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21)화 (21/154)
  • #21

    ‘나도 알아……. 안다고.’

    1회차 서의우와 2회차 서의우는 다르다.

    같은 사람이지만 아직은 같지 않았다.

    ‘서의우 니가 연애 같은 걸 몰라……? 그딴 건 굳이 하고 싶지도 않다고……?’

    싫다는 사람 붙들고 끈질기게 매달렸던 게 누군데.

    자기 좀 봐 달라며 비참하게 눈물 흘렸던 게 누군데.

    ‘너는…… 넌……. 내가 널 잊으면……. 너는…….’

    이 멍청아…….

    ‘두고 보자. 진짜…….’

    권재진은, 서의우가, 무릎 꿇고, 눈물 뚝뚝 흘리면서, 제발 사귀어 달라고 애원하기 전에는…….

    그전까진 절대로…….

    권재진은,

    절대,

    단 한마디도……!

    ***

    태블릿 화면이 현란하게 넘어갔다.

    거대한 저택의 거대한 거실. 모델 하우스 같은 모노톤 인테리어로 꾸며진 드넓은 공간에서 권재진은 돈지랄이 스트레스 해소에 얼마나 크게 이바지하는지 몸소 체험하는 중이었다.

    소파에 배를 깔고 드러누운 재진은 온갖 사이트를 넘나들며 쇼핑에 열을 올렸다. 지난번에는 아예 과소비할 작정으로 부러 관심도 없던 명품 브랜드 위주로 쇼핑했다만, 사실 그것들은 사 놓고 포장을 뜯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실용성 있는 기구 위주로 장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예를 들면, 러닝머신이라거나.

    아예 홈짐을 차릴 생각으로 웨이트 머신도 종류별로 골랐다. 레그 익스텐션, 레그 프레스, 버터플라이, 숄더 프레스, 체스트 프레스, 업도미널 크런치, 롱풀.

    운동 기구는 고가라 개당 이삼백만 원쯤 했다. 그래도 서의우의 계좌잔고 850억 원을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을 따름이다. 바벨과 케틀벨까지 주문했는데도 꼴랑 몇 천만 원밖에 쓰지 못했다니.

    ‘드넓은 백사장에서 삽으로 모래를 조금 퍼다 쓰는 것 같군. 티도 나질 않아.’

    850억 중에 권재진이 1억을 쓰더라도 잔고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계산해 보면, 전 재산이 8천 5백만 원인 사람이 돈 10만 원 쓰는 것과 동일한 비율이니까.

    게다가 권재진이 서의우의 돈을 쓰는 속도보다 서의우가 버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억대 월급 꼬박꼬박 꽂히지, 위험 수당에 추가 수당에 출장비 별도에 상여금까지……. 게다가 은행에 무심하게 쌓아 둔 잔고뿐 아니라 어디 투자한 것도 있는지 분기별로 배당금이 와르르…… 방송에 서의우의 자료 화면 송출되면 각성자 전용 정보전송사용료가 또 와르르…….

    서의우는 그냥 걸어 다니는 기업이었다.

    임무 중 사망하지 않는 이상 은퇴할 일 없는 정년 보장 평생 기업.

    ‘이거 씨, 신축 주택이 아니라 빌딩 한 채를 지어 달라고 할 걸 그랬나…….’

    돈도 써 본 사람이 쓸 줄 안다고. 평생 제6 거주지구에서 월급쟁이 서민으로 살았던 권재진은 소비의 스케일이 작았다. 지난번에도 바이크가 아니라 스포츠카 같은 걸 샀어야 했다.

    ‘아니면 헬기라거나. 경비행기…….’

    쯧, 대차게 혀를 찬 재진이 태블릿 화면을 꺼 버렸다.

    물건을 되는대로 사 재껴도 그다지 기분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찔끔찔끔 써 봤자 서의우에게 타격도 없을 테고. 스트레스를 풀기는커녕 배알만 꼬인다.

    재진이 태블릿 화면에 이마를 꿍 처박았다.

    서의우는 항상 짜증 났지만, 오늘따라 더 심히 짜증 났다.

    <말끔히 잊어버리는 게 나을 거예요.>

    <운 좋게 억지로 재회한다 하더라도…… 예전 같지 않을 테니까요.>

    사실, 권재진은 이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회의가 든다.

    어쩌면, 서의우의 말이 옳은가 싶어서.

    ‘……하.’

    그냥, 전부 포기해 버릴까.

    ‘미련이라.’

    권재진은 어째서 기억도 없는 서의우를 붙들고 혼자 낑낑대고 있는 걸까.

    어째서 또다시 그 새끼의 애인이 되려 하고, 그 새끼를 마음에 품어 주려 하는 걸까.

    ‘서의우가 뭘 잘했다고. 뭐가 예쁘다고…….’

    실상, 권재진은 그냥 살아남기만 하면 그만이다.

    4년 후 터질 게이트로부터 무사히 생존하고 화려한 2회차 인생 사는 것. 그것이 권재진의 첫 번째 목표였다.

    뜻만 이룰 수 있으면 딱히 서의우와 사귀든 사귀지 않든 상관없다.

    ‘어차피 이사 가기로 얘기 끝냈고, 이 집을 떠나기만 하면 자동으로 게이트도 회피하게 될 테니…… 난 죽지 않겠지.’

    보다시피, 2회차 권재진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살아남는 것.

    ‘거기에 덤으로 서의우의 자산도 자유자재로 쓰고 있고. 이룰 건 다 이뤘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런 와중에, 홀로 고통받아 가면서 서의우를 어르고 달랠 필요가 있을까? 대체 누구 좋으라고. 서의우 좋으라고?

    그런 호구 짓…… 굳이 할 필요가 있나.

    ‘그래, 서의우 말대로 과거는 그냥 깔끔하게 잊고…… 2회차 인생 새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서의우와 애인 관계가 될 필요 없이. 그냥 깔끔하고 담백하게. 가이드와 에스퍼 관계로 새로이 정착하는 거다.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필요한 협력은 얻어 낼 수 있고, 장기적으로 보면 사귀는 것보다 오히려 더 안정적일지도 모른다.

    ‘비즈니스 파트너로 지내게 되려나. 회사 동료처럼.’

    어차피 지금은 서의우도 딱히 연애 감정 따위 없어 보였다. 당장 서의우의 정신머리는 온통 가이딩으로만 가득했다. 행복하다느니 좋다느니 종종 넋 나간 소리를 하지만 그 감정은 가이딩을 향한 갈망이지 권재진이란 인간을 향한 애정은 아닐 터였다.

    그 증거로 서의우는 권재진의 특이점을 진즉 눈치챘음에도 더 깊이 캐묻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는지, 권재진이 서의우를 어떻게 아는지 등은 서의우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게 가이딩만 받아 낼 수 있으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 이거겠지.’

    권재진이 서의우와 무슨 사이였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면 집요하고 끈질기게 추궁하며 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의우는…… 권재진의 진실을 알아내기보다도 미심쩍은 의문 거리는 뒤로 제치고서 권재진의 환심을 사는 쪽을 택했다. 환심을 사서 가이딩 받으려고.

    ‘그래…… 서의우도 나한테 별 마음 없는데, 나도 뭐……. 까짓…… 그 새끼에게 괜히 마음 쓸 필요 있나.’

    권재진이 태블릿을 끄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TV 볼륨을 키운 뒤 채널을 하나씩 돌렸다. 뉴스 채널에 이어 홈쇼핑 채널이 나왔고 다큐멘터리 채널로 이어졌다. 일반인의 일상을 그린 흔하디흔한 드라마나 영화 채널은 특수 거주지구에선 송출되지 않는다.

    마침 우주 다큐멘터리가 방영 중이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겠다만 그 채널에 자연히 멈추게 되었다. 흑과 백의 명암만으로 이루어진 우주 공간이 현실과 동떨어져 보였다. 색 빠진 검은 공간에 하얀 은하수가 반짝거린다.

    그곳은 거대하고 장엄한 상위 세계였다. 에스퍼나 가이드가 없는 세계. 게이트 임팩트나 크리처, 인류의 전쟁과 무관한 세계. 권재진이 처한 상황과도 머나먼 거리가 있다. 이 우주에 비하면 권재진의 고민거리는 티끌보다도 하찮게 느껴졌다.

    재진은 토성이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82개의 위성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을 흘려들었다. 타이탄, 엔셀라두스, 미마스, 디오네, 이아페투스, 테티스, 히페리온, 에피메테우스……. 줄줄 늘어지는 위성의 이름조차 난해하고 복잡하여 비현실적이었다.

    “뭐 봐요, 재밌어요?”

    한창 현실을 잊고 우주 공간으로 도피하고 있는데, 서의우가 젖은 머리를 털며 나타났다. 힐긋 눈을 치떠 돌아보자 반라 차림의 서의우가 보였다. 샤워를 갓 마치고 왔는지 그에게서 시원한 샴푸 향이 풍겼다.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만 느슨하게 걸치고 상의는 입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재진 씨 이런 거 좋아하나요?”

    느른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여간 눈길을 사로잡는 게 아니었다.

    긴 다리를 느적느적 뻗는 모습은 배부른 사자처럼 여유롭기 짝이 없어 보이고, 대칭을 이루어 조형적으로 갈라진 복근과 가슴 근육은 다비드 상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거기에 사르르 미소 띤 앳된 얼굴은 뽀얗고, 휘어진 눈매는 맑고 청순하고, 덜 말려 곱슬기가 가라앉은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모습은 관능적이었다.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틀어 놓는 거지.”

    “그래요? 그런 것치곤 꽤 집중해서 보는 것 같던데요.”

    기다란 눈을 휘어 웃으며 다가온 서의우가 당연하다는 듯 권재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팔을 뻗어 재진의 허리를 감싸 안고 제 가슴팍에 기대도록 끌어당겼다.

    권재진이 서의우에게 기대어 그를 올려다봤다. 낮은 각도에서 보아도 깎아지른 턱선에 군살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서의우의 체지방률은 어느 정도일까. 5, 6%대 정도로 추정해 본다. 헬스광 같은 생각을 하며 권재진은 무심결에 그의 복근을 훑어보았다. 복직근, 외복사근, 늑간근, 전거근을 물끄러미 보다가 속으로 혀를 차곤 고개 돌려 TV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기껏 현실을 벗어나 토성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서의우가 나타나자마자 어그러졌다.

    ‘미련까지는 잘 모르겠고…… 이제라도 서의우에게 붙은 정을 좀 떼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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