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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51)화 (51/154)
  • #51

    벌건 눈을 치든 재진이 이를 드러내고 이죽였다.

    “기억 되돌려 놓기 전까진 가이딩 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아무렇지 않게 건드리려는 걸 보니 벌써 결심이 섰나 봅니다?”

    “아니, 난…….”

    “아직 아니라면 그 손가락 당장 멀찍이 치우십시오.”

    할 말을 다 마친 재진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지금 서의우와 얽혀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한방에서, 그것도 침대에서, 그의 얼굴을 보고 말을 섞었다간 영영 기억 찾을 기회를 잃을지 몰랐다.

    누에고치처럼 이불 속에 파고든 권재진을 보고서 서의우가 언짢은 한숨을 삼켰다. 가까스로 이능을 가라앉히고 왔는데, 재진이 이러니 또 뱃속이 뒤틀리고 심연 아래 그것이 불안정해진다.

    “……내가 가이딩이나 하자고 이런다고 생각해요?”

    서의우가 구겨진 이불 위에 느슨하게 손을 얹었다.

    “난, 그것만 바랄 것 같아?”

    피부 사이에 천이 가로막고 있으니 가이딩 될 일은 없다. 피차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서의우가 누에고치화된 권재진 덩어리의 능선을 따라 팔을 쓸어내렸다.

    “이럴 거면 다시는 서의우 알 만큼 안다고 말하지 말아요.”

    구겨진 어깨를 훑고, 둥글게 말린 등을 차근히 매만진다. 재진이 그 손 치우라고 다시금 으르렁대려던 찰나, 권재진 덩어리에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서의우가 재진을 이불째로 끌어안고 침대 위에 길게 누웠다.

    “……뭐 하자는 건데. 치우라고 말했습니다만.”

    “가이딩이라면 안 할 거예요.”

    서의우가 이불에 파묻힌 재진의 허리를 찾아 하얀 천 위를 더듬었다. 보이지 않아도 익숙하게 제자리를 찾아가듯, 굵은 팔뚝을 허리에 휘감았다. 그대로 세게 힘주어 품 속에 가둬 버렸다.

    “아무것도 안 해. 말도 안 걸고, 성가시게도 안 해요. 우린 지금부터 잘 거예요.”

    “뭐……?”

    권재진이 기막히다는 듯 반문했고, 서의우는 삭막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태연히 대꾸했다.

    “자자고요. 잘 시간이잖아요.”

    가까이 붙어 있으면 알 수 있다.

    서의우도 권재진만큼이나 뱃속이 부글부글 끓고 머릿속에 여러 험한 생각이 날뛰고 있음을.

    그 역시도 제정신이 아닌 게 뻔히 들여다보이는데, 이런 와중에 잠을 자자니. 무슨 생각인지 통 짐작할 수 없었다.

    “이제 말하지 말고 눈 감아요.”

    “서의우 씨, 지금 나랑 장난 치자는 겁니까?”

    “아, 말하지 말라니까……. 자자고요. 안 만질 거예요. 보다시피 이불에 싸여 있잖아요. 살 하나도 안 닿아요. 가이딩 효과 없어. 손가락 하나 안 댈 테니까 그냥 자요, 우리.”

    “뭔 개 같은…….”

    “내가 재워 줄게요.”

    그가 등을 도닥이기 시작했다.

    포대기에 싸여 있는 아기를 잠재워 주듯 정성껏 어르고 달래 준다. 권재진이 품 안에서 빠져나가고자 버둥거렸지만 스스로 이불을 뒤집어썼던 것이 패착인지 벗어날 수 없었다.

    원래도 서의우가 마음먹고 재진을 껴안으면 벗어나기 쉽지 않긴 했다.

    “놔. 장난할 기분 아닙니다. 놓으십시오.”

    “어, 너무 버둥대지 마요. 이불 벗겨져. 가이딩 싫다면서요.”

    “서의우.”

    “나 정말 다른 뜻 없어요. 재진 씨랑 같이 자려고. 그것뿐이에요. 이렇게 끌어안고만 있을게요.”

    “…….”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 줘도 되잖아요. 내가 뭐 큰 거 바랐어요? 그냥 자자고…… 같이.”

    “…….”

    “뭐야, 그것도 못 해? 이젠 고작 이까짓 것도 싫어?”

    “하, 누가 그런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

    재진이 한 소리 대차게 쏘아붙이려 입을 열었다. 고개를 확 쳐드는데,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끌려 내려가고 서의우와 뺨이 맞닿았다.

    “윽!”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재진이 고개를 한껏 숙이고 웅크렸다.

    “이것 봐요. 버둥대지 말랬지, 내가.”

    “……비켜. 서의우. 놓고 비키라고.”

    “잘 자요. 재진 씨.”

    서의우가 아까처럼 재진을 도닥거렸다. 가뜩이나 느리던 손길이 서서히 느려지고 끝내 잠잠해졌다.

    서의우가…… 잠든 것 같았다.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권재진을 멋대로 옭아매듯 끌어안고서 그대로 먼저 곯아떨어진 것 같았다. 아니면 잠든 척을 하는 중이거나.

    ‘하. 이 새끼.’

    권재진은 이번에야말로 서의우를 매몰차게 쫓아낼 작정으로 입을 벌렸다. 몸으로 밀어 냈다간 아까처럼 살이 맞닿을지 모르니 고함이라도 쳐 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째서인지 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토해 내려는 말이 목구멍 언저리에 단단히 걸린 것처럼 입 밖으로 빠져나오질 못했다.

    당장 서의우에게 놓으라고, 헛생각 말고 나가라고 외쳐야 하는데, 왜인지 그럴 수 없었다. 피로가 극에 달한 정신이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일까, 아니면 안겨 있는 자세가 무의식중에 반갑게 느껴질 정도로 친숙하기 때문일까.

    서의우는 몹시 증오스럽고, 그의 낯짝은 얼마간 쳐다도 보기 싫은데,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지금 상황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권재진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밤을 서의우와 함께 얽혀 보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도대체.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모순적이고 얄팍하단 말인가.

    “…….”

    권재진이 욱해서 벌렸던 입술을 굴욕적으로 다물었다.

    조금 전만 해도 오늘 하루 잠들기는 틀렸다고 확신했는데 서의우가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당연하다는 듯 수마가 몰려왔다.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인데…….

    ‘서의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정신을 놓을 정도로 피곤해서……. 그래, 혼절할 만큼 피로가 쌓여서 이런 것뿐이겠지.’

    그리고 생각해 보면, 무턱대고 서의우를 침실에서 내쫓는다고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긴 했다. 그와 한 지붕 아래에 지내면서 언제까지고 피하고 있을 수만도 없고 말이다.

    하루 이틀쯤은 침실에 틀어박힐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방에서 나와야 할 때가 올 터다. 식사도 해야 할 테고. 샤워도 해야 할 테고. 서의우의 말마따나 잠도…… 자긴 해야 한다.

    그렇다고 꼭 한 침대에 달라붙어 잘 필요는 없긴 하지만…….

    ‘몰라…….’

    모른다고 씨발…….

    이번에도 생각의 마침표가 씨발로 찍혔다.

    전의를 상실한 권재진이 허탈하게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잡한 상념이 잦아들고 그대로 질척한 늪 속에 빠지듯 깊게 잠들었다.

    ***

    당연하게도 우주의 한복판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 검고 광대한 공간으로 또다시 무의식이 도피한 모양이다.

    토성과 82개의 위성이 줄지어 권재진을 맞이했다. 타이탄, 엔셀라두스, 미마스, 디오네, 이아페투스, 테티스, 히페리온, 에피메테우스…….

    재진은 막막한 심경으로 그 별들을 지켜보았다. 권재진의 꼬이고 비틀린 삶과는 하등 관계없는 이 공간이 참으로 유용했다.

    이 초월적인 상위 세계에 비하면 권재진의 존재 따위 티끌에 불과할 터.

    그가 품은 고민도, 심란한 마음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한창 넋 놓고 우주에 녹아들어 있는 그때, 원치 않은 목소리가 슬쩍 끼어들었다.

    ‘재진 씨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 서의우의 음성이 귓전을 찌르듯 깊게 파고들었다. 흠칫 놀란 재진이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주 멀리, 잘 보이지도 않는 태양 뒤에 숨어 있던 서의우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나타났다.

    ‘좌표 이동으로 우주에도 올 수 있으려나요. 안 해 봐서 모르겠네.’

    이건 꿈이다.

    무의식이 빚어낸 허상일 뿐이고, 저건 진짜 서의우가 아니다.

    알고 있지만, 권재진은 충동을 참아 낼 수 없었다.

    ‘서의우! 너 여기가 어디라고 쫓아와.’

    ‘네?’

    ‘왜 여기까지 따라오냐고, 개새끼가……. 꿈 정도는 혼자 있게 내버려 둬도 되잖아!’

    ‘아니, 그렇게 말해도…… 여긴 재진 씨의 꿈인걸요.’

    ‘서의우 넌 각성자라 모르겠지만, 일반 사회에서 가족은…… 가족만큼은, 누구도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란 말입니다. 공공연한 금기를, 그걸 깨부숴 놓고, 뻔뻔스럽게 잘도…….’

    분에 차서 마구잡이로 지껄이는 권재진의 앞으로 서의우가 다가왔다. 저 먼 태양 뒤에 있었는데도 거리를 무시하고 순식간에 나타났다.

    ‘하하. 무슨 소리예요, 나 이해가 안 되네.’

    서의우는 권재진의 손을 잡고 빙그르르 돌았다.

    새파란 바다 위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던 순간처럼.

    오르골 위의 장식품같이 우주에서 원을 그리며 춤추었다.

    ‘꿈이니까 나타난 거죠.’

    서의우가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기다란 눈이 보기 좋게 휘어지고 하이얀 뺨이 복숭앗빛으로 발그레하니 물들었다.

    앳되고 말간 스무 살의 얼굴을 내보이며, 서의우가 재진의 입술에 가볍게 도장 찍듯 키스했다.

    ‘재진 씨 지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잖아요. 나랑 싸우고, 화내고, 상처 주고, 그런 것에서 멀어지고 싶은 거잖아.’

    그의 입술이 눌리는 감촉이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얇고 가느다란 미려한 속눈썹이 뺨을 스쳐 간지럽게 느끼는 감촉마저 생생했다.

    ‘여기선 나랑 이러고 싶을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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