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27)화 (27/154)
  • #27

    복도 중간쯤 멈춰 서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관을 눈에 담았다. 매캐한 연기는 잿빛이고 넘실대는 불꽃은 샛노랬다. 제1 거주지역 부유층이나 누릴 법한 격 있고 정제된 모노톤 거실이 화염에 휩싸였다.

    ‘음. 휘발유로 불 지르면 이런 느낌인가.’

    이윽고 천장이 자동으로 열리고 간격을 맞춰 설비된 스프링클러가 일제히 튀어나왔다.

    화재를 진압하니 긴급 대피하라는 안내음이 들리면서 물벼락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연기가 사그라들고 불길도 죽어 갔다. 권재진은 벽면에 떠오른 야광 화살표 표시를 따라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평상시에는 매립 설계로 벽에 가로막혀 있어 드러나 보이지 않던 비상용 엘리베이터가 활짝 열려 있었다.

    화재 시에는 계단을 이용하는 게 상식이지만, 이 엘리베이터는 방화 설비가 된 비상 탈출용이라 안전했다.

    권재진은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부 버튼은 단 두 개뿐이었다.

    위로 갈까. 아래로 갈까.

    물론 2회차 권재진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면 패닉룸이다. 외부로 통하는 문과 통로가 있지만, 서의우가 아니면 못 열어. 생체 인증 등록된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비상 대피소, 완전 폐쇄 가능한 지하 벙커니.’

    그렇다면 위로 가야 할까?

    ‘위로 올라가면 옥상. 탈출용 헬기가 있지만 난 다룰 줄 모르지.’

    그래서 결국 1회차 권재진은 옥상에서 투신하려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나타난 서의우가 낙하 중인 권재진을 허공에서 붙잡았지만.

    그러게 글쎄, 서의우에게선 탈출 못 한다니까.

    이젠 그럴 마음도 없고.

    권재진은 ‘△’ 버튼을 눌러 옥상으로 향했다.

    푸르른 바다가 펼쳐져 보인다.

    오늘따라 하늘이 맑아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권재진은 잘 정비되어 있는 헬기를 힐긋 쳐다보곤 옥상 난간 끄트머리로 향했다. 해안가 절벽 끝에 지어진 서의우의 대저택은 건물 전체가 바다를 향해 있었다.

    이 아래로 떨어지면 커다란 암초에 두개골이 박살 나거나 파도 소용돌이에 휩쓸려 바로 익사할 터다.

    ‘이야, 권재진 대단했네. 겁 없었다. 진짜.’

    두 팔로 난간을 짚은 재진이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짠 기 올라오는 바닷바람에 알코올 냄새, 휘발유 냄새가 날아가게 두었다. 그러다 슬슬 오지 않으려나 싶어 이름을 불렀다.

    “서의우.”

    아, 아직인가?

    얘 왜 이렇게 늦어.

    “서의우 씨.”

    시간 참 더디게 흐른다.

    눈 감았다 떴을 때 서의우가 권재진 앞에 나타나 있으면 좋겠다.

    “의우야…….”

    아니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야 하는 걸까. 그래야만 서의우가 나타나 주나.

    권재진은, 온갖 진창을 거쳐 도달한 이곳에 꼿꼿하게 다리를 세우고 서서, 다시금 처음부터 서의우와 정면으로 맞서길 택했다. 뛰어내려야 한다면 뛰어내릴 것이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면 밝힐 것이다.

    가을 바닷바람이 싸늘했고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은 드높았다. 공활한 아래, 지상의 저편을 내다보며 세상에 홀로 섰노라 체감했다. 군중 속 1인이 아닌, 발밑이 무너지고, 고독하고, 외따로 선 권재진이다.

    자각하자, 세상이 달라진 것만 같았다.

    파도에 햇살이 아스러지는 윤슬이 빛의 파편처럼 반짝였다. 눈부시게 고혹적인 광경에 시선을 멀리 두고서 진심으로 감동했다. 바다는 어느 때고 그 자리에 있었으나 새삼스레 깨닫는다. 조급한 마음에 아등바등했던 1회차에서는 보지 못했던 주변이 보였고, 모든 것들이 가감 없이 감격스러웠다.

    진실로, 2번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권재진이 해안 절벽 아래, 이끼 낀 암초에 부딪혀 하얗게 거품 내는 파도를 내려다보았다. 힘주어 노려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는 권재진의 결의와 진심, 그리고 진실의 편린이 담긴 첫 번째 표출이었다.

    그렇게 재진이 마음을 담아 웃으며, 추락하려던 순간,

    빛이 번쩍거렸다.

    공중에 퍼진 빛 방울을 헤치고 서의우가 나타났다.

    전투 중에 무단으로 이탈한 것인지 그는 피투성이였다.

    귀 한쪽이 날아가 있고, 허벅다리에 커다란 철근 파편 같은 게 깊게 박혀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부상이 심각해 보였다. 대리석 조각상 같은 아름다운 얼굴을 잔인하게 더럽힌 채 저러고 있으니 서느렇다 못해 그로테스크했다.

    “재진 씨, 뭐 해요.”

    서의우가 머리에 쓴 고글을 거칠게 벗으며 다가왔다. 고글 화면에 홀로그램 영상이 떠 있고 음성 송수신기가 달려 있었다.

    “집에 불났어요? 아님, 불냈어?”

    “……진정합시다. 별일 없었습니다.”

    “다친 데는.”

    서의우가 고글 전원을 틱 껐다. 그의 몸에 박힌 철근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가슴 포켓에서 힐링 팩터가 튀어 올랐다. 힐링 팩터 뚜껑을 딴 서의우가 권재진의 목에 곧장 바늘을 꽂아 주사했다. 새파란 물약이 핏줄로 빨려 들어갔다.

    “도망치려 했어요? 뛰어내리려고…… 죽으려고……? 뭘, 대체 무슨 생각인 건데! 미쳤어요?”

    서의우가 거침없이 다가와 권재진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고도 모자라는지 멱살을 잡고 질질 끌어내 난간에서 떨어지도록 했다. 피 칠갑인 서의우에게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고, 스프링클러 세례를 받은 권재진에게선 찬물이 흘렀다.

    “보다시피, 서의우 씨 이렇게 불러내려 한 것뿐입니다.”

    재진이 서의우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들고 막았다. 서의우의 미려한 뺨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를 마뜩잖게 살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할 말이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렇겠죠. 할 말, 당연히 있을 테지.”

    “중요한 얘깁니다. 기억 없애지 마세요. 지우지 마세요. 지금부터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재진 씨는, 지금 내가 들을 말이 그런 거라 생각해요……?”

    “다 연관이 있는 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미리 경고해 놓지 않으면 서의우 씨는 분명 또 멋대로 제 머리 건들려 할 거잖습니까.”

    “하, 지금 내가 건들고 싶은 건 권재진 씨 머리가 아니라 그 입 같은데요.”

    서의우가 공분하며 윽박질렀다. 단숨에 공기 흐름이 뒤틀렸다.

    그에게서 떨어지던 핏방울들이 기이하게 오르내리며 진동했다. 아래로 떨어져 옥상 바닥을 더럽히지 않고 허공으로 솟구치며 서의우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가 내뿜는 위압이 대기의 밀도를 바꾸었다. 달라진 환경에 숨을 내쉬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힘을 사용했는지 재진의 턱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붙잡혔다. 움직일 수 없었다.

    서의우는 필요 이상 난폭했다. 마치 처음 만났던 날 같았다.

    “내 생각에, 재진 씨는 입을 좀, 가만히 둘 필요가 있어요. 어차피 혓바닥 깨물기나 하는 입인데…….”

    권재진은 서의우의 염동력에 저항하며 끈질기게 말했다.

    “그, 끄, 사람, 사귀었……던, 사람, 그거…… 서, 서의, 윽…….”

    “포기하고 입 벌려요. 그 이빨 서른 개 다 뽑고 싶다는 생각 들기 전에.”

    “크, 흐, 아악!”

    “네…… 나쁘지 않은 생각일지도요. 시험 삼아 한 개쯤은 뽑아도 되지 않나.”

    턱을 잡아 붙든 보이지 않는 힘이 배로 강해졌다. 입뿐만이 아니라 몸도 붙들렸는지 팔다리 꼼짝할 수 없고, 하물며 눈꺼풀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더는 말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서의우가 가죽 장갑 낀 손가락 두 개를 권재진의 벌어진 입 안에 욱여넣었다. 이건 가이딩이 아니었다. 장갑을 착용한 상태론 점막 접촉을 할 수 없고, 가이딩도 되지 않는다.

    깊게 밀고 들어간 손가락이 왼쪽 아래 사랑니를 툭 짚었다.

    “서른 개 아니고 스물아홉 개. 개수 적어진 거 나만 알 거고…….”

    올록볼록한 어금니 위쪽 형태를 차근히 더듬다가 이번엔 오른쪽 아래 사랑니로 옮겨 갔다.

    “사랑니 하나 없더라도 지내는 데 지장 없겠고…….”

    느릿하게 문지르는 손동작이 마치 두 쪽 중 어느 것을 뽑아낼지 가늠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간 그러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서의우가 섬뜩한 눈으로 물끄러미 재진을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그의 회색 눈동자가 바로 보였을 터인데, 지금은 피에 젖어 가라앉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눈가를 어둡게 가리고 있었다.

    그림자 진 눈두덩이 안쪽에 송골송골 핏물 맺힌 속눈썹이 언뜻 엿보였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살기 어린 동공이 숨죽이고 도사린 모습이 보였다.

    “나…… 정말 모르겠네. 한 번은 넘어가도 두 번은 없다고 경고했을 텐데요…….”

    서의우가 흉포한 눈빛과 달리 나긋하게 속삭였다.

    일부러 꾸며 낸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재진 씨, 수갑 묶이고 싶어요……? 아니면, 내가 그런 짓 못 할 거라고 낙관하는 거예요……? 날 믿어요?”

    “크윽…… 너, 너…….”

    “난 권재진 씨 단 한 번도 믿은 적 없는데.”

    “…….”

    “믿었다기보단, 봐준 거지…….”

    서의우가 기다란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고 권재진과 시선을 맞추었다. 한참 그러고 보더니 싱겁게 픽 웃었다.

    “기절시킬게요. 봐주는 거 이제 끝. 화재 뒷수습하고, 무단이탈 징계받고 돌아올 때까지 자고 있어요.”

    서의우는 망설이지 않고 권재진의 목을 졸랐다. 처음엔 명치를 때려 기절시키려 했으나 힘 조절을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었다. 지나치게 힘을 실어 때리면 이능이 섞여 권재진의 몸뚱이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힐링 팩터가 있긴 하지만, 자칫 실수로 죽이면 안 되니까.

    생리적인 반응으로 펄떡거리던 권재진의 육신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아래로 늘어지는 몸을 한 팔로 떠받치며 서의우가 속삭였다.

    “기억…… 안 건드리는 대신 묶어 둘 테니까 그런 줄 알고.”

    “…….”

    “이따 봐요.”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