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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22)화 (22/154)
  • #22

    권재진이 서의우에게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소파 끄트머리로 자리를 옮겨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았다.

    “재진 씨?”

    “아 좀, 자세가 불편해서 말입니다.”

    “그랬나요.”

    서의우가 다시 권재진의 옆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불편하다는 말을 무시하듯 재진을 껴안고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애교부리듯 뺨을 비벼 댄다. 널따란 소파를 두고 덩치 큰 성인 남자 둘이 모서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꼴이 우스웠다.

    권재진이 엷은 한숨을 내쉬며 서의우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평소에도 달라붙어 지낼 필욘 없잖습니까. 가이딩은 매일 빠짐없이 하고 있으니 부족하지 않을 텐데요.”

    “에이, 그래도요.”

    “그래도는 뭐가 그래돕니까.”

    서의우가 혀를 내밀어 제 얼굴을 밀고 있는 재진의 손바닥을 핥았다. 쪽 소리 내며 키스하곤 손가락을 가볍게 물었다. 자근거리며 속삭였다.

    “알잖아요. 난 재진 씨랑 닿고 싶어요. 이런 내가 귀찮아요?”

    “예, 지금은 좀 귀찮습니다.”

    “으음……. 재진 씨 태도가 변했네요, 갑자기. 선 긋는 것 같아요.”

    서의우가 권재진의 손마디에 입술을 다정하게 비비며 그의 속내를 가늠해 보듯 진득하게 살폈다.

    곧게 펼쳐진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로 서의우의 얼굴이 언뜻언뜻 엿보였다.

    들뜬 것처럼 분홍빛으로 상기된 뺨은 첫사랑을 겪는 소년처럼 보이는 주제에, 내리뜬 회색 눈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번들거리는 사나운 눈빛은 숱한 목숨이 죽는 광경을 보고, 또 숱한 목숨을 죽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살기 어린 눈이었다. 냉정하고 차갑다. 판단이 빠르며 직감적으로 올바른 결론을 도출해 낸다.

    “저기요, 재진 씨. 혹시…… 그 사람 생각해요?”

    “…….”

    “그, 애인이라던 사람?”

    권재진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만 서의우는 정답을 확신했다. 그가 쿡쿡거리고 웃음을 흘리며 재진의 팔꿈치를 쥐어 당겼다.

    권재진이 서의우를 재차 밀어 냈지만 서의우는 우악스럽게 그를 품에 가두어 안았다.

    “뭐, 새삼스레 나랑 비교되기라도 하나요? 재진 씨 몸을 이렇게 서슴없이 만지고 달라붙고 하는 게요. 재진 씨 과거에 그 사람이랑 어지간히 붙어 지냈나 보죠?”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이거 놓으십시오, 서의우 씨.”

    권재진이 불쾌한 투로 말을 내뱉었다. 어조를 가다듬을 겨를이 없었다.

    “그냥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의우는 웃는 낯으로 권재진을 힘주어 껴안고서 5초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서의우 씨, 대체 뭡니까? 놓으라고 했습니다.”

    “넷, 다섯…….”

    “왜 이러는…… 저랑 장난합니까?”

    “하하, 네. 장난 맞아요. 귀찮다고 하니까 한번 진짜로 귀찮게 굴어 봤어요.”

    서의우가 느슨하게 힘을 풀었다. 권재진이 서의우의 팔을 풀어내고 품에서 빠져나왔다. 소파에서 일어나 멀찍이 떨어져 선다.

    “그런 장난 재미없습니다.”

    태블릿을 챙겨 든 권재진이 침실로 들어가려다 걸음을 멈추곤 2층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방향을 틀었다. 토성의 위성을 세며 현실 도피하긴 글렀으니 2층 방에 쌓아 둔 물건들이나 뒤적이며 현실 도피 해야지 싶다.

    “재진 씨, 어디 가요?”

    “제 방에 갑니다.”

    “TV는 더 안 보고요?”

    “예, 서의우 씨도 안 볼 거면 그냥 끄십시오.”

    “난 재진 씨랑 같이 보고 싶은데……. 이제 장난 안 칠 테니 같이 볼래요?”

    “아닙니다. 딱히 보고 싶던 방송도 아니라, 방에 쌓아 둔 택배 상자나 풀어 보렵니다.”

    “그럼 그거 도와줄까요? 상자 뜯는 거 내가 하면 금방인데.”

    “됐습니다. 혼자 할 겁니다.”

    “재진 씨.”

    “또 뭡니까, 예?”

    끈덕지게 말을 거는 서의우가 성가신 탓에 권재진이 으르렁거리며 뒤돌아보았다. 서의우는 미소를 지운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동공이 찰나에 다소 섬찟하게 보였으나, 곧 부드럽게 휘어져 착각인가 싶었다.

    “재진 씨, 내 가이드죠. 그렇죠?”

    “……예? 예.”

    “응. 기뻐요.”

    “…….”

    “정말 좋아요.”

    싱겁게 말을 마친 서의우가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렸다. 집요하게 달라붙어 2층까지 따라온다고 할 줄 알았는데 거실에 혼자 남아 TV를 보려는 모양이다. 권재진은 서의우의 뒷모습을 탐탁스럽지 않게 쳐다보고는 등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탔다.

    결론은 역시나 가이드다.

    가이드이기만 하면 된다는 거다.

    서의우는 권재진에게 그 이상의 역할은 바라고 있지 않다. 심리가 너무나도 명백히 드러나 보여서 허무할 지경이다.

    권재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2층에 도착하고서도 한동안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혹여 서의우가 뒤쫓아올까 싶었으나, 서의우는 끝까지 따라오지 않았다.

    ***

    꿈속에 드넓은 우주가 보였다.

    공간과 시간, 행성, 항성, 은하, 모든 물질과 에너지를 포함한 초월적 무대. 흑과 백의 명암이 명징하게 갈라진 원초의 세계.

    그중에서도 커다란 고리를 띤 토성이 있었다. 82개의 위성이 복잡한 궤도를 그리며 토성 주변을 제각각 움직였다. 그것들을 홀로 주시하며 관찰하고 있자니 옆에 그리던 누군가 나타났다.

    서의우다.

    가르마를 왼쪽으로 탄 서의우. 24살의 서의우. 권재진에게 고백했던 권재진의 서의우.

    190cm를 훌쩍 넘어서도록 크게 자란 그가 다정하게 웃으며 재진을 불렀다.

    ‘재진 씨, 여기에 있었어요? 나 한참 찾았는데…….’

    그의 음성이 들리자 광활한 우주가 허물어지고 둘만이 남았다.

    여전한 목소리였다.

    밝게 비추는 태양 빛처럼 강렬하고, 따뜻하고, 오롯이 권재진 한 사람을 향해 쏟아지는 마음이 그득 담긴 목소리…….

    ‘왜 인사도 없이 가 버렸나요. 아무리 급해도 작별 인사 정도는 했어야죠. 응?’

    24살의, 권재진이 알던 서의우가 재진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꿈에서나마 그를 볼 수 있어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꿈이기에 더 허무하다고 해야 할지. 권재진은 상반된 감정을 내리누르며 서의우의 손을 맞잡았다.

    아니, 맞잡으려 했다.

    권재진이 닿자, 서의우의 손이 실체 없이 투명해지며 사라졌다. 서의우가 특유의 반들반들한 회색 눈을 휘며 눈웃음쳤다.

    ‘아, 이것 봐요……. 재진 씨가 조급하게 굴어서 내가 이렇게 되어 버렸잖아요.’

    권재진이 조급해서?

    무슨 소리지?

    재진이 허망한 눈망울을 들어 서의우를 응시했다. 서의우는 사라진 손을 여봐란듯이 들어 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린다.

    ‘왜 깨닫지 못하는 걸까……. 아직도 모르겠어요?’

    ‘모른다니, 뭘.’

    권재진이 멍하니 되물었다.

    이번엔 권재진이 닿지도 않았는데 서의우의 몸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유령처럼 반투명해지며 서서히 옅어졌다.

    ‘권재진 씨는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서 날 죽인 거예요.’

    서의우의 모습뿐 아니라 그의 목소리마저도 옅어졌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멀게 들린다.

    ‘직접 미래를 바꿨잖아요. 적극적으로 나서서 20살짜리 서의우를 멋대로 흔들어 놨잖아요.’

    ‘…….’

    ‘죽을 예정이던 사람이 살게 되었는데, 다른 예정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일까요? 나는요? 내가 예전 그대로일 것 같나요?’

    ‘…….’

    ‘이렇게 미래가 틀어졌는데, 서의우가 아직도 권재진 씨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재진 씨에게 고백할까요? 글쎄요. 난 잘 모르겠는데…….’

    ‘서의우. 의우야.’

    ‘재진 씨가 날 죽였어요. 내가 재진 씨에게 품었던 감정, 그 불꽃이 틔워질 싹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어요. 난 이제 두 번 다시 권재진 씨 앞에 나타나지 못할 거예요.’

    24살의 서의우. 권재진의 애인, 연인, 소중한…… 그게 뭐든…….

    ‘그렇대도 난 이해해요. 나보다 재진 씨 목숨이 우선이긴 하죠.’

    권재진의 과거이자 미래가 사그라졌다.

    ‘잘 지내요.’

    찬란하게 빛나던 24살의 서의우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옅어져 모습을 감추었다. 사라진 그의 자취를 쫓아 권재진은 텅 빈 우주를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토성도, 위성도 보이지 않는 공허한 그곳엔 서의우도 없었다.

    권재진의 서의우가 없었다.

    단지 드넓을 뿐.

    ***

    스산한 바람이 옷소매를 비집고 들어왔다. 악몽에서 화들짝 깨어난 권재진이 이불을 밀어 내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흥건했다.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이 맺혀 머리칼이 젖어 있었다. 권재진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몸을 웅크렸다. 치밀하게 설계된 서의우의 저택에 찬기가 샐 틈이 없을진대도 온몸이 견딜 수 없도록 춥고 으스스했다.

    “으, 큭…….”

    이를 악문 권재진이 흘린 신음을 듣고서 서의우가 일어났다. 가뜩이나 불면이 심해 깊게 잠들지 못하는 그는 마치 깨어 있던 사람처럼 즉각 반응했다.

    “재진, 재진 씨! 왜 그래요, 무슨…… 꿈꿨어요?”

    서의우가 권재진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어깨를 다독였다. 권재진은 서의우의 팔뚝을 긁어내며 그에게 매달렸다.

    “안 돼, 가지 마…….”

    “괜찮아요. 그냥 꿈일 뿐이에요. 날 봐요.”

    “서의, 서의우? 아니…… 아니야.”

    “응. 나 여기 있어요. 의우야예요.”

    권재진이 흐릿한 눈을 들어 서의우를 바라보았다. 앳된 20살의 서의우와 눈이 마주치고서는 저도 모르게 무너져 내린 눈빛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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