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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30)화 (30/154)
  • #30

    일순 침실에 광풍이 몰아친 듯한 착각이 일었다.

    서의우는 우뚝 멈춰선 채 굳은 낯으로 권재진을 내려다보았다. 올곧게 직시하는 검은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고선 서서히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굵은 눈썹이 삐딱하게 산을 그리며 치솟았고, 턱 아래 근육도 딱딱하게 각이 잡혔다.

    “……나라고요?”

    서의우가 가라앉은 소릴 내었다. 낮은 목소리가 바닥을 할퀴듯 음산하게 들렸다.

    “재진 씨가 나랑 사귀었다고……? 그것도, 뭐, 미래에서……?”

    서의우의 회색 눈동자는 의심으로 가득 점철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권재진이 듣기에도 미래 운운하는 건 터무니 없는 소리로 들렸다. 게다가 수갑에 묶인 채로 내뱉는 말이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 변명이라 생각한대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예, 서의우 씨가 저에게 사귀자고 했습니다. 저는 고민 끝에 받아들였고요.”

    “지금 나더러 그런 허무맹랑한 소릴 믿으라는 건가요. 날 무슨…… 머저리로 알아요?”

    서의우가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차갑게 얼어붙은 회색 눈동자에 날이 섰다.

    역시나. 못 믿으려나.

    권재진이 탁한 한숨을 내뱉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는 서의우 씨가 말하지 않은 개인사를 알고 있습니다. 센터 훈련소에서 단체 생활 하던 시절, 매일 밤 혼자 잠 못 들어 괴로웠다면서요.”

    “그딴 건 맥락에서 유추 가능한 얘기잖아요.”

    “닭장 같은 3층 침대. 서의우 씨 몸보다 한참 좁다란 침대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불을 켜거나 뒤척거려 다른 동료들 수면을 방해할 수도 없고, 매일 밤 캄캄한 어둠에 홀로 갇혀 있는 게 고문 같았다고, 직접 들었습니다.”

    “…….”

    “이 집 엘리베이터는 총 세 대. 사람용, 화물용, 비상용.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방화한 줄 아십니까? 화재 시 스프링클러가 터지고 비상용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의우 씨 서재 금고 비밀번호도 압니다.”

    권재진은 방화하기 전, 술병을 들고 전시실에 가는 길목에 잠깐 2층 서재에 들렀었다. 혹시나 해서 서재 금고를 열어 보았고, 알고 있던 비밀번호가 고스란히 맞아떨어지는 것을 미리 확인해 둔 참이었다.

    “0807. 서의우 씨가 정식으로 각성자 수료 마치고 처음 임무에 배정된 날짜 아닙니까? 그렇다고 들었는데.”

    권재진이 지친 눈을 몽롱하게 깜빡였다.

    몸이 춥고, 오슬거리고, 현기증이 났다. 공복에 도수 높은 알코올만 들이켜서 속이 쓰린 데다가 숙취로 머리도 아팠다. 수갑이 눌린 팔목에 멍 자국이 선명했다.

    피로를 감출 수 없어진 재진이 자포자기한 투로 속삭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서의우 씨가 알려 준 겁니다. 겨드랑인지 어딘지 해괴한 위치에 점 있는 거, 사랑니가 어쩌고 이빨 개수 서른 개인 거, 몸이 말랑하다느니, 아기 입이라느니, 그딴 헛소리를 대체 서의우 씨 말고 또 누가 할 것 같습니까? 아무도 저한테 그런 말 안 합니다.”

    “그럼…… 정말 나라고요?”

    서의우가 미심쩍게 되물었다.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모양이다. 권재진이 험악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서의우 씹니다. 서의우 씨예요.”

    “재진 씨…… 나랑 사귀었어요?”

    “예. 4년 후에요.”

    “그럼, 재진 씨…… 날 좋아하게 됐어요?”

    “……예. 4년 후에는.”

    “지금은?”

    “…….”

    “지금은요?”

    “…….”

    난처한 대답을 피하려는 듯 권재진이 팔을 흔들었다. 수갑에 연결된 사슬이 짤그랑짤그랑 소릴 내었다.

    “그보다 먼저 이것 좀 풀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팔 아프고…… 거슬리고…… 슬슬 기분도 나쁜데…….”

    “대답부터 해요. 나 아직 권재진 씨 믿을 생각 없으니까.”

    “……보채지 마십시오. 그런 질문에 대답할 기분이 아닙니다. 남의 자지에 이상한 거 쑤셔 넣은 주제에…….”

    “그러는 권재진 씨는 집에 불 지르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했잖아요. 하…… 생각하니 또 속이 뒤집히네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왜 그랬던 거죠?”

    “…….”

    “아니, 앞뒤가 안 맞잖아. 내 애인이었으면 방화하고 투신할 이유가 없는데, 왜?”

    “……기억을.”

    권재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기억을 잃을까 두려웠고, 권재진의 서의우를 잃을까 두려웠다. 미래가 달라지길 원치 않았고, 그런데도 달라진 미래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짧은 몇 마디 말로 압축해서 말하기엔 너무나 긴 이야기였다.

    “기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더니…… 어떻게든 결판을 내야겠다 싶어서…… 술 마시고 홧김에…….”

    “뭐라고요?”

    “믿기 어렵다는 건 압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정말인데…….”

    “…….”

    “믿어 주십시오, 서의우 씨. 봐주는 거 말고.”

    “…….”

    “믿어 달라고.”

    길고 얇은 속눈썹을 내리깐 서의우가 차근히 손을 뻗어 왔다. 벽에 박힌 쐐기에서부터 이어진 은사슬을 쥐고 끝에 매단 수갑까지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붉은 고리 모양 자국이 생긴 손목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힘겨워하는 권재진을 보았다.

    “그럼, 허락해 줘요.”

    뭘?

    “기억.”

    지우진 않고, 확인만.

    서의우가 다정하고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말간 얼굴이 끔찍스럽게 아름다웠다. 완벽한 대칭을 이룬 조형적인 예술품 같은 이목구비. 비범함과 전능함이 휘몰아치는 회색 눈동자. 감히 거스를 수 없고, 두려움과 경외를 느끼는, 현존하는 인류 최강의 생물…….

    권재진은 알고 있었다. 지금 순간조차 서의우가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서의우는 원한다면 언제든 권재진을 묶고, 지배할 수 있었다. 정신계 이능 같은 힘이 있다면 언제든 재진의 기억을 삭제하고 도구처럼 굴릴 기회가 넘쳤을 터.

    권재진의 머릿속에 든 것을 박박 긁어내고, 신생아적 기억만 남겨 버린다면…… 그러면, 재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가 되어 서의우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가이딩을 바치는 노예가 되었을 터였다. 서의우는 손쉽게 권재진을 시커먼 나락에 처박을 수 있으면서도 그리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인생 자체가 그렇다.

    그만한 힘이 있으면서…… 단신의 몸에 그렇게 강력한 권능을 억누르고 있으면서…… 어째서 무자비하게 터트려 버리지 않는 걸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불균형의 고통을 지고 감내하며 인류를 위해 싸우고 다치며 희생하는 걸까.

    그는 태생부터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비정상적이 망나니고, 조금의 인간미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서의우는 누구보다 더 상식적이고 인간적이었던 걸지도.

    권재진이었으면, 진작 열이 뻗쳐서 보이는 대로 다 쳐 죽이고 뒤엎어 버렸을 텐데…….

    “……까짓, 하십시오.”

    권재진이 체념 반, 측은함 반을 담아 뇌까렸다.

    “읽기만 하는 거면 상관없습니다. 하세요.”

    “정말 괜찮겠어요? 내가 재진 씨 속이는 걸 수도 있잖아.”

    재진은 속내를 다 터놓고 마음이 편안해졌는데, 서의우는 아직도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권재진을 보면서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 분석하고, 가늠하고, 간파하고, 권재진을 미심쩍어하는 것이다.

    그게 안쓰러웠다.

    “예, 압니다.”

    “말로는 읽기만 한다고 해 놓고 본심은 재진 씨 머리통 다 헤집어서 비워 놓으려는 걸 수도 있는데요.”

    “겁주려는 겁니까? 이 와중에 별다른 선택지도 없고. 제가 말로만 서의우 씨에게 믿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

    “제가 먼저 서의우 씨 믿고 기억 내드릴 테니, 확인하고 서의우 씨도 권재진 믿어 주십시오. 그거면 됩니다.”

    “…….”

    “뭐 합니까? 빨리 대가리 들여다보세요. 저 팔도 아프고, 춥고, 저거, 좆구멍 꿰뚫은 거도 좀 뽑고 싶습니다…….”

    얼어붙어 있던 회색 눈동자가 미미하게 커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권재진이 이렇게 쉽게 기억을 내줄 거라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얄팍한 거짓을 지껄여 잠깐을 모면하려는 발버둥일 줄 알았는데. 기억을 읽어 보라고 하면, 그러면…….

    “진짜란 거잖아…….”

    “글쎄,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했잖습니까.”

    “정말 미래에서 과거로 왔다고?”

    서의우가 곧게 뻗어진 권재진의 확고한 뜻을 인지하고서는 손등으로 턱밑을 가렸다.

    “아.”

    서의우의 하얗고 청순한 얼굴에 서서히 분홍물이 들었다.

    그가 손끝을 조금 떨며 얼굴을 가렸고,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수그렸다. 검은 곱슬머리 사이로 삐죽 나온 귓바퀴에 조금 핑크빛이 돌았다. 잘렸던 귀가 완전히 자라 본래대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 그렇구나. 권재진 씨 진짜로 이상해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제 기준에서는 서의우 씨가 손대지도 않고 물건 움직이고, 순간 이동하고 그러는 거나 회귀하는 거나 다 똑같이 신기합니다. 별 차이를 모르겠어요.”

    “아…….”

    “그래서 기억은? 대체 언제 읽으려는 겁니까.”

    “아니, 잠깐, 나 진정 좀 할게요. 흥분한 채로 머리 건드리면 안 돼요……. 위험해…….”

    서의우가 깊게 심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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