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67)화 (67/154)
  • #67

    “재진 씨, 나 아직 어린데요. 4년은 한참 남았고…….”

    “알고 있습니다. 어린 거. 4년은커녕 4달밖에 안 지난 거.”

    “나더러 풋내 난다고 했잖아요.”

    “맞습니다. 그래서요. 안 할 겁니까?”

    “아뇨?”

    “…….”

    “아뇨. 해.”

    “…….”

    “나랑 해요. 연애.”

    “그럼…… 서의우 씨도 제게 사귀자고 말해 보십시오. 원래 그렇게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아, 그런 거구나. 네, 재진 씨.”

    서의우가 그답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고분고분 말했다.

    항상 제멋대로, 좆대로 구는 서의우 같지 않았다.

    “의우야랑 사귈래요?”

    그래서 좀 웃음이 나왔다.

    ***

    기어이 서의우와 연애……하게 됐다.

    1회차에 이어 2회차에서도.

    4년이 아니라 4달 만에.

    그렇다지만, 연애 놀이에 빠져 즐기기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다.

    감정도 중요하지만, 현실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권재진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참이었다.

    “서의우 씨.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장 집 안 정리하고 거처부터 옮기도록 합시다.”

    좌표 이동 직후 복도에 한참 주저앉아 있었고, 욕실에서도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지만, 사실 냉정히 생각해 보자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집은 사건 현장과 너무 가깝다. 게다가 보안 시스템도 망가졌다. 언제 특임부대가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천만한 상황이란 뜻이다.

    최대한 빨리 짐을 꾸려 떠나야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욕실에서 나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서의우만 분주했고 권재진은 서의우의 심신 안정을 위해 옆에서 지켜봐 주는 감독 역할을 맡았다. 무슨 보모도 아니고, 참.

    서의우가 거실 가운데에 서서 이능으로 크리처 사체를 가루로 만드는 동안, 권재진은 유리 조각에 또 발이 다치지 않게끔 허공에 안전하게 띄워져 그를 바라보았다.

    “음, 제가 이능 관련해서는 가늠이 어려워서 그런데, 마태오 소령은 확실하게 살아 있는 겁니까?”

    생각에 잠겨 앞으로의 일을 고민해 보던 재진이 서의우에게 넌지시 물었다.

    서의우가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에 대한 답이 퍽 언짢은 목소리로 들려왔다.

    “……네, 그 새끼 A급 방어계라 십중팔구 살았을 거예요. 힐링 팩터도 소지하고 있을 테고.”

    아, 그러고 보니 마 소령의 이능은 보호막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확실히 살았겠구나 싶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윗선에 보고 하겠죠. S급 돌연변이 가이드의 존재를. 재진 씨 혹시 스캔도 당했나요?”

    “아, 예. 인식표가 없다고 발견 즉시 바로…….”

    “하, 씨, 그럴 것 같았어, 쯧. 그럼 재진 씨 얼굴하고 이름, 상세한 신상 명세까지 쭉 보고되겠네요.”

    크리처 사체를 완전히 먼지로 만들어 존재를 지운 서의우가 짙은 눈썹을 싸늘하게 찌푸리고 극도로 못마땅한 투로 한마디 덧붙였다.

    “짜증 나요. 내 재진 씨를, 온갖 새끼들이 다 알게 되잖아.”

    “……그래도 다행히, 서의우 씨는 누구도 보지 못했을 겁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서의우가 터무니없이 강렬한 이능을 뿜어내며 나타난 덕에 태양처럼 밝은 빛만 보였다. 제7 특임부대원들도 하나같이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으니 목격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다.

    “현장도 다 쓸려 나가서 아무런 물증 남지 않았을 테고.”

    다시 생각해도 참 대단하다. 서의우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지형을 싸그리 날려 버렸다. 증거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그건, 사람이 일으킨 힘이 아니라 무슨 천재지변 같았다. 운석이 떨어졌다거나, 천연가스가 폭발했다거나.

    무엇보다 천만다행인 점은, 센터 관계자들은 서의우의 심연 속에 억눌러 둔 권능의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서의우가 S급 에스퍼라지만 저렇게까지 강한 이능을 표출할 수 있는지, 그의 심연에 감춘 본연의 힘이 어떤 것인지는 서의우와 권재진 둘을 제외하고선 세상 누구도 모른다.

    S급 돌연변이 가이드는 행방불명. 사건은 그대로 종결. 서의우는 용의선상에 오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론 새 거처로 옮겨 잘 숨어 있기만 하면 된다.

    지금껏 했던 것처럼. 또 감금 도피 생활이다.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럼 뭐 해요. 재진 씨를 다 봤는데…….”

    서의우는 바닥에 떨어진 탄피며, 깨진 유리 조각 등을 염동력으로 들어 한데 뭉치면서 어금니를 세게 짓씹었다. 권재진을 휙 돌아보고는 어둡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로 얼굴 곳곳을 집요하게 뜯어보았다.

    짙고 선명한 검은 눈동자와 곧게 뻗은 코, 쉽게 웃어 주지 않는 어렵고 까다로운 입술까지 지켜보고서는 콧잔등을 깊게 찡그렸다.

    불현듯, 마 소령이 권재진의 저 입술을 만졌다는 생각이 떠올라 버리는 바람에 살심이 일었다.

    “앞으로 센터 내에 재진 씨 이야기가 이 입 저 입 오르내릴 거 생각하니 속이 끓어요. 눈도 뒤집힐 것 같아.”

    서의우가 순식간에 유리와 탄피 등의 증거물을 먼지로 만들었다. 크리처의 검은 핏물이 배어든 러그와 카펫까지 싹 걷어서 없애 버렸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화풀이하듯 이능을 확확 분출해 댄다.

    “더 화나는 건, 재진 씨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난 모르는 척, 아닌 척, 관계없는 척 시치미 떼야 하는 점이에요.”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서의우 씨가 내색했다간 들통날 테니. 지금껏 해 온 것처럼 서의우 씨는 평소같이 행동해야 합니다. 출근도 하고, 임무도 가고.”

    “알아요. 나도 알긴 아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참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권재진을 집에 혼자 놔두고 떠나야 하는 것도 불안하고 초조하고 무서워서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은데, 하물며 밖에 나가 온갖 잡새끼들이 권재진의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걸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참아 줘야 한다니…….

    확 소리쳐 버리고 싶을 것 같다.

    권재진 서의우 거고, 권재진 서의우 가이드고, 권재진 서의우 애인이라고.

    마음 같아선 온 세상에 제 독점욕을 드러내어 모르는 인간이 없도록 알리고 싶다만,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상상 이상으로 몹시 불쾌하고 마뜩잖았다.

    “하, 저희가 둘 다 각성자였다면 이런 일 없었겠죠. 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로 서로와 단일 매칭되어서, 어떤 새끼도 감히 끼어들 수 없게끔 굳건하게 지냈을 텐데…….”

    “뭘 새삼 그럽니까.”

    “아니, 차라리 저희가 둘 다 일반인이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일반인들 하는 연애, 그거 우리가 하고, 사귀고, 그랬겠죠. 굳건하게.”

    그 말에 권재진이 기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 서의우 씨, 연애가 뭔지는 알고 그런 말 합니까.”

    “알아요. 연애.”

    “뭔지 말해 보십시오, 그럼.”

    “그…….”

    권재진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서의우의 관능적인 입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재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결혼 전 단계.”

    역시나.

    “틀렸습니다.”

    “무슨 소리야, 맞잖아요. 일반인들은 연애 활동을 통해서 유전자를 섞을 상대를 물색하고, 결혼 제도를 통해 번식하고 육아하죠.”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서의우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는 마치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부정당한 과학자 같았다.

    “각성자는 인류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크리처와 전투하고, 일반인은 후대와 번영을 위해 안전 지역에서 자손을 낳아 길러요. 그게 현 인류의 생존 방식 아닌가요?”

    “…….”

    입을 꾹 다문 재진이 왼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대체 이런 애를 데리고 무슨 연애를 하겠답시고.’

    서의우가 연애에 완벽하게 무지하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현실로 다시 마주하니 참 헛웃음이 나왔다.

    ‘저걸 언제 또 가르쳐서 언제…… 하, 모르겠군.’

    무턱대고 사귀기로 하긴 했지만, 서의우의 상식과 권재진의 상식을 짜 맞춰 가야 할 필요가 있음을 새삼 깨닫고 나니 막막해졌다.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간 것 같다.

    “됐습니다. 다음에 얘기합시다.”

    권재진은 빠르게 결단을 내리고 복잡한 골칫거리를 다음으로 미뤄 버렸다. 어차피 당장은 주거지 이동과 안전 확보가 우선이기도 했다.

    “그보다 서의우 씨, 이사하게 되면 몇 가지 요청 사항이 있습니다.”

    “응. 뭔데요? 뭐든 말해요.”

    “위급 시 서로에게 연락할 수단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급한데 연락을 못 하니 답답했습니다.”

    “아…… 그렇네요, 재진 씨는 개인 회선 없으니까.”

    집 안에 남은 흔적을 모두 깔끔하게 처리한 서의우가 이번엔 염동력을 사용했다. 곳곳에서 이삿짐이 차곡차곡 꾸려졌다. 개어진 옷이 착착 쌓이고, 무기도 일렬로 늘어서 놓인다.

    “음성은 어렵겠지만 문자 정도는 아마 가능할 것 같은데, 그걸로 괜찮을까요? 보안 시스템 알림 메시지창 이용하면 짧은 텍스트쯤은 주고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연락만 된다면 상관없습니다.”

    “다행이네요. 아, 잠깐…… 그럼 나 이제 출근하고서도 재진 씨랑 대화할 수 있는 건가요? 우와. 생각지도 못했어.”

    “아니, 위급 시에만 보내는 겁니다. 누군가 눈에 띄면 어떡하려고.”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눈에 안 띄도록 되어 있으니.”

    “예? 되어 있다니……. 어쨌든, 뭐. 그건 그렇고. 다른 요청 사항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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