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은 빠르게 지나, 또다시 주말이 찾아왔다. 일에 치여 사느라 권 대표와 그의 베타에 대해서는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페로몬 조절제를 매일 챙겨 먹고, 간호사가 설명해 준 대로 페로몬을 조절하는 법을 익혀 나갔다. 페로몬은 어릴 적 신형질로 발현된 이들이라면 본능적으로 익히는 것이었지만 교원의 경우엔 달랐다.
바로 옆에 있는 것이 우성 알파인 탓에, 그가 조금이라도 감정의 동요를 느낄 때마다 페로몬이 느껴져 난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교원은 피곤한 얼굴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금요일에 미처 끝내지 못한 업무를 집에서 처리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했다.
비척비척 거실로 걸어 나오자, 사람의 기운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공간이 드러났다. 벽은 새하얗고, 진열된 가구는 모두 검은색이었다.
그것도 돈을 아끼겠답시고 얼마 들여놓지도 않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사람이 산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살풍경한 분위기였다.
“으…….”
속이 쓰렸다. 평일 내내 야근을 반복하다 보니, 저녁은 편의점에서 대충 때웠던 탓이다. 본래는 권 대표와 저녁 식사를 하곤 했지만 최근 교원은 그가 불편해졌다.
권 대표는 달라진 게 없었는데.
“어디…… 아.”
작은 탁상 서랍을 뒤적이던 교원은 약 봉투를 집어 꺼내 들었다. 습관적으로 ‘아침’이라 적힌 봉투를 뜯다가 아차 싶었다.
“아, 주말이지…….”
의사의 말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한 달간은 최대한 쉬는 날에는 약을 복용하지 말 것을 권고했었다. 약을 남용하면 히트 싸이클에 문제가 생긴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었다.
교원은 결국 뜯은 약 봉투를 다시 탁상 한 쪽으로 치워 두었다. 월요일에 먹을 생각이었다.
봉투 겉면에는 또렷하게 ‘페로몬 조절제’라 적혀 있었다.
띵동.
“네, 나가요.”
이른 아침에 울린 초인종 소리는 낯설었다. 교원은 작게 입을 벌려 하품했다. 누구지. 올 사람은 없는데.
띵동, 띵동!
그러나 요란스럽게 벨을 누르는 소리에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집에 없는 척할 것을 그랬나? 아니지, 집에서 나갔는지 안 나갔는지 다 알고 왔음이 틀림없다.
교원은 현관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찾아오지 좀 말라고 했을 텐데.”
“뭐야, 간만에 얼굴 보자마자 쌀쌀맞네.”
머리를 잿빛으로 탈색한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여우처럼 휙 올라간 눈꼬리가 날카롭게 교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너 뭔가 다르네? 살 빠졌나?”
“도망 안 간 거 확인했고, 돈도 어제 넣었으니 그만 가면 안 될까?”
안 그래도 개 같은 인생, 어릴 적부터 자주 봐 오던 이놈은 빚쟁이다. 제 아비를 따라와서는 비꼬는 투로 자꾸만 신경 건드리고 사라지던 새끼.
며칠 전, 빚을 갚자마자 비꼬는 문자를 보냈던 놈이기도 했다. 차의겸.
차의겸은 신발도 벗지 않고 거실로 성큼 들어섰다. 꽤 높은 연봉의 비서가 사는 집이라고 하기엔 후줄근했다.
이곳저곳을 둘러본 차의겸은 턱을 괴며 교원을 내려다보았다.
“이교원, 너 애인 만들었어?”
“개소리하려고 온 거면 나가.”
“오메가 냄새가 나는데.”
교원에게 빚쟁이의 존재는 길가에 툭 튀어나온 돌부리와도 같았다. 열심히 뛰고 있으면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곤 했으니까.
꽤 오랜 기간 봐 온 얼굴이지만 익숙해질 리가 없는 관계임에도 놈은 꽤나 친근하게 굴었다. 그런 의미로, 차의겸의 뒤에는 험악한 얼굴로 욕이며, 성희롱이며 한마디씩 내뱉던 꼬붕들이 없었다.
“네 알 바 아니잖아. 나가.”
“아니지, 애인한테 돈 쓰느라 빚을 안 갚으면…… 아.”
“갚고 있잖아, 아주 잘.”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차의겸을 지나쳐 부엌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달갑지 않은 얼굴을 보니 속이 턱턱 막혔다.
찬물을 꺼내 들이켜는데, 가만히 서서 무언가 생각하던 놈이 훌쩍 다가와 컵을 빼앗아 들었다.
“뭐야?”
“너 원래 오메가였냐?”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페로몬을 맡은 모양이었다. 교원은 욕지거리를 뱉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무심하게 답했다.
“……그런 걸 물을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새까만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놈은 재밌는 놀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훑었다.
“내 기억에 너, 분명 이런 냄새가 난 적이 없는데 말이야.”
“뭐…… 하는, 아!”
차의겸은 알파였다. 그가 우성인지, 열성인지 베타였던 교원은 알 길이 없었지만 알파라는 것 하나는 명확했다. 놈은 교원의 팔목을 잡아 제 품으로 억세게 끌어당겼다.
“몸으로 갚는 건 어때, 빚.”
목덜미에 코를 박은 녀석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축축하고 뜨뜻미지근한 살덩어리가 살갗을 부드럽게 훑었다.
“미, 친 새끼…… 이거, 놔!”
차의겸이 알파라는 걸 안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교원을 보며 매번 하던 말이 ‘아깝다.’라는 거였으니까.
“원래 오메가였어? 아니면, 뭐 이제야 발현된 거야, 뭐야?”
그는 교원이 오메가이기를 바라곤 했다. 농담식이긴 했지만, 그 말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차의겸의 시선은 예사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고, 매번 훑듯이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베타라고 알 적에도 몇 번이고 물어보곤 했다.
〈너, 빚 쉽게 갚고 싶지 않아?〉
가끔, 학교에 다니며 알바를 병행할 때에는 솔깃한 적도 있었다.
“신경 꺼!”
교원은 이를 악물고, 놈을 힘껏 내쳤다. 숱한 아르바이트로 나름 다져온 몸은 차의겸이 멋대로 짓누른다고 해서 눌릴 만큼 약하지 않았다.
“베타일 때도 매번 탐났는데 말이야, 너.”
“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돈도 제대로 갚고 있고.”
“그거야…… 우리가 사정을 봐주는 거지. 네 부모님이 사채를 쓴 건 꽤 옛날 일이잖아.”
화악, 바람처럼 놈의 페로몬이 쏟아졌다. 그 순간 마법처럼 몸이 굳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교원은 비틀거리다 벽에 몸을 기대며 차의겸을 올려다보았다.
“너…….”
“아무래도 오메가면, 좀 쉬워지잖아.”
“하……!”
쉽기는, 무슨.
교원은 팔을 뻗어 식탁에 올려 두었던 컵을 쥐었다. 단단한 유리컵이 조금 전 따랐던 찬물로 인해 서늘했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교원아.”
“그, 딴 식으로…… 헉!”
짙은 페로몬이 좁은 집 안을 가득 채워, 공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교원은 눈을 부릅뜨고 파르르 떨다가, 손에 쥔 컵을 놈에게 내던졌다.
와장창, 유리컵이 깨지며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차의겸은 어깨만 살짝 틀어 피하고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꺼, 져!”
“아, 이거 재밌네. 전에는 눈치도 못 채더니…… 진짜 오메가라도 됐나 봐?”
“알 게…… 뭐야, 나가.”
차의겸은 눈을 휘며 빙글 웃어 보였다. 그러곤 두 손을 들었다.
“손 안 대. 너한테 손댈 거였으면 진작에 댔겠지.”
“흐으, 헉…….”
“그냥 너 이러는 게 재밌어서. 매번 뻣뻣하게 굴던 새끼가…… 조르는 듯이 보고 있으니까.”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교원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잘 버티네.”
“나가.”
“이거 재밌다, 안 그래?”
“……나가라고.”
차의겸은 늘 여유로웠다. 빌어먹게도 당연했다. 그는 갑이고, 교원은 을이었으니까. 이자에 원금을 조금씩 붙여 겨우 갚고 있는 교원으로서는 항상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차의겸은 잿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빙글빙글 꼬며 바들거리는 교원을 흥미롭게 쳐다보다가, 바닥에 산산조각이 난 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치우다가 다치지 않게 조심해.”
“네가, 뭔데…….”
“아,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입은 살았구나. 우리 교원이.”
큭큭, 차의겸이 웃음을 터트렸다. 교원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어뜯으며 놈을 노려보았다. 뜨거운 열기가 아래서부터 올라왔다.
“그럼 가 볼게. 다음에 또 보자.”
“오지, 마, 너…….”
“좀 더 자주 올까 생각 중이야.”
터벅터벅, 묵직한 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동시에 페로몬을 거두는 덕에 흐릿했던 눈앞에 천천히 선명해졌다. 그와 달리 머릿속은 번민으로 가득 차 혼란스레 뒤흔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서늘하게 들려왔다. 교원은 그제야 후들거리던 다리를 붙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흐, 씨, 발…….”
오메가라는 것이 이렇게 귀찮은 형질이었던가. 페로몬이 뭐라고 이렇게, 사람을 어지럽히는가. 억울함에 분노가 치밀었다.
충동적으로 들었던 감각이 잊히질 않았다. 눈앞의 놈이 그리도 싫으면서,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을 땐 수치와 스스로에 대한 경멸이 폭풍처럼 일었다.
교원은 주저앉은 채로 숨을 골랐다.
그때, 멀리서 핸드폰 알림음이 들렸다. 권 대표 전용으로 해 둔 알림음이었기에 교원은 숨을 고르고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당장 부엌에 깨져 있는 유리컵을 치워야 했지만 그럴 기운이 없었다. 침대에 늘어지듯 누우며 핸드폰을 켜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권새끼: 이 비서~ 내일 회사 나왕?]
내일은 일요일이었지만, 교원은 늘 출근하는 날이었다. 주말 수당도 챙기고, 미처 하지 못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교원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답장했다.
[네.]
기다리고 있었는지 답장이 바로 도착했다.
[권새끼: 오끼 내일 봐!]
그에 교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권 대표가 일요일에 출근하는 일은 죽어도 없었던 탓이다.
왜 이럴까 잠시 고민하던 교원은 핸드폰을 내던졌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머리조차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