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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70)화 (70/154)
  • #70

    지금 이 상황이 참 어처구니없었다.

    서의우 본인은 게이트에 들어가 크리처와 생사를 건 전투를 벌이고 있으면서, 보안 시스템 및 보안 시스템 백업 시스템까지 이중으로 확실하게 깔린 새로운 거처에서 한가하게 양치질이나 하는 권재진을 걱정하다니.

    본말전도 아닌가.

    서의우는 진정한 사선에 서 있었다.

    막말로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다.

    전투에 온전히 집중하더라도 팔이 날아가고 다리가 날아가고 온몸에 부상을 입는데, 문자질에 한눈팔다가 자칫하는 새 바로 끔찍한 참사가 벌어질지 몰랐다.

    이걸 서의우를 걱정하는 권재진이 이상하다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권재진을 걱정하는 서의우가 이상한 것인가?

    도통 상황이 비비 꼬여 버려서 모르겠다.

    [재진 씨 정말로 위험하단 말이에요. 윗선에서 수색부대를 꾸려놨어요.]

    [.]

    [마태오 그 새끼를 필두로 재진 씨 찾아내겠대요. 추적계 이능 에스퍼들 모아다가.]

    [.]

    [이런 소식 들리는데 내가 어떻게 재진 씨 안 걱정해요? 답장 바로바로 늦지 않게 해요 진짜. 안 하면 나 죄다 뒤엎어버리고 곧바로 집에 갈 테니 그런 줄 알아요.]

    [...]

    그래, 수색부대라…….

    추적계 이능이라니. 잘은 모르겠다만 그 말을 들으니 서의우가 걱정할 만한 상황인 것 같기는 했다. 그렇대도 서의우가 급박한 전투 중에 문자를 저토록 쉴 새 없이 미친 듯이 보내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고글 통해서 시선으로 텍스트를 타이핑하고 있는 거면, 크리처는 대체 언제 쳐다보고 언제 위험을 살피느냔 말이다.

    설마 지금 서의우는 크리처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감만으로 쏴 죽이고 있다는 건가? 그런 게 되나? 역시 위험천만하다.

    [재진 씨가 보고 싶어요. 나 너무 걱정돼서요. 이렇게까지 불안한 건 처음이에요.]

    [.]

    [땀이. 와.. 땀 엄청 쏟아져요..]

    [.]

    [재진 씨 처음 만났을 때요. 나 가이딩에 눈 돌았을 때 있죠? 그때도 재진 씨 두고 출근하면 보고 싶어 죽을 거 같았는데.. 지금은 그때랑 비교조차 못하게 피마르는것같아요 마태오그새끼재진씨가막았어도내가그날바로죽여버렸어야했는데]

    권재진은 연거푸 한숨을 삼키며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늘 그렇듯 벽면 선반에 여러 총기류가 각을 맞춰 일렬로 진열되어 있었다.

    재진은 늘어선 총을 하나씩 살펴보며 맹렬하게 쏟아지는 서의우의 연락에 착잡하게 답장을 입력해 보냈다.

    [서의우 씨 좀 진정하십시오. 저 멀쩡히 잘 있습니다.]

    [보고 싶어서요. 지금 너무 그래...]

    권재진은 총 몇 자루를 골라 손에 쥐어 보고, 들어도 보고, 총알을 장전해 보았다가 안전장치를 해제해 보기도 하는 등, 다루는 방법이 완전히 몸에 익도록 수없이 반복하여 연습했다. 그러면서도 서의우에게 꼬박꼬박 답장도 써 주었다.

    [퇴근 후에 실컷 보라고 했잖습니까. 그땐 안 말립니다.]

    [당연히 돌아가자마자 재진 씨 껴안고 딱 붙어있을 거예요.]

    [.]

    [어디도 안가. 안 떨어져.]

    [.]

    [싫다고 하지 마요. 그래도 놔줄 생각 전혀 없으니까.]

    [싫다고 안 합니다.]

    [정말이죠?]

    [.]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재진이 물끄러미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하나의 문장을 입력하고서는 잠시 멈추어 작성한 내용을 바라보았다.

    [무사히 돌아오면 서의우 씨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됩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약간의 고민이 됐다.

    하지만, 서의우를 저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만히 두다가는 서의우가 분리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조급해서 크게 다치거나 잘못될 것만 같았다. 찜찜한 걱정을 떨치지 못한 재진이 결국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약간의 텀을 두고 답장이 왔다.

    [다?]

    재진은 선행 조건을 다시금 확실하게 주지시켰다.

    [무사히 돌아오면, 이라고 했습니다. 서의우 씨 다치지 말고. 무사하게.]

    [뭐든지 다 해도 된다는 거죠.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힐링 팩터로 눈속임 안 됩니다. 전투복 찢어졌는지 핏자국 있는지 전부 확인할 겁니다. 머리카락 한 올도 잘리면 안 됩니다.]

    [그러는 재진 씨야말로 이번엔 말 바꾸기 없기에요. 된다고 했다가 막상 나중에는 안 된다고 하고 이런 거 없어. 뱉은 말 딱 지켜요.]

    [아니 대체 뭔 짓을 하려고..]

    [뭐겠어요.]

    어째 뒷덜미가 서늘하다. 머리털이 따로따로 쭈뼛 서는 느낌이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만 이미 저질렀으니 하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권재진은 다가올 뒷일에 각오를 다졌다.

    ‘상관없어. 서의우가 하고 싶은 거라고 해 봐야 뭐, 눈알 조금 세게 핥고 구멍 조금 세게 쑤시는 정도겠지…….’

    그 정도면 이젠 권재진도 감당할 수 있다. 서의우랑 하루 이틀 배 붙이고 지낸 것도 아니고, 작정하고 참아 내면 못 할 짓은 아니었다. 물론 버겁기야 하겠다만…… 까짓 눈 딱 감고 이 악물고 버텨 내 버리면 그만이다.

    권재진은 이미 그보다 더한 수라장도 꿋꿋이 거쳐 왔는데, 쫄아 붙을 이유 없었다. 애초에 서의우가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한눈팔다가 조금이라도 다쳐서 귀가하면 어림없다.

    권재진 혼자 두고 불안해서 한눈을 팔든, 권재진에게 뭔 짓을 해 대려고 들떠서 한눈을 팔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다.

    [나 무사히 돌아갈게요. 재진 씨도 무사히 있어요.]

    [.]

    ***

    오후. 서의우는 피투성이가 되어 귀가했다.

    빳빳한 칠흑빛 전투복이 검붉은 핏물로 물들어 질척질척했다. 미형의 얼굴도 피범벅이었고, 결 좋은 투명한 곱슬 머리카락 끝에도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재진 씨! 무사해요? 아무 일도 없었어?”

    “서…… 서의우.”

    “괜찮은 거 맞아요? 하아, 걱정…… 걱정했어요. 내내.”

    “아니, 그, 피는…….”

    홈짐에서 러닝머신을 뛰고 있던 권재진이 놀라 눈을 부릅뜨고 서의우를 바라보았다.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라고 했더니, 저 처참한 꼴은 대체 뭐란 말인가.

    새하얗게 낯빛이 변한 재진에게 서의우가 대수롭지 않게 속삭였다.

    “아, 이건 내 피 아녜요.”

    “뭐……?”

    “옆에서 좀 튀었어요. 씻어야죠.”

    서의우가 러닝머신의 전원을 꺼 버리고 재진의 팔뚝을 잡아 끌어 내렸다. 종일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갈급함이 묻어 나오는 동작이었다.

    “이리 와요.”

    “잠깐만, 그럼 서의우 씨는 괜찮은 겁니까?”

    “나? 어떨 것 같아요?”

    서의우가 재진을 끌고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조금도 여유가 없어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권재진은 뭐라 말릴 새도 없이 서의우에게 붙들려 개처럼 질질 끌려갔다.

    그의 목적지는 욕실이었다.

    낮에 권재진이 양치하던 건식 욕실 안으로 쑥 들어간 서의우가 러닝 뛰느라 땀이 살짝 맺힌 재진을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하하, 확인해 봐요. 재진 씨가 말한 대로 머리카락 한 올 안 잘리고 돌아왔으니까요.”

    “아니, 그런 것치곤 피가 너무 낭자하지 않습니까.”

    “내 피 아니라니까. 다른 대원들이야 좀 아팠겠지만 뭐, 죽진 않았고…… 다들 부상이 일상이니까요. 그 정돈 괜찮아요.”

    “뭐라고……? 서의우 씨 대체 뭘 하고 온 겁니까?”

    “뭘 하고 왔긴요, 애쓰고 왔죠. 재진 씨에게 무사히 돌아오려고.”

    “…….”

    “후…… 힘들었다.”

    서의우는 지친 숨을 나른하게 토해 내며 머리에 쓴 고글을 벗었다. 이제야 그의 회색 눈동자가 똑똑히 드러나 보였다. 눈빛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의우는 진심으로 힘들어 보였다.

    “매번 출근할 때마다 이러면 나 어떻게 하죠……. 재진 씨 걱정돼서, 겁나서……. 그냥 장기 휴가 내 버릴까요? 응, 그럴까?”

    서의우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두서없이 중얼거리며 권재진을 품에 안은 그대로 샤워 부스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옷을 벗지도 않고 샤워기부터 틀어 버렸다.

    그는 조금이라도 빨리 씻고 싶은 사람처럼 마음이 급해 보였다.

    “윽, 서의우 씨 일단 좀…… 침착합시다, 예? 서의우 씨가 이렇게 조급하게 굴면 저까지 정신 사납습니다.”

    냉수가 콰르르 쏟아지기에 재진이 수도꼭지를 온수 쪽으로 돌려놓았다. 한결 따뜻해진 물 밑에서 서의우는 급히 피를 씻어 냈다.

    “안 돼요. 시간 없어요. 빨리 씻어야 해.”

    크고 각진 맹수 같은 근육질 몸체를 타고 벌건 핏물이 끊임없이 번졌다.

    물에 젖은 전투복이 본래의 색을 되찾았고, 찢기거나 뜯어진 흔적 없이 멀끔한 상태임이 확인되었다. 서의우는 정말로 무사히, 조금도 다치지 않고 돌아온 것 같았다.

    “천천히 씻는다고 뭔 일 난답니까. 왜 또 급하게 그럽니까.”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어쩔 수 없어요.”

    “예?”

    “오늘 종일 생각해 봤는데요. 내가 재진 씨한테 하고 싶은 거, 셀 수도 없이 많은 거 있죠.”

    “…….”

    “이거 다 하려면 며칠 밤새도 모자랄 것 같은데…… 당장 씻는 시간조차 아깝거든요.”

    “하…….”

    “있어 봐요. 지금부터 우리 되게 바쁠 예정이니까.”

    서의우가 차근히 눈을 휘어 웃었다. 유순한 눈매 안에 들이박힌 회색 눈동자가 전에 없던 불길한 빛깔을 띠며 희게 번들거렸다.

    그의 속내에서 잠자코 때를 기다리고 있던 짙고 깊은 야성이 난폭하게 포효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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