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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29)화 (29/154)
  • #29

    “지금 재진 씨만 화나는 거 아니고, 재진 씨만 분한 것도 아니에요. 나는요. 이십 년을요. 권재진 씨 없이 살아야 했어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몰랐으니까. 가이딩이 어떤 건지, 가이드가 어떤 건지 아예 몰랐으니까…….”

    서의우가 벌겋게 들끓는 격정을 담아 권재진의 두 눈을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그의 열기 어린 회색 동공에 여러 감정이 반죽한 것처럼 혼재해 뒤섞여 있었다.

    “억울해요. 재진 씨는 왜 하필 돌연변이인 거죠?”

    “…….”

    “어째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났나요?”

    “…….”

    “그냥 평범한 가이드로 태어나 주지 그랬어요……. 다른 각성자들처럼 정규 교육 수료 받고, 정식 가이드로서 저랑 매칭되면 안 됐던 건가요? 그랬으면 나도, 널리고 널린 흔해 빠진 에스퍼들처럼 잘 지냈을 테고, 아무 걱정 없이 재진 씨랑 마음껏 가이딩 했을 테고, 이딴 처참한 기분…… 맛보지도 않았을 텐데…….”

    잔잔하게 흘러가던 서의우의 목소리가 차츰 사나워졌다. 호흡이 떨리며 불규칙하게 날뛰었다.

    “권재진 씨가 내…… 가이드잖아요.”

    “…….”

    “나를 책임져야 하는 거잖아요. 그게 가이드의 의무인데.”

    “…….”

    “재진 씨는 이십 년이나 날 내버려 뒀어요! 이십 년이나 나를 혼자 둬 놓고 다른 인간이랑 좋다고 붙어먹었다고…….”

    “…….”

    “애인? 연인? 웃기지 마요. 그 인간이 권재진 몸 뒤적대고 점 위치, 치아 개수, 속속들이 알아낼 동안 나는 숨 쉬듯 팔다리 찢어지고 뜯어졌어요. 그런데, 그깟 옛 기억 하나도 못 지우게 해요? 나를 그딴 눈으로…… 인간성도 없는 경악스러운 괴물 보듯 쳐다보면서?”

    서의우는 급히 헛숨을 들이켜기도 하고 괴로운 듯 중얼거리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색소 옅은 하얀 얼굴이 유독 핏기없이 창백했고, 그에 비해 짓씹은 입술을 대조적으로 붉었다.

    “물론, 여기에 재진 씨 잘못 없는 거 알아요. 누구의 책임도 아닌 거 알아요. 그렇다 해도 난 화가 나요. 재진 씨 기억도 다 지우고, 없던 과거로 만들고, 그래도 가끔 곱씹어 보면 분이 치밀 테죠. 그 작은 점이 눈에 띄거나 가지런한 이가 보이거나 그러면…… 그 상대를 특정해 내서, 피떡이 되게끔 짓뭉개 죽여 버리고 싶을 거라고요…….”

    서의우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사납게 쓸어 넘겼다. 머리칼이 이마 뒤로 넘어가며 다쳤던 그의 상처가 드러났다. 뚜렷하게 핏대 선 목 위쪽에 반쯤 아물어 가는 귀가 보였다.

    “재진 씨는,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해요……? 속이 부글거리고 돌아 버리겠는데, 권재진 씨에게 화풀이하지 않으려고 계속 참아 냈겠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하나요? 줄곧 멀쩡한 척했던 거라고, 괜찮은 척했다고, 생각 안 해 봤나요?”

    “…….”

    “내 생각 같은 건……! 정말 조금도 안 했냐고요!”

    서의우가 씨근덕거리며 강하게 이를 악물었다. 자꾸만 멋대로 튀어나오려는 거대한 힘을 끝까지 잡아 붙들어 심연 속으로 억눌러 처박았다. 그는 정상적인 상태로부터 비틀려 있었다. 무의식중에 분출되려는 힘을 억누르느라 여간 애쓰는 게 아닌 듯했다.

    서의우가 눈꺼풀을 내리닫고 곧은 목을 부르르 떨었다.

    그대로 격해진 숨을 고른 후, 눈을 열고 반지르르한 회색 눈동자로 재진을 내려다보았다.

    싸늘하기도 하고 다정하기도 한 서의우의 회색은 여느 때고 위태로웠다.

    “권재진 씨.”

    서의우가 권재진을 불렀다.

    고저 없는 들리는 목소리가 메말라 있었다.

    “이래도 내가 너무한가요?”

    권재진은 서의우의 상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크게 베인 살갗이 아물고 갓 자라난 귀가 자리 잡는 모습이 신경 쓰이다 못해 감정이 동요했다.

    “재진 씨가 나한테 너무한 게 아니고……?”

    권재진은 서의우의 뽀얗고 분홍빛이 도는 하얀 귀를 오래도록 응시하다가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절절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눈빛에 담아 전했다.

    정곡이었다. 권재진은 서의우의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자기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가득 차서 서의우를 살필 틈이 없었다. 상황이 급작스러웠고, 기억을 없애느니 마느니 고뇌할 일이 많았다. 앞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결정짓지도 못한 상태였으니 당연히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돌이켜 보면 볼수록, 권재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생각만 했다. 바라 온 것 전부 그 자신만의 열망이었다.

    기억, 미래, 목숨, 서의우.

    일반인의 삶, 가이드의 삶, 돌연변이의 삶.

    서의우의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서의우가 바라는 것, 그의 열망, 그의 인생. 어느 것도, 조금도…… 그게 미안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권재진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론 내고 혼자 선택하려 한 게, 그게 미안했다. 2회차 서의우에게도 조금은 곁을 내어 줬어야 했는데. 너무 선을 그었던 것 같다.

    권재진이 새까만 눈동자로 서의우를 직시했다. 당장 말을 하고 싶었다.

    서의우에게 전부, 지나온 모든 일을 터놓고 얘기하고 싶었다.

    “으, 윽!”

    권재진이 재갈을 짓씹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수갑에 얽힌 사슬이 팽팽해졌다. 이불을 걷어차고 서의우의 손길도 떨쳐 내려 허리를 뒤틀었다.

    “……하.”

    서의우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눈을 치들어 천장을 보다가, 다시 눈동자를 내리깔아 권재진을 응시했다. 옷이 죄다 벗겨진 모습으로 수갑에 묶여 버둥대는 권재진이 신경에 거슬려 보기만 해도 부아가 치밀었다.

    “괜한 짓 말아요. 움직이면 다쳐. 뒷구멍 말고 좆구멍까지 찢어져 보고 싶어요……?”

    서의우가 재진의 허벅다리를 팔꿈치로 짓눌렀다. 들썩이는 골반을 잡아 누르고 좁다란 요도 구멍에 카테터를 욱여넣었다. 아무리 실리콘 재질 말캉한 관이라지만 비좁은 구멍에 관을 쑤신다는 게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아! 크흑. 욱……!”

    권재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팔 근육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수갑을 잡아당겨서 손목에 붉은 멍이 들었다. 연신 목울대를 울컥거리며 입술을 벙긋대곤, 그걸로도 부족해 서의우의 어깨에 머리통을 들이박기까지 했다.

    “뭐, 읏, 가만히 있으라니까!”

    잔뜩 콧잔등을 찡그린 서의우가 카테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빠지지 않게 끄트머리를 부풀리고 테이프를 붙여 처치했다. 끝나자마자 기분 나쁘다는 듯 일회용 장갑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성마른 손길로 머리카락을 재차 쓸어 넘겼다.

    카테터는 다 쑤셔 박았는데도 권재진은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매트리스를 발길질하고 서의우의 팔뚝에 머리통을 쿵쿵 처박으며 시위했다. 서의우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연한 표정으로 권재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팔목을 잡아 누르고 움직이지 못하게 가슴을 눌렀다.

    “자꾸 그러면 진짜 찢어져요. 지금 재진 씨 몸속에 관이 박혔다고요! 왜 그러는 거예요!”

    “으! 우! 크……!”

    “기억 안 지운다니까! 안 지운다고요, 또 왜, 뭐가…… 이거, 도뇨관 싫어요? 아프…… 아픈가? 빼 줘요?”

    권재진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눈을 부릅뜨고 서의우를 바라보았다. 눈매가 잔뜩 일그러져 있고, 흰자에는 실핏줄이 서 있었다. 충혈된 눈으로 쏘아보는 눈빛이 절실했다.

    “그럼 뭔데요…… 나한테 왜 또 이러는데…….”

    권재진이 재갈을 반복해서 까득까득 깨물었다. 위턱과 아래턱 사이에 물린 검은 막대 형태의 봉이 이를 상하게 했다. 서의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재갈……? 재갈 풀어 줘요?”

    “우!”

    권재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의우는 기가 찬다는 듯 피식거렸다.

    “……알았어요. 고개 숙여 봐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재진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언제 날뛰었냐는 듯 얌전해진 재진을 보고 서의우가 속으로 옅은 한숨을 삼켰다. 이상하게도 권재진이 싫다고 거부하면 신경이 거슬리고 고분고분하면 마음이 내켰다.

    서의우가 재진의 뒤통수에 단단히 고정된 가죽 띠를 느릿하게 풀어냈다. 벨트를 젖히고 고리를 당겨 재갈을 빼줬다. 권재진은 곧장 입에 물었던 막대를 뱉어 내고 뻐근한 턱을 움직였다.

    “서의우 너야.”

    “……나?”

    “너라고! 내가 사귀었던 사람.”

    입이 자유로워지자마자 권재진은 막힘없이 속내를 털어놨다. 더는 숨길 수도 없거니와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우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년 후의 미래에서 사귀었던 연인 사이입니다. 4년 후, 저는 게이트에 휘말려 죽었고, 시간을 거슬러 4년 전인 지금으로 회귀했습니다. 그래서 의우야라고 불렀고, 날 기억하냐고 물었던 겁니다.”

    “…….”

    “저는 서의우 씨 가이드고 서의우 씨 애인입니다.”

    “…….”

    “미안합니다. 숨기지 말고 진작 얘기했어야 했는데. 안 믿어 줄 것 같아서 그만.”

    “…….”

    “그쪽을 잊기 싫었습니다. 기억…… 지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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