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80)화 (80/154)
  • #80

    “좌표 이동으로 앞질러 가겠습니다. 대원들보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쯧. 쓸데없이 이능을 낭비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문제없습니다. 어차피 이번 임무는 단순한 크리처 잔당 토벌 아닙니까.”

    -알겠다. 그럼 징계는 면해 주도록 하지. 먼저 도착해 수색부대와 공조하도록.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장 중령님.”

    가만, 수색부대와 공조라…….

    서의우가 지도 속 지명을 다시금 확인했다.

    특수 거주지구 북서부. 익숙한 장소였다.

    권재진을 잃을 뻔했던 바로 그 협곡이다. 서의우의 눈빛이 돌변했다. 겨우 가라앉혀 둔 배 속이 다시금 보란 듯이 뒤집혔다.

    어쩐지 오늘 하달받은 임무의 난도가 턱없이 낮다 했더니만, 이런 불유쾌한 반전이 숨어 있을 줄이야.

    -현장에 마태오 소령이 총괄 지휘 하고 있을 것이다. 서 대위도 알고 있을 테지? S급 돌연변이 가이드를 색출해 낸다고 하더군.

    이곳이 좌표이동실이라 다행이었다. 장태산 중령의 앞이었다면 순간 섬뜩하게 굳어 버린 표정을 내비쳤을 테므로. 서의우가 느른하게 입술을 끌어 올려 안면을 정돈했다.

    “……아. 예.”

    -그래. 너도나도 떠들어 대는데 모를 리 없겠지.

    “…….”

    -서 대위. 무슨 문제 있나?

    “아닙니다, 중령님. 통신이 다소 고르지 못했습니다.”

    실로 다행스럽게도, 서의우는 거짓말에 이골이 나 있었다.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꾸며 내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아왔다.

    훈련 교육생 시절부터 남들처럼 먹고 자는 척했고, 제대로 된 가이딩 없이도 이능 사용에 영향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심연에 억누른 본연의 권능 또한 완벽히 감춰 왔다. 그때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방도가 없어 거짓을 일삼았던 것뿐이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바로 지금 순간을 위한 삶이었나 싶다.

    서의우는 품 속에 권재진을 감춰 놓고도,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것처럼 보여야 했다. 하여 태연한 목소리를 꾸며 내어 철저하게 답했다.

    “그럼 먼저 도착하여 마태오 소령의 수색 부대와 공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즉시 좌표 이동 하겠습니다.”

    -아니, 잠깐. 추가 지시 사항이 있다.

    “예. 말씀하십시오, 장 중령님.”

    -서 대위가 찾도록 하지.

    “잘 못 들었습니다?”

    -서 대위, 진급 욕심이 있지 않았나? S급 돌연변이 가이드를 찾아내는 공적을 세우면 소령이 되겠지.

    최정예 부대, 제1 특임부대를 이끄는 베테랑 지휘관 장태산 중령이 묵직한 음성로 명령을 내렸다. 서의우는 동요 없이 대꾸하면서도 속으론 송수신기를 잡아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중령님답지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돌연변이 색출은 수색부대의 관할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장태산 중령마저 이번 일에 주목하고 있다니. 이자는 군의 중추에 선 남자였다. 장성으로 진급할 기회가 여럿 있었으면서도 본인 희망으로 현장직에 남아 있는 맹장이다.

    -수색부대는 돌연변이 생포가 최우선 사항이다. 붙잡아 연구개발관으로 신병을 넘겨 생체 실험 한다고 하더군. 그러나 차선으로 사살 허가도 떨어졌다.

    “…….”

    -생포는 추적계 이능을 앞지를 수 없겠다만, 사살이라면 서 대위 실력을 따를 자 없겠지. 시신만 확인되어도 충분해. 서 대위가 돌연변이의 시신을 가지고 복귀한다 한들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다.

    “…….”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말뜻을 알겠나?

    장 중령이 거듭 반복하여 같은 명령을 지시했다.

    -이제는 위쪽으로 올라설 때가 됐다. 서의우 대위. S급 돌연변이 가이드 권재진의 시신을 가져오도록.

    “……중령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삑.

    통신이 무참히 끊어졌다.

    서의우는 좌표 이동 호환 완료 표시가 떠오른 원반을 냉랭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발이 닿은 자리의 금속이 움푹하게 파였다. 심연 아래 가라앉힌 이능이 난폭하게 날뛰며 멋대로 튀어나오려 했다.

    서의우는 포악스럽게 이능을 조절해 억누르며 손 갈퀴로 가슴을 긁었다. 폐가 답답했다. 가슴에 쇠말뚝이 여럿 내리꽂힌 것 같았다. 자제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줄 알면서도, 서의우의 발밑을 중심으로 거센 힘이 번개처럼 뻗쳐 나갔다. 빠른 진동이 울리고 쿵, 하는 소음이 바닥 아래서 들려왔다.

    “하아, 후…….”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다. 차갑게 눈가를 일그러트린 서의우가 스스로 가슴을 내리쳤다. 주먹을 쥐어 심장을 때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장갑 낀 손으로 자신의 목을 직접 쥐어 졸랐다. 호흡이 막혀 정신이 흐려질 정도가 되자 간신히 흩어진 이능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마태오 소령이 이끄는 수색부대와 공조해야 하는 개 같은 상황에 이어, 장태산 중령은 서의우더러 권재진을 죽이고 시신을 가져와 진급하라는 무참한 지시나 내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이니 아무리 서의우가 거짓에 능숙하다 해도 미소 띤 표정을 짓긴 어려웠다.

    “윽.”

    뜬금없지만, 권재진이 왜 자해했는지 알 것 같았다.

    혀라도 깨물어 보면 고통으로 괴로움이 약간이나마 덮일 것 같았다. 물론, 서의우는 전투원 생활이 길어 원체 고통에 무뎌져 있으니 고작 혀토막 좀 뜯는 정도로는 아무 감흥이 없을 터였다. 제대로 자해하려면 허벅다리에 총을 쏘거나 칼로 배를 후벼 쑤시는 정도는 해야 하려나 싶다.

    문제는, 서의우가 그런 정신 나간 충동조차 참아 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지금 서의우가 이상 행동 하면 괜한 의심만 얻을 뿐이다. 권재진을 더한 위험에 내몰 순 없었다.

    서의우는 긴 숨을 내뱉으며 냉정을 되찾았다. 권재진이 정말 보고 싶었다. 잘 있는지, 무사한지, 괜찮은지, 생사가 궁금했다.

    서의우는 고글로 재진에게 안부 문자를 수십 개쯤 수두룩하게 보내 놓고서, 곧바로 좌표 이동을 실행했다. 미적거리다 너무 늦게 도착하면 또 문제가 될 터였다.

    눈부신 하얀빛이 확산하며 또다시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협곡에 간이 설치 된 비행선 형태의 좌표이동실이다.

    서의우가 멸균소독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산등성이 아래 대기 중인 수색부대원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을 등지고 서 있는 지휘관이 눈에 띄었다.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 이마를 드러낸 군견 같은 남자. 마태오 소령이었다.

    권재진의 혀와 입술, 가슴을 만졌던 손을 불로 지지고 갈기갈기 찢어서 짐승 먹이로 줘 버려도 시원치 않을 마태오다. 저자와 이렇게 빨리 얼굴을 맞댈 일이 생길 줄이야.

    “제1 특임부대 소속 서의우 대위입니다. 크리처 토벌 임무를 지시받았습니다.”

    ***

    자정을 훌쩍 넘겨서도 서의우는 귀가하지 않았다. 권재진은 새벽 2시가 지날 무렵까지 서의우를 기다리며 운동하고, 밥해 먹고, 사격 연습 하고, 뉴스 보다가 결국 먼저 침대에 누웠다. 그가 오면 연애가 뭔지, 권재진이 그와 소소하게 무얼 하고 싶은 건지 직접 말해 주고 싶었다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재진이 피곤한 눈을 비비며 태블릿으로 서의우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서의우는 앵무새가 따로 없었다. 안부 묻는 기계도 아니고 계속 ‘재진 씨 보고 싶어요.’, ‘재진 씨 뭐 해요?’, ‘재진 씨 잘 있어요?’ 하는 똑같은 내용의 문자를 쉼 없이 전송해 왔다.

    권재진은 어떤 문자에는 답장을 해 주고 어떤 문자에는 점을 찍어 보내며 고단하게 하품했다. 잠들기 직전까지는 가능한 연락에 응해 줄 생각이었다.

    [재진 씨]

    [.]

    [재진 씨?]

    [.]

    [재진 씨 잘 있는 거 맞죠? 지금 보고 싶어요]

    [.]

    [재진 씨랑 연애하고 싶어.. 제대로 연애하고 싶어요]

    [.,]

    연신 점을 찍어 보내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눈이 꿈뻑꿈뻑 감겼다. 물리칠 수 없는 수마가 몰려왔다. 그렇대도 아무 말 없이 그냥 잠들어 버렸다간 서의우가 또 지나치게 불안해하며 걱정할 것 같았다.

    권재진은 거의 눈을 감다시피 하고서 태블릿에 문자를 입력했다.

    [졸ㄹㅕ 잠들거 가틉니다]

    [응? 자요?]

    [점 없어시졈ㄴ 잠든 겁니ᅟᅡᆮ]

    [??]

    서의우가 난리가 났다. 문자가 연이어 쏟아졌다.

    [재진 씨 자요?]

    [진짜 자?]

    [안돼 싫어요 조금만 더 답장해줘요]

    [재진씨 조금만요]

    [나 금방 집 갈게요잠깐마ㄴ 기다려요]

    임무 중이면서 뭘 어떻게 온다는 건지 모르겠다. 또 무단 이탈 징계라도 받으려 그러나……. 사실은 서의우가 이렇게까지 걱정할 이유가 없다. 집 안 보안 시스템도 무사히 가동 중이고. 무슨 일이 생겨도 이번엔 곧장 알림이 갈 터였다.

    재진이 태블릿을 끌어안고 잠에 빠졌다. 서의우 없는 침대가 너무나도 넓었다. 허리를 단단히 옥죄는 팔뚝도 없어서 몸이 편안하긴 했지만 도리어 신경 쓰이고 불편했다.

    그렇게 얼마쯤 자고 있었을까. 인기척에 어렴풋이 정신이 깨어났다. 서의우가 돌아왔는지 침대 옆에서 익숙한 커다란 몸체가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일어나서 그를 반겨 주고 싶었지만 누운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실제로 서의우가 돌아온 건지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이건 서의우가 나오는 꿈일지도 몰랐다. 서의우가 하도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주문을 외니까 권재진도 그가 너무 보고 싶어져서 서의우의 꿈을 꾸는 걸지도 몰랐다. 우주 배경이 아닌 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목덜미 부근에서 서의우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제야 비로소 꿈은 아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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