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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50)화 (50/154)
  • #50

    “가이딩, 못 하겠습니다. 오늘부로 서의우 씨 가이드 안 할 겁니다.”

    “뭐라고요?”

    서의우가 소리 없이 고개를 들었다. 쏘아 보는 시선이 무섭도록 맹렬했다.

    “가이딩은 가이드의 의무라면서요. 서의우 씨가 내 기억 온전히 돌려놓고 책임 다하기 전까지 저도 그 의무 다할 생각 없습니다. 못 하겠습니다. 어차피 서의우 씨가 기를 쓰고 저를 살려 두려는 것도 그 개좆같은 가이딩 때문이잖습니까. 언제고 가이딩만 바라는 주제에.”

    “……지금 뭐라고 했어. 재진 씨 나 화내는 꼴 보고 싶어요? 그래서 이래?”

    “사실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여태 외면하고 있었다 뿐이지. 권재진이 서의우 가이드가 아니었으면, 돌연변이 가이드가 아니라 평범한 민간인이었어도, 그쪽이 날 거들떠나 봤을 것 같습니까? 그 잘난 S급 에스퍼 서의우가 가이드 아닌 권재진을 대체 뭐라고 생각했겠느냐고요…… 죽든 말든 관심이나 가졌을까? 아니? 내 목숨 종잇장보다 더 가볍게 생각했겠지.”

    “하…… 그만해요. 경고하는 거예요. 슬슬 정말 화나려고 해.”

    서의우가 피 흐르는 아랫입술을 성마른 동작으로 닦아 냈다. 손등으로 문지르니 새빨간 선홍빛 핏물이 그의 입가에 길게 번졌다.

    권재진은 서의우의 경고가 진심임을 알았다.

    그렇다 해도 도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서의우가 권재진 살려 두려는 것도 결국 가이딩이 필요해서잖습니까.”

    뭘 하든, 가이딩. 가이딩.

    처음부터 끝까지 가이딩뿐.

    말은 참 번드르르하다. 권재진을 죽일 수 없다느니, 숨 붙여서 살려 놓으려 했다느니. 하지만 그 목적은 결국, 가이딩 착취로 귀결되지 않던가?

    “제가 다시는 서의우 씨와 가이딩 할 생각이 없다 해도, 이 목숨을 그리 끔찍하게 생각해 주겠습니까? 맹세합니다. 전 오늘부로 두 번 다시 자의로 가이딩에 응하는 일 없을 겁니다.”

    “그만, 좀…… 작작 하라니까……!”

    켜 두었던 스탠드가 불안하게 깜빡거리다가 전구가 터져 나갔다. 미처 억누르지 못한 서의우의 이능이 넘쳐흐르며 멋대로 날뛰었다.

    평소보다 더욱 사납고 매섭게. 채찍질당한 흉포한 짐승처럼 사방으로 줄기줄기 분출되었다.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힘이 저택을 뒤흔들고 지반 아래까지 뻗쳤다. 서의우가 자제하고자 이를 악물었지만, 이미 격정이 도를 지나쳐 통제하기 어려운 단계였다.

    “왜요. 뭐 문제 있습니까? 제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서의우 씨가 억지로 찍어 누르면 다 해결되잖습니까. 그 전지전능한 이능 사용해서. 수갑으로 묶어서. 재갈 채우고 좆구멍에 도뇨관 박아 가면서! 그냥 저를 도구처럼, 가이딩 뽑아 쓰는 기계로 다루면 되잖습니까!”

    “시, 싫어요. 큭…… 나도, 지긋지긋하다고.”

    서의우가 힘을 거두려 애쓰며 굵은 눈썹을 찌푸렸다. 번들거리는 회색 눈동자가 뜨겁게 들끓었다.

    “에스퍼로 살고 싶지 않았어. 이딴 식으로, 누가…… 누가 좋다고 하겠어요? S급이고 뭐고 다 원한 적 없어. 그런데, 재진 씨가, 권재진 씨가 내 앞에 나타나서 난……. 재진 씨가 나한테 다 줬잖아요.”

    서의우는 벌겋게 붓고 피 흘리는 얼굴로 눈가를 떨고 있었다.

    “내가…… 재진 씨를 원하도록 만들었잖아요. 에스퍼로 살게끔, 가이딩이 얼마나 좋은지, 내가 그걸 얼마나 원하는지. 다 바꾸어 놓았잖아요! 난 이제야 겨우, 살 것 같아졌는데! 권재진 씬 날 두고 죽겠다고? 지금 그걸 나더러 감당하란 소리예요?”

    “그러니까! 씨발, 그렇게 가이딩이 좋으면! 기억 원래대로 되돌려 놓든가, 아님 날 묶든 어쩌든 해서 좆대로 하라고 말하잖습니까! 하, 그래. 또 기억 지워도 좋겠네요. 이번에야말로 봐주지 말고 제대로 내 대가리 속에 든 것 박박 지워서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큼지막한 구녁을 또 내든 어쩌든, 백치 만들어서 편리한 가이딩 노예로 전락시키십시오. 서의우 전용 가이드로, 평생 가축처럼 묶어 두고! 좆대로 굴리라고!!”

    쩌적!

    서의우가 자제한 보람도 없이 저택 골조가 굉음을 내며 일그러졌다. 벽이 두 짝으로 갈라지고, 틈새에서 시멘트 가루가 후두둑 떨어졌다. 침대도 불안정하게 흔들렸지만, 권재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죽음도 불사한 사람에게 과연 무엇이 두려울까.

    “난, 서의우 씨가 가족 되돌려놓기 전까진…… 절대로, 결단코, 기필코. 가이딩에 동의하지 않을 테니. 그런 줄 알아 두세요.”

    “…….”

    “생각 잘 하십시오. 대답 기다릴 테니.”

    ***

    유난히도 냉막한 바람 몰아치는 밤이었다.

    권재진은 서의우를 내쫓고 홀로 침실에 틀어박혔고, 서의우는 자칫 광포해진 이능을 조절하지 못해 권재진을 해할까 부러 자리를 피했다.

    산이라 그런가, 먼 곳에서 올빼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달빛 하나 없이 컴컴한 구름 낀 밤에 을씨년스러운 새 울음마저 들려오니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이 더욱 가라앉았다.

    자정이 지난 지 오래다만 권재진은 당연히도 잠을 청하지 못했다. 몇 시간째 미동 없이 죽은 사람처럼 침대에 널브러져 있다가 간간이 뒤척이며 생존을 알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힘들어졌다.

    서의우에게 그렇게, 그런 소리를 해서 그런가.

    ‘나이 먹고, 나잇값도 못 해서.’

    당연히도 내뱉은 말 전부 본심은 아니었다.

    가이딩 노예로 만들라느니, 가축처럼 굴리라느니…… 그런 짓, 서의우가 쉽사리 하지 못할 줄 알고서 화를 터트린 것이다. 서의우가 권재진에게 무얼 바라는지, 대놓고 말하진 않았어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기에.

    ‘애새끼가 잔인하게 군다고, 나까지 똑같이 잔인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렇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은 영영 되찾지 못하겠지.’

    욱하는 마음에 좀 심하게 성질을 부리긴 했지만, 몇 번을 곱씹어 돌이켜 생각해도 이 일을 유야무야 넘어갈 순 없었다.

    이번에도 서의우가 원하는 대로, 그의 뜻대로, 못 이기는 척 순응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적어도 권재진에겐 화를 낼 권리가 있었다.

    타고난 피붙이를 빼앗긴 피해자인데, 참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엔 너무 억울하고, 악이 받치고, 구역질 났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권재진은 가족을 잃은 것이다.

    그의 인생 전반, 나고 자란 뿌리, 유년기의 경험과 배경을 통째로 빼앗긴 것이다. 서의우는, 부모를 죽인 원수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참아야 했을까? 권재진이 이번에도 서의우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주고, 그를 이해해 줬어야 할까?

    2회차 서의우가 직접 손을 쓰진 않았으니, 이 서의우는 아무 죄 없다고. 그는 무고하다고. 그래야 했던 걸까……?

    ‘씨발…….’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아까부터 모든 생각의 마침표가 씨발로 찍히고 있었다. 무얼 고민해도 결론은 씨발이고, 무얼 회고해 봐도 결론은 씨발이었다.

    전부 씨발이다. 이 씨발 새끼. 이 씨발 세상. 이 씨발 빌어처먹을 가이딩과 개썅 좆같은 정신계 이능!

    다 망해라.

    싸그리 불타 없어져라. 온 세상 멸망하고 죄다 참혹하게 나자빠져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이 순간, 만약 권재진이 서의우였다면, S급 에스퍼였다면, 권재진은 진실로 참지 않고 이능을 폭발시켜 기꺼이 폭주란 이름의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결말을 자처했을 터였다.

    성마르게 머리를 쓸어 넘긴 재진이 베개에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아무래도 오늘 잠들긴 글렀다.

    필시 뜬눈으로 아침까지 밤을 지새울 터다. 열이 뻗치니 잠도 오지 않고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고 공복으로 있었는데도 허기진 줄 모르겠다.

    그런 그때, 닫힌 침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재진 씨. 들어가도 될까요.”

    서의우다. 한동안 잠잠히 있나 싶더니만 또 들쑤시러 온 모양이다.

    권재진은 부름에 답하지 않았지만 서의우는 허락 없이 침실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소리 내지 않고 주의해서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고 있었나요? 깨운 거 아니죠.”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권재진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를 무시했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서의우가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그의 묵직한 체중을 따라 매트리스가 우묵하게 파였다. 순수한 근육질 체형이라 무게가 많이도 나간다.

    “재진 씨가 나한테 나가라고, 당분간 보기 싫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걱정돼서 왔어요. 혹시 또 무서운 짓 할까 봐.”

    뭐, 자해할까 봐?

    혀 깨물까 봐?

    권재진이 기도 안 찬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서의우는 그런 권재진을 집요한 눈으로 뜯어보다가 저도 모르게 험악하게 콧등을 일그러트렸다.

    권재진의 모습이 너무 수척해 보였다. 가뭇한 눈가에 피로가 찌들어 퀭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입술은 메말라 부르터 있었다. 핏발 선 눈은 여전히 붉게 충혈되어 있고.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모습이었다.

    “재진 씨…….”

    그의 손이 다가왔다.

    안쓰럽고 안타까워 내미는 손길이었다. 권재진을 위로하고 달래 주고 싶어서, 다정하게 매만져 주고 싶어서.

    그렇지만 권재진은 서의우의 접근을 단칼에 매정하게 거부했다.

    “뭐 합니까 지금. 저랑 가이딩 하자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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