젠 그 이상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러게요, 왜 이렇게 당연한 걸 깨닫지 못했을까요……? 이렇게 간단한 걸…….”

    서의우가 혼잣말하듯 나직하게 뇌까렸다. 둘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면 무엇이든 제거해 버릴 것처럼 냉혹하게 들렸다.

    군부를, 규율을, 상식을 전복하고 크리처를 없앤다. 그렇게 해서 권재진과 굳건해질 수 있다면 응당 그리할 것이다. 아예 권재진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낙원을 꾸려 줄 수도 있다. 이 세상이 그의 놀이터가 되도록.

    “나는, 난…… 다 뒤엎고 재진 씨와 살고 싶어요. 제대로.”

    “예, 저도 그렇습니다. 제대로…….”

    “……좋아요. 우리 그렇게 살아 봐요.”

    어느새 잠잠해진 이능이 실바람이 되어 재진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하얀 이마를 드러내고 머리칼이 흩날렸다. 서의우가 너른 팔을 벌려 권재진을 껴안았다.

    먼 밑바닥에 나자빠져 혼절해 있는 각성자들을 두고, 서의우와 권재진이 더욱 높이 날아올랐다. 구름 가까이 떠올라 장난감처럼 작아진 세상을 발아래 두고 올라섰다.

    “운명을, 뜯어고칠게요. 재진 씨를 위해서.”

    ***

    정든 저택은 반파되었고, 무장한 각성자들은 날파리처럼 찌그러졌다.

    서의우의 목에는 인식표가 없었고, 권재진의 왼손 약지에는 반지가 없었다.

    급작스럽고, 혼란스럽고, 무계획적이다.

    모든 게 꼬이고 뒤엉켜 부스러진 상황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내몰린 것처럼 한 치 앞을 짐작할 수 없었다. 여태 가로막힌 집 안에서만 갇혀 지내던 권재진이 하루아침에 온 세상을 넘보고 있으니. 솔직히는 당혹스럽고 얼떨떨했다. 현실감이 없어도 너무 없다. 이 상황 자체가 비현실이다. 그렇지만 이 길이 옳다는 확신 하나만은 뚜렷했다.

    “서의우 씨도 알다시피, 저는 회귀했습니다.”

    언젠가의 망망대해다.

    단둘뿐인 바다 위에 올라선 두 사람이 지평선을 함께 바라보며 신기루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재진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정확히 4년을 거슬러 왔습니다. 그 말은 제가 앞으로 벌어질 4년간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서의우의 저택에는 TV가 있고, 당연히도 뉴스가 나왔다.

    권재진은 집 밖으론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지만, 바깥세상의 일을 아예 모르고 지낸 건 아니었다. 오히려 굵직한 사건은 줄줄 꿰고 있는 수준이었다. 갇혀 지낼수록 그 부작용처럼 바깥일에 관심이 생기곤 했으니 말이다.

    물론 뉴스에 나온 정부 고위층 인사들 또한 잘 알고 있다. 군 관계자도 포함해서 전부.

    “그중에 군 장성들이 반절가량 갈려 나갔던 대사건이 있습니다. 줄줄이 불명예 퇴직 하고 인사 교체가 이뤄졌던 사건입니다.”

    연구개발관의 소수 연구진이 몇 년간 거듭했던 재난 경고를 무시한 결과,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다. 그해 피해가 대단했고, 개척지구 세 개와 일반 거주지구 하나를 폐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크리처 웨이브.”

    다른 말로는 몬스터 웨이브라 부른다.

    “일정 주기로 광포화한 마물이 날뛰는 현상입니다. 흔히 아는 β크리처뿐 아니라 게이트 내부에만 서식하는 오리지널 α크리처까지 밖으로 쏟아져 나와 인간을 습격하게 됩니다.”

    연구에 따르면 정확히 34년 하고도 2개월 주기로 일어난다고 한다. 최초의 게이트 임팩트가 터진 것이 1세기 전이니, 크리처 웨이브는 이제껏 두 차례밖에 벌어지지 않았다. 이번이 세 번째 웨이브다.

    “음…… 들어 본 적 없어요.”

    서의우가 느른하게 고갯짓했다. 권재진을 추적하던 각성자들을 전부 쓸어 버리고 무력화한 후인데도 그는 조금도 안심하지 못하고 재진을 단단히 품 속에 가두어 지키고 있었다.

    두 팔로 가슴을 강하게 옥죄고, 온몸을 방패처럼 바짝 붙여 덮었다. 그뿐만 아니라 투명한 보호막이 무엇도 뚫지 못할 벽처럼 견고하고 완벽하게 권재진을 감쌌다.

    그런데도 불안한지 서의우의 맥박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목덜미에는 핏대도 곤두서 있었다. 재진이 머뭇머뭇 성난 등을 다독였다.

    “지금은 군사 고위층에서 은폐하고 있으니 당연합니다. 당시에도 누구 하나 예측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대단한 참사가 벌어질 거라고는 전혀…….”

    실제로 크리처 웨이브가 발발한 후에야 세상이 들썩이게 되었다. 일반인 출신 연구자 몇이 언론에 진실을 폭로했고,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자 지지율을 신경 쓴 현 정부에서 군 고위층에 책임을 물었다. 결국 장성들이 줄줄이 갈려 나가게 되었지만…….

    ‘그래 봐야 죄다 한몫 단단히 챙겨 들고 퇴직해서 호화로운 여생들 보냈겠지.’

    아무튼, 중요한 사실은 조만간 웨이브가 벌어진다는 것이고 그걸 권재진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제 기억에 따르면 지금 군 고위층은 반으로 나뉘어 있을 겁니다. 웨이브를 간과하는 자들과 그래도 대비는 해 보자는 자들. 이렇게 두 세력으로요. 이 불화를 교묘히 비집어 들어가면 승산이 있을 겁니다.”

    웨이브에 대항하려면 통제 불가능한 각성자의 힘이라도 필요해질 것이다. 앞뒤 가릴 상황이 아니니, 돌연변이를 죽이기보다는 이용하려 하겠지. 권재진은 어찌 됐건 S급 가이드고, 서의우도 S급 에스퍼다. 둘의 협력이 필요할 것이다.

    “……글쎄요.”

    잠자코 말을 듣던 서의우가 엷게 미소 지었다. 허물을 한 꺼풀 벗은 듯한 미소였다. 어제보다 진중하고 심각해 보였다. 성숙한 것 같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론 위험하게도 느껴졌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서의우가 번뜩이는 눈초리로 권재진과 시선을 맞추었다. 쌍꺼풀 없는 기다란 눈매가 평소처럼 보기 좋게 휘어져 있었지만, 한눈에 변화를 눈치챌 수 있도록 이질적인 빛이 돌았다.

    영명하고, 집요하고, 잔인했다.

    마치 적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은 맹수의 눈 같았다.

    “누가 믿겠나요? 재진 씨가 회귀했고,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 어떻게 신뢰를 얻을 건데요. 나한테 했던 것처럼 머리와 기억을 내줄 건가요?”

    “아, 그…….”

    “안 돼요. 재진 씨가 하겠다고 해도 내가 용납 못 해요. 재진 씨 머리를 누구한테 맡겨. 그런 꼴 난 못 봐요.”

    “…….”

    “그리고 설령 윗선에서 크리처 웨이브를 믿어 준다고 해도 돌연변이까지 수용할지 어쩔지는 불명확하잖아요.”

    서의우가 단칼에 협상안을 거절했다. 권재진의 머리를 타인에게 내준다는 건 그에겐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크리처 웨이브가 일어나면 서의우가 타고난 본연의 힘은 대단한 전력이 될 것이다. 조금 전 각성자들을 화려하게 압살했으니 센터 측에서도 간과하진 못할 것이다. 유일하게 그를 가이딩 할 수 있는 권재진도 마찬가지고.

    “하하, 그러지 말고 반대로 해 버리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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