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66)화 (66/154)
  • #66

    “내 재진 씨란 말이에요. 권재진 내…… 나조차 잘못될까 싶어 함부로 못 하는데. 재진 씨가, 나한테 기다리라고 해서…… 나 또다시 성급하게 굴면 밉보일까 봐. 내가 얼마나 많이 신경 쓴 줄 알아요……?”

    과욕이라고, 집착한다고, 애새끼라고 그럴까 봐.

    “정말, 나 정말 조심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재진 씨가 나 마음 놓고 다시 좋아해 줄 때까지. 우리 사이 예전처럼 돌아가고, 재진 씨가 나 다시 믿을 때까지……. 가끔은 쳐다보는 것조차 조심했어. 만질 때는 당연히 신경 썼고.”

    “…….”

    “혹시나 내가 또 아무것도 모르고 재진 씨 헤집어서 괴롭게 할까 봐, 안 되겠다 싶은 건 그냥 다 참았어. 근데, 그걸, 어느 씨발 새끼가…… 권재진 아낄 줄도 모르는 새끼가! 함부로 이곳저곳 건드렸다는데, 내가 돌지 않고 배겨요?”

    끊임없이 울컥울컥 치솟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운지, 서의우의 입가에 내내 걸려 있던 미소가 슬쩍 옅어졌다. 미소 걷힌 그의 얼굴엔 격분과 불안이 뒤얽힌 끔찍스러운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재진 씨랑 관계 그르치기 싫어요. 재진 씨한테 화내고 싶은 게 아니에요. 난 그냥 오늘 너무……. 그러니까 나는…….”

    그의 감정이 널을 뛰었다.

    온갖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게, 굳이 살펴보려 하지 않아도 넘치도록 눈에 들어왔다.

    “……의우야.”

    탄식하며 서의우를 부른 재진이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처참한 얼굴을 끌어당겨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말을 듣고 있기 힘들었다. 가슴 아프고 괴롭고, 그냥…… 이 상황이 싫다.

    입맞춤으로 서의우의 입을 막았다 떨어진 권재진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제 권재진은 어쩔 도리 없이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까 말입니다. 돌연변이임이 발각당했을 때, 어떻게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라고요?”

    “이대로 잡히면 저도 죽고, 서의우 씨도 처벌을 면치 못할 테니…… 그럴 바에는 저 혼자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죽으려고 시도했었고.”

    “…….”

    “크리처들 다섯이 따라붙더군요. 앞에는 까마득한 협곡이 있고 뒤에는 늑대형 크리처 무리가 우글우글. 그때, 제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수증기 피어나는 뜨거운 물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강렬하게 맞붙었다.

    “후회뿐이었습니다.”

    1회차 인생도. 2회차 인생도. 후회뿐이었다고.

    3번째 기회는 다시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의우 씨랑 그렇게…… 그런 식으로 밀어 내기만 하다가 끝이라니. 이대로 죽는다니. 후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작금의 사태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궁이다.

    서의우의 말마따나 여긴 적진이고, 권재진이 돌연변이 태생인 한 주변의 위협은 늘 존재할 터였다.

    뿐더러 언제 예기치 못하게 게이트가 터질지도 모르고, 언제 크리처가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서의우가 완전히 안심하는 날은 올 수가 없다.

    권재진도 그렇다. 이제는 좀 안심하고 편안해지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항시 긴장 상태로 살아야겠다. 그런 날 선 마음가짐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 권재진과 서의우가 따로따로 뜯어져 각자 생각과 감정만으로 날뛴다면 뭘 할 수 있겠는가. 서로 이해하고. 함께 가야지.

    “지난번, 제 유년기 기억을 송두리째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서의우 씨도 알다시피 저는 갈피를 잃었습니다. 원체 충격이 컸고, 배신감 들고, 해결할 방법도 없어서. 참담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죽을 만큼 위험하다는데도 억지 부리고, 가이딩 가지고 협박하고…… 제가 이성 잃었던 거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땐 제 마음이 정말 그렇게 혼란스러웠습니다.”

    “네……. 알아요. 재진 씨 그랬었어요. 힘들어 보였어.”

    “도무지 예전 같지 않고, 서의우 씨를 마음 편히 대하지도 못하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 괴로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순간도 그 억하심정 남아 있습니다. 이 머리통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구멍 크게 뚫려 있다고 생각하면…… 짜증 나요.”

    “네……. 그것도 알겠어요.”

    “그래도 우린, 결국 언젠가는, 둘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의우 씨가 말한 대로, 바라는 대로, 권재진도 서의우 믿고, 서의우도 권재진 믿고. 서로에게 서로를 다 주고. 세상에 단둘뿐인 것처럼…….”

    권재진이 서의우에게 다시금 입을 맞췄다.

    아까 키스할 때는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던 서의우가 이번엔 입술을 조금 벌리고 입맞춤에 응해 주었다. 나른한 숨을 뱉으며 혀를 잠시 문지르고 떼어 냈다.

    “저는, 생각보다…… 그러니까, 서의우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 이상으로…….”

    권재진이 쉴 틈 없이 서의우에게 입을 맞췄다. 이번엔 방금보다 서의우가 더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왔다. 젖은 소리가 나도록 재진의 혀끝을 빨아 주고 아랫입술도 물어 주었다.

    입술을 맞붙인 모습 그대로 권재진이 속살거렸다.

    “서의우 씨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재진이 살짝 헐떡이면서 단 숨을 뱉었다.

    서의우는 보다 심하게 헐떡거리며 권재진의 몸을 잡아 붙들었다. 성난 두 팔로 권재진의 허리를 으스러지게끔 힘주어 안고, 자신의 가슴팍에 권재진의 몸이 완전히 기대도록 해서 완벽하게 품 안에 가두었다.

    “하…… 그렇, 그래요……?”

    들뜬 숨결과 함께 서의우의 절절한 환희가 토해져 나왔다. 서의우가 넋을 빼고 주절거렸다.

    “내, 내 어디가…… 재진 씨, 나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요?”

    “그…….”

    “대답해 줘요. 응? 얼굴하고 몸은 빼고. 그건 이미 들었으니까.”

    “서의우 씨는…….”

    잠시 눈을 아래로 내리깔던 권재진이 입술을 몇 차례 움찔거리다 겨우 대답해 주었다.

    “서의우 씨는,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것 같아서.”

    “…….”

    “한결같은 점이……. 그런 점이 좋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서의우는 서의우일 것 같아서.

    맹목적으로 권재진만을 원하고 갈구할 것 같아서.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잘 알기에.

    절대불변, 영원불멸이라는 말 따위 믿지도 않던 권재진조차 혹시나, 어쩌면, 서의우라면, 하고 기대하게 되는 점이…… 참 당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이보다 더 참혹하게 돌변하고 역병과 전란에 휩싸이게 되더라도, 수십 년 수백 년이 흘러 강산과 바다가 변하더라도, 서의우만큼은 늘 이런 서의우일 것이라 믿게 되니까.

    “……하하.”

    그 순간, 기분 좋은 듯 내뱉어진 서의우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권재진이 내리깐 눈을 저도 모르게 슬며시 치떠 보았다.

    서의우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서 보였다.

    한껏 다정하게 눈을 휘고, 앳되고 청순한 아름다운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누그러진 서의우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싸늘하다 못해 소름 끼치는 시선을 내뿜던 회색 눈동자가 지금은 녹아내릴 것처럼 다정하게 흐려져 권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줄곧…… 재진 씨가 서의우 하나도 모르면서 아는 척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거 아니었네요. 재진 씨 나 되게 잘 안다.”

    당장이라도 마태오 소령을 찾아가 권재진을 만진 팔을 불에 태우고,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다던 살기 어린 서의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고작 말 한마디에.

    권재진의 말 한마디에…….

    “나 안 변해요. 내가 변하고 싶어도 도저히 변할 것 같지가 않아요.”

    “…….”

    “한결같이 난, 재진 씨만……. 응, 난 그래요…….”

    서의우의 그런 모습을 보자, 권재진은 속 어딘가가 덜컥 내려앉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저 들뜬 얼굴, 잘 익은 복숭아 같기도 하고 유순한 대형견 같기도 한, 첫사랑에 빠진 스무 살짜리다운 얼굴을 보았더니 찌릿하고 머리꼭지가 곤두섰다.

    난데없이 눈앞에 거대한 협곡이 나타난 것 같았다. 도깨비불처럼 쏟아지던 늑대의 초록 눈동자들을 몰고 달려간 기암절벽의 끝. 아홉 줄기의 계곡이 흐르고 일곱 빛깔 무지개가 두 쌍으로 겹쳐 있던 그 협곡이 아른아른 떠오른다.

    1회차 삶은 후회로 끝났고, 2회차 삶은…….

    2회차는…… 아직.

    권재진이 따뜻하게 녹아내려 젖은 몸을 일으켜 서의우에게로 더욱 밀착했다. 욕조 벽에 그를 덮쳐 누르고, 온몸을 전부 내맡기듯 완전히 기댔다.

    “서의우.”

    가뜩이나 가까이 붙어 있던 두 사람이 빈틈없이 하나로 겹쳤다.

    한 덩이처럼, 본래 한 사람인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붙어 있고,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우리 그냥 연애해 볼까…….”

    생각을 거치지 않고 재진의 입에서 곧장 말이 튀어나왔다.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본능이 그에게 답을 알려 준 것처럼. 그 말이 그냥 턱 하고 내뱉어졌다.

    “네?”

    서의우는 잠시 얼떨떨한 기색으로 회색 눈동자를 크게 홉뜨더니만, 아까보다 더욱 환희에 차오른 눈빛을 했다. 하얀빛이 그의 주변에 뿌려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곧, 들뜬 낯빛이 차근히 가라앉았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