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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28)화 (28/154)
  • #28

    술이 깨자 정신도 들었다. 권재진은 부자유스럽게 구속당한 팔을 보자마자 무슨 짓을 벌인 건지 깨우치곤 탄식했다.

    ‘……사고 쳤군.’

    양쪽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상처 입지 않도록 양가죽이 덧대져 있고, 순은으로 제작된 사슬이 길게 이어졌다. 구불구불 침대를 가로지르고 흐른 사슬의 종점은 침실 벽이었다. 침실 벽면에 단단히 쐐기를 박아 그곳에 수갑을 연결해 둔 거다. 팔을 당겨 보면 찰그랑찰그랑 소리가 난다.

    ‘하. 재갈도 물려 놨네.’

    구속당한 건 손뿐만이 아니었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는지 권재진의 입이 막혀 있었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막대를 끼워 놓고 가죽 띠를 머리통에 둘러 고정해 둔 형태였다.

    ‘오해를 풀려면 대화를 해야 하는데, 이래선 말을 못 하잖나……. 씨발.’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설명하겠다고 밝혔는데도 권재진의 해명을 듣지 않고 묶어 버린 서의우가 야속했다. 물론 서의우의 입장에서 보면 권재진이 갑자기 불 지르고 기억 없애지 말라고 시위한 꼴이긴 하다. 옥상 난간에서 떨어지려 한 것도 봤을 테고…… 흥분할 만하긴 하다.

    ‘아무리 그래도 해명 정도는 들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이유가 있으니 그런 짓 했을 거라고 생각 안 하나? 게다가 방화한 것도, 어차피 이사 가기로 했으니 집도 좀 태울 수도 있지, 까짓…….’

    술 먹고 홧김에 저지른 일이라고 하면 믿어 주려나.

    왜인지 그때는 서의우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앞뒤 상황 잴 것 없이 불러내서 직접 마주 보고 얘기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냥 그때 당장 서의우가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엿새 동안이나 안 돌아오니까. 불안하니까……. 도저히 서의우가 임무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이 넓은 집에 홀로 주저앉아 기다릴 수 없었다.

    ‘결국엔 2회차도 수갑 신세로군…….’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권재진의 기억이 멀쩡하다는 사실이다. 그마저도 서의우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지워질 위험이 있긴 하다만.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기 전에 서의우를 설득해야만 했다.

    ‘하…… 이게 이렇게까지 꼬일 일인가. 2회차 인생은 이지모드일 줄 알았는데, 똑같이 하드모드라니. 난이도 조절 무슨 일이지.’

    재진이 속으로 한숨 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몸에서 힘을 빼고 침대에 가만히 드러누웠다. 보아하니 지금이 정말 중요한 시점 같았다. 서의우가 돌아왔을 때 어떻게 대응하냐에 따라 앞날의 명운이 판이하게 갈릴 터였다.

    권재진은 여러 수를 떠올려 보며 서의우를 기다렸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내려 불에 그을리고 물에 젖은 옷을 걸친 자신을 보았다.

    몸이 오슬거리고 추웠다.

    취기에 열이 올랐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다만 술에서 깨고 났더니 슬금슬금 추위가 느껴졌다. 하물며 젖은 채로 가을 바닷바람을 맞기까지 했으니 감기 든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나 참, 가지가지…….’

    재진이 피실거리며 묶인 팔목을 흔들었다. 순은 사슬이 짤랑대며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그로부터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허공에 빛 방울이 번쩍이며 퍼졌다. 무균이동실에서 나온 서의우가 곧장 이리로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체 없이 벌컥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생각보다 돌아오는 게 늦었네요. 잘 기다리고 있었어요?”

    수습할 일이 많았는지 서의우는 아직 만신창이었다. 지금 보니 옷도 꽤 상해 있었다. 흉통을 가로지르고 전투복이 찢긴 흔적이 있고, 등판도 너덜너덜하게 뚫려 있었다.

    헤집어진 옷깃 위로 쭉 뻗은 서의우의 목선이 보였고, 목에서부터 귀까지 큰 상처가 있었다. 귀가 아예 날아갈 만큼 큰 부상이지만, 힐링 팩터를 주사하긴 했는지 조금씩 새살이 돋고 있었다.

    그가 픽, 싱겁게 웃으며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긴 허벅다리를 적당히 벌려 앉은 자세로 숨을 골랐다. 잠시 쉬는 것 같았다. 서의우도 꽤 지친 모양이다.

    “경황이 없어서 재진 씨 소변줄 달아 주고 가는 걸 잊었어요. 혹시 화장실 가고 싶었어요?”

    재진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그 옷부터 벗겨 줄게요.”

    다 젖었으니까.

    서의우는 착용하던 가죽 장갑을 이로 물어 벗은 뒤 재진에게로 손을 뻗었다. 덜 마른 옷가지가 권재진의 근육 형태를 따라 달라붙어 있었다. 서의우가 느릿하게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하의와 브리프를 한데 잡고 돌돌 말아 내리며 벗겼다.

    상의도 마찬가지로 돌돌 말아 올렸지만, 수갑 사슬에 걸려 완전히 벗겨 낼 순 없었다. 서의우는 망설임 없이 티셔츠를 찢었다. 옷 솔기를 따라 하얀 천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뜯겼다.

    “젖어서 차갑네요. 추워요?”

    이번에는 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의우가 체온을 재려 권재진의 몸 곳곳을 만져 보았다. 목덜미를 만지고, 뺨을 만지고, 이마를 짚어 보려 하자 권재진이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피했다.

    명백한 반응을 보고 서의우가 두 눈을 깜빡였다. 회색 눈동자에 날이 섰다.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그가 권재진의 머리통을 잡아 쥐었다. 머리칼 사이에 손갈퀴를 박고 기어이 이마에 손바닥을 붙였다. 체온을 확인한 후 순순히 놔줬다.

    “안 지운다니까.”

    “…….”

    “아니지. 내 말을 못 믿어서 그러나요? 하긴 그렇겠네요. 이젠 믿을 리 없겠죠.”

    “…….”

    “그래도 재진 씨…… 나 너무 미워하진 말아요.”

    권재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목격한 서의우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래요 또. 권재진 씨답지 않게.”

    “…….”

    “막상 묶이니까 후회돼요? 내가 이번에도 봐줬으면 좋겠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풀어 주고 그냥…… 전처럼 재진 씨 환심 사려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재진이 고민해 보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뒤 고개를 저었다.

    서의우는 또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어렵다니까. 권재진 씨 무슨 생각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가끔 그 머리통 잘라서 열어 보고 싶곤 해요. ……내가 텔레파시도 할 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서의우는 젖은 옷을 치우고 이불과 시트도 새것으로 갈아 주었다. 침대를 정돈할 동안 권재진은 서의우의 이능으로 허공에 살짝 떠 있었다. 끝나고 나니 내려 준다.

    “이제 다리 벌려요. 카테터 넣어 줄게요.”

    권재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멀뚱히 서의우를 쳐다보고만 있자, 서의우가 재진의 무릎을 잡고 좌우로 벌렸다. 권재진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인상을 썼다.

    기어이 소변줄을 달아 줄 심산인가 보다.

    물론 각성자들은 힐링 팩터가 없을 경우의 전투 상황도 훈련하기 때문에 전반적인 의료 지식이나 기술은 필수로 익히고 있었다. 한번 게이트에 들어가면 게이트의 핵인 게이트 코어를 부수고 나오기까지 한정적인 물자로 버텨야 하므로, 다치거나 의식 잃은 동료를 응급 처치 하고 치료하고 간호하는 것도 각성자의 주요한 임무였다.

    그러니 서의우는 멸균 카테터 활용법도 완벽히 숙지하고 있고, 예상 이상으로 너무 잘 다뤄서 충격적일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좆구멍에 실리콘 도뇨관을 삽입당하는 게 유쾌할 리 없었다.

    가이딩은 서의우가 먼저 좋아 죽겠다고 시끄럽게 날뛰니까 도리어 침착해지고 별생각이 안 들지만, 요도 구멍에 카테터를 삽입하는 건 그렇지 않았다. 서의우는 아무렇지 않은데 권재진만 쑤셔지는 거고, 서의우는 침착한데 권재진만 동요한다. 그 점이 기분 나빴다.

    ‘씨발, 진짜, 아오…….’

    수치를 버티지 못한 권재진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귀 끝이 미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거부하는 뜻을 내비치자 멸균된 일회용 장갑을 든 서의우가 권재진을 힐긋 살폈다. 손에 장갑을 착용하면서 단조롭게 질문했다.

    “싫어요? 하지 말까요?”

    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이런 짓, 재진 씨가 좋아할 리 없죠……. 나도 알아요.”

    권재진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서의우가 다소 거친 동작으로 멸균 카테터 포장을 뜯고 식염수 뚜껑을 땄다.

    “있죠.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서의우가 한 손으로는 재진의 것을 쥐고 요도 구멍이 잘 드러나게끔 말랑한 표피를 엄지로 내려 당겼다. 가이딩이었다면 맨손으로 만졌을 걸, 일회용 멸균 장갑을 착용하고 건드리니 감촉이 달랐다.

    빠끔 드러난 조그만 좆구멍에 서의우가 카테터 끄트머리를 맞추었다. 말랑한 실리콘 재질인 길고 투명한 관이 좆 앞머리를 톡 건드렸다. 권재진이 흠칫거리며 허리에 힘을 주었다.

    “그냥 재진 씨 기억 지우고, 예전처럼 지내면 안 될까요, 우리……?”

    권재진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왜요, 우리 좋았잖아요. 이번만 지워요, 그냥.”

    권재진이 계속 고개를 저었다.

    “하, 있잖아요, 권재진 씨는……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권재진이 흔들던 고개를 멈추었다. 서의우가 숨죽여 읊조렸다.

    “난 권재진 씨 에스퍼예요. 재진 씨 몸뚱이에 닿는 것만이 내가 바라는 전부라고요. 알고는 있나요……? 이게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열망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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