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97)화 (97/154)
  • #97

    서의우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아직 안 죽였어요. 하나도.”

    불모지처럼 삭막한 음성과 함께 뿌려지는 이능이 터무니없이 섬뜩해서, 아무것도 아닌 평화적인 답변조차 위협적인 발언으로 들렸다. ‘안 죽였어요’가 ‘다 죽일게요’처럼 느껴졌다.

    “아직……?”

    “그럼 어떡하라고요. 이제 다 끝났는데.”

    서의우가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위압이 강해졌다. 지금 이 자리에 게이트라도 펼쳐진 것처럼 그를 중심점으로 웅대하고 사특한 힘이 모여들었다. 소용돌이치는 무형의 힘이 대기마저 압살했다. 회오리치는 태풍의 눈에서, 서의우가 둥그런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특임부대원들을 무자비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 힘으로 핵을 관통하면, 저들 모두 죽는다.

    한층 짙어진 살의에 무릎 꿇고 있던 각성자들의 눈앞이 너 나 할 것 없이 노래졌다. 이제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하나둘씩 게거품을 물고 혼절했고,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버티고 있는 건 A급 방어계 각성자인 마태오 소령과 마찬가지로 A급 강화계 각성자인 장태산 중령을 비롯한 소수뿐이었다.

    “살인하기 싫은 재진 씨 마음은 알겠지만, 방법이 없어요. 한 명도 살려 보내면 안 돼요. 놔주면 다시 추적당할 거에요.”

    “……서의우. 안 됩니다.”

    “재진 씨가 아니라 이번엔 내가, 나까지 추적당할 테죠. 보란 듯이 통제 불능한 에스퍼가 됐으니. 즉살처분이에요.”

    “…….”

    “도망치기로 했잖아요. 재진 씨랑 나, 다 버리고 우리 둘만 떠나서 숨어 살기로 했잖아요. 근데 이젠 그럴 수도 없다고…….”

    서의우가 피실피실 웃었다.

    냉랭한 회색 눈동자에 빛이 한 점도 들지 않았다. 그는 막다른 절벽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궁지에 빠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길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냥 처음부터 저걸 처리했어야 했어요.”

    서의우가 아직 버티고 있는 마태오 소령을 형형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머리를 뚫어 버릴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 눈길이 닿는 즉시 마 소령의 주변에 구 형태로 펼쳐진 보호막이 홱 찌그러졌다. 달걀 껍데기가 으스러지듯 볼록한 끝에서부터 형태가 깨져 갔다.

    “그랬다면 한 명으로 해결될 일이었는데…….”

    무너져 가는 보호막과 함께 마 소령이 땅에 내리꽂혔다. 바닥이 움푹하게 파이면서 쏟아지는 힘이 거세졌다. 마 소령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크흑!”

    그가 필사적으로 이능을 끌어 올려 보호막을 유지했다. 사력을 다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아는 듯했다.

    “그만해! 정말 숨을 끊을 작정입니까?”

    권재진이 서의우의 팔을 힘껏 잡아당겨 자신을 보게 했다. 서의우가 사납게 으르렁댔다. 씹어 삼킬 기세였다.

    “그럼, 그러지 않으면?”

    요동치는 이능의 여파에 얼마 남지 않았던 보호, 강화계 각성자들마저 버티지 못하고 눈과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며 기절했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자가 없었다.

    “지난번과는 사정이 달라요. 그때는 죽이고 싶다는 거였지만, 지금은 죽여야만 하는 거잖아요.”

    서의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살인 외의 다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죽여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권재진이 각성자를 몰살하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없다고 말했기에, 고작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가까스로 살심을 억누르고 있기는 하다만, 그조차 곧 허물어져 버릴 것 같았다.

    다 죽이고 떠나지 않으면, 권재진이 거부할 줄 알더라도 억지로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위험했다.

    권재진뿐 아니라 서의우까지도.

    지금 이자들을 여기서 살려 보낸다면, 제6 거주지구는커녕 일반 거주지구 어디로 달아나든 추적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개척지구로 달아나더라도 사정은 비슷할 터다.

    떠나려면 아예, 인류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미개척지구로, 크리처들의 권역인 황폐한 땅으로 가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돌연변이 한 명 생포하는 문제였던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S급 에스퍼인 서의우가 반동분자임이 밝혀졌고, 심지어 서의우는 심연 안에 감춰 둔 본연의 힘까지 다 꺼내 보인 마당이다.

    감춘 패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추적당한다면, 총력전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서의우가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그는 아직 불균형을 모두 해소하지도 못한 처지이다. 게다가 그에게도 약점은 있다. 핵이 부서지면 끝난다.

    “미안한데, 억지로라도 해야겠어요, 난.”

    눈을 내리깐 서의우가 흩뿌려 둔 자신의 이능을 움직였다.

    일촉즉발의 상황, 명백해진 살기를 내뿜는 서의우에 맞서 권재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천천히, 그리고 결연하게.

    “……아니,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어때요. 아직도 도망칠 생각인가요?>

    <끝끝내 도망치는 길을 택할 거예요?>

    올곧은 검은 눈동자가 앞길을 바로 직시했다. 권재진에게서는 불꽃의 향기가 풍겼다.

    “죽이지 않아도 되고, 도망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 말고.”

    “그것 말고……?”

    몰살하거나, 도망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러지 않더라도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있었다.

    유일하고, 완전한, 결말로 향하는 단 하나의 길이.

    “예, 그것 말고.”

    권재진이 고된 신음을 뱉으며 끄덕였다. 하늘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거듭 난관에 내몰린 상황이지만, 그렇다 해도 아직 답은 있었다.

    권재진의 무의식이 여러 차례 지적해 온 또 다른 길이 있다.

    따지자면, 저런 선택은 최선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차선이다.

    비유하자면 노멀 엔딩. 이걸로는 트루 엔딩을 맞이할 수 없다.

    진정한 해피 엔딩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권재진이 목을 쥐어 짜내며 고생스럽게 말을 이었다. 가슴이 뜨거웠고, 또다시 총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서의우 씨가 말했잖습니까. 우리는 뭐든 제대로 해야 한다고. 분명 그랬잖습니까.”

    <그래. 재진 씨랑 나랑은 뭐든 제대로 해야 해요.>

    <내 말 알겠어요? 우리는 죄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서의우와 권재진은, 두 사람은, 이제껏 그래 왔듯 제대로 해야 마땅했다.

    제대로 가이딩하고, 제대로 연애하고, 그리고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이제야 인생의 2막이 올라갔다. 권재진에게 주어진 2회차의 기회는 어중간한 길로 빠져 낭비하기엔 턱없이 아까웠다. 일말의 후회도 남길 수 없다. 고작 후회나 하자고 이 기적 같은 기회를 허비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사실은 다 알고 있잖아요. 재진 씨의 표적이 무엇인지. 총구를 어디에 겨누어야 하는지.>

    <권재진이 새로운 인생을 살려면, 진정 무얼 해야 하는지…….>

    이 기로에서 실수할 순 없었다.

    권재진은 제대로 된 선택을 내릴 것이다.

    죽이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결국은 임시변통일 뿐. 근본은 하나도 바뀌지 않는다.

    잔혹한 사회.

    비틀린 체제.

    통제당하는 각성자와 무고하게 사살당하는 돌연변이.

    “그러니까, 제대로 해 버리면 되는 겁니다…….”

    권재진이 소리 높여 목청을 틔우며, 쓰러진 한 무더기의 각성자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들은 죽여야 하는 적이 아니었다.

    권재진의 총구가 향해야 할 곳은 따로 있었다.

    “저런 각성자들 말고, 보다 거대한 해악에 제대로 맞서 보자고요.”

    각오를 다진 눈빛이 파르라니 빛났다.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문제의 근원은 비정한 시스템이고, 그 시스템의 무비판적인 답습에 있음을. 패러다임의 개혁과 사상의 변화가 무엇보다 필요한 줄 알면서도 그것을 감히 실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권재진은 일반인도 각성자도 아닌 반쪽짜리에, 위태로운 혼종, 죽어 마땅한 돌연변이였으니까.

    이제껏 권재진은 자기 앞가림만 하기도 벅찼다.

    죽고자 했고, 죽지 못했고, 그런 채로 살아 있었다.

    제대로 된 인생을 설계할 그런 정신머리가 남아 있을 리 없고, 서의우의 곁에서 그와 평생을 함께 살아갈 결심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런데, 서의우가 빛을 밝혀 주었다.

    2회차 서의우는 권재진에게 새 삶을 주었고,

    1회차 서의우는 권재진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2회차 서의우는 권재진을 밝은 곳으로 이끌었고, 1회차 서의우는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재진을 비춘 빛이 더욱 밝아 보일 수 있도록 대척점이 되어 주었다. 양과 음, 빛과 어둠, 낮과 밤처럼.

    서의우가 바로 권재진의 구원이었다.

    “의우야, 서의우.”

    권재진이 두 팔을 뻗어 그 자신의 구원을 붙들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권재진을 추적해 온 각성자들이 모두 쓰러진 땅 위에서, 서의우의 회색 눈동자에 호소했다. 태풍처럼 소용돌이치는 이능에 서로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사방천지로 휘날렸다.

    “사실은 다 버리고 도망치는 것도, 숨어 지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평생 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재진 씨…….”

    “저들을 죽이더라도 똑같습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모면해 가며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불안하고, 환멸 나고, 그러는 이유가 다 뭐 때문인데…….”

    각성자들을 죽일 게 아니라, 각성자들을 깨우치게 만들어야 한다.

    제6 거주지구로 도망칠 게 아니라, 언제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경계벽을 허물어야 한다.

    통제 불가능한 각성자들과 통제 불가능한 돌연변이를 살처분할 게 아니라, 통제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타파해야 한다.

    권재진은 총을 쏘고 싶었다. 세상을 향해서.

    그리고 이 세상을 지옥으로 전락시킨 마물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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