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대표님.”
“왜.”
“약국에서 철분제를 사 와 먹겠습니다. 조퇴할 정도도 아니고, 오늘 대표님 스케줄이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조금 전 말은 철회하기로 했다. 교원은 단호한 얼굴로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대화하는 사이 시간이 지나 4시가 되었다. 다음 스케줄을 위해서 지금부터 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다음 일정 손정YT와의 미팅입니다. 중요한 건이지 않습니까.”
엉망으로 뒤엉켰던 생각을 바로잡자,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권 대표, 술집, 베타 남성.
그 셋 모두 잊고 싶지만 한 놈은 눈앞에 있는 게 현실이다. 교원은 오래가지 못할 한낱 감정보다 당장의 현실이 중요했다. 그건 그가 이성적이라거나, 감정이 메말라서는 아니었다.
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언제든 감정을 배제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법을 본능적으로 익힐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걱정해 주신 것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걱정하시는 만큼 몸이 아픈 건 아니니 괜찮습니다. 15분 뒤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이 비서.”
“네, 대표님.”
교원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 당황스러웠던 기색은 남아 있지 않았다. 권 대표는 그런 교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알겠어. 대신 내일은 늦게 출근하도록 해.”
“하지만…….”
“일찍 오면 내쫓을 거야.”
“……알겠습니다.”
본래 협상을 할 때에는 저도 한 가지는 물러나 줘야 하는 법이다. 교원은 고개를 숙이며 대표실을 나왔다. 문틈 새로 미간을 엉망으로 구긴 남자가 보였지만, 그를 걱정할 시간은 없었다.
교원은 곧장 비서실로 걸음을 옮겼다. 손정YT와의 미팅에 필요한 자료들을 챙기고,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비서 1팀과 2팀의 각 팀장을 불렀다.
“내일 1시쯤 출근할 겁니다. 오전 업무는 두 분께서 나눠 진행해 주셔야 할 듯싶습니다.”
“네, 알겠습…….”
“왜요?”
시간을 확인하며 둘에게 업무를 나눠 주려는 찰나, 2팀 팀장이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1팀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몸이 좋지 않아 오전 반차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엔 건강해 보이시는데.”
본의 아니게 일을 떠맡기게 된 건 교원도 미안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권 대표의 지시이니 거부권은 없었다. 교원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저를 보는 2팀 팀장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내일 오전에까지 반드시 끝마쳐야 하는 일들만 부탁드립니다.”
“누구는 히트가 와도 약으로 버티고 있는데…… 하.”
2팀 팀장이 조그맣게 구시렁거렸다. 들으라는 듯한 말에 교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히트가 오실 때는 휴가를 내시면 됩니다.”
“……돼, 됐어요. 누가 안 내고 싶어서 안 내는 줄 아세요?”
휙, 2팀 팀장이 인사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전부터 교원을 마뜩잖아하던 사람이었기에 날카로운 태도가 거슬리진 않았다.
다만 후에 업무에 지장을 줄 것이 조금 걱정되었다.
“신경 끄세요, 대리님. 쟤, 자기가 일을 대충해서 그거 메꾼다고 휴가 못 낸 거거든요.”
“2팀 업무량이 많은가요?”
“1팀이랑 비슷해요. 까딱하면 결근하고, 업무 시간에 나가 놀다 오니까 그렇지.”
몰랐던 사실에 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로 권 대표와 바깥 업무를 하긴 했다만, 비서팀 내부 일을 신경 쓰지 못한 건 제 실수다.
“알겠습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팀장님이 그간 고생하셨겠어요.”
“아뇨, 뭘요. 내일 업무는 늦어지지 않도록 제가 신경 쓸게요.”
다행히 비서 1팀의 김 팀장은 일도 꼼꼼하고, 실수 없이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베타 여성이라는 이유로 초창기에는 무시를 당하던 그녀였으나, 이제는 능력만으로 인정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일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넵.”
경쾌하게 답한 김 팀장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교원은 각자의 사내 메신저에 내일 업무에 대해 전송하고, 시간을 확인했다. 4시 14분, 대표실에 한 번 들려야 했다.
바로 나갈 수 있게 준비를 마쳐 둔 교원은 짐을 내려놓고 대표실로 향했다. 늘 그렇듯 권 대표는 30분까지 준비해야 한다고 언질을 준 다음에도 10분마다 재촉을 해 줘야 했다.
상당히 귀찮은 일이긴 했지만 이젠 일상과 다름없다.
“대표님.”
“들어와.”
차분한 대답에 교원의 낯이 의뭉스럽게 변했다. 징징거리지도 않고 곧바로 대답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던 탓이다.
조심스럽게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권 대표가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마친 것이 보였다. 그도 놀라웠지만, 교원이 오전에 꺼내 놓은 대로 잘 챙겨 입은 것도 신기했다.
“제가 입으란 대로 입으셨네요?”
“……내가 언제 안 입은 적 있었어?”
살짝 뚱한 얼굴이다. 교원은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가 조금 전, 제가 평소보다 냉정하게 대처한 것이 떠올랐다. 권 대표는 교원과 꽤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고, 장난도 많은 사내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긴, 걱정해 줬는데 됐다고 칼같이 잘라 버렸으니.
“아뇨, 항상 제 말 자알 들으셨죠.”
“이 비서 비꼬네……?”
“전혀, 아닙니다.”
교원은 입꼬리를 올리고 다가가 손을 뻗었다. 생긴 것만큼은 잘나서, 이렇게 잘 꾸며 놓으면 보기 참 좋았다. 입만 다물면 못 하는 거 없는 잘난 남자 같기도 했다.
“넥타이, 다시 매 드리겠습니다.”
“아.”
이렇게 잘났으니 주변에서 계속 사람이 붙는 거겠지. 이 남자가 가벼운 것과는 별개로, 다가오는 사람이 많으면 게 중 몇몇과는 인연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저 없으면 넥타이 어떻게 매시려고 매번 삐뚤게 하십니까?”
“……어, 없을 때 없잖아.”
“그럴 리가요. 자주 연습해 두세요.”
깔끔하게 다시 매 준 뒤 손으로 가슴 부근을 탁탁, 쳐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가만히 서 있던 권 대표가 갑자기 교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드니 권 대표의 표정이 묘했다. 몽롱하게 흐트러진 듯한 동공에 교원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 아, 아니. 미안.”
그제야 권 대표는 퍼뜩 놀라며 손을 놓았다. 애초에 제가 왜 잡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교원은 대수롭지 않게 뒤로 물러서며 권 대표를 위아래로 살폈다. 다 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마음에 들었다.
“슬슬 출발…… 어디 아프세요?”
새빨개진 얼굴에 깜짝 놀라 묻자, 권 대표가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며 시선을 피했다. 꽤 당황한 얼굴을 보니 갑자기 열이라도 오른 것 같았다.
이 상태로 미팅에 가면 안 될 텐데.
“열나십니까?”
뒷걸음질 치는 권 대표에게 성큼 다가가자, 그가 또 그만큼 도망을 갔다. 교원은 굴하지 않고 더욱 가까이 가 이마에 손을 올렸다. 미열이라고 해야 하나, 피부가 살짝 뜨뜻했다.
게다가 평소보다 페로몬이 짙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페로몬을 자제하지 못할 정도라면 꽤 심각한 게 아닌가.
“이런, 미팅 취소할까요?”
“아, 아니, 그, 좀…… 뒤로 가 주면 안 될까?”
“살짝 열 있으신 거 같은데 병원 예약부터 하겠습니다. 미팅은 취소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이 비서, 그게……!”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심상찮았다. 교원은 핸드폰을 꺼내 권 대표 주치의의 번호를 찾았다. 전화를 걸려는 찰나, 권 대표가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네?”
“안 아파. 병원 예약 안 해도 되고, 미팅 취소 안 해도 돼.”
“……정말요?”
“어. 그냥 잠깐, 좀 더워서 그래.”
그제야 몸을 뒤로 물리자 권 대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교원은 여전히 걱정됐으나, 일을 빼먹으려 안달인 남자가 안 아프다는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 믿기로 했다.
가까이 다가갔던 탓에 제게 권 대표의 페로몬이 조금 묻어났다. 교원은 오메가가 되니 이런 것도 느껴지고,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먼저 나가 있어……. 금방 나갈 테니까.”
한숨과 함께 권 대표가 뱉은 말에 교원은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가 말았다.
“알겠습니다. 2분 안에 나오셔야 합니다.”
“……어.”
몸을 돌려 대표실을 나서려는데, 아까 하려던 말이 떠올랐다. 교원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표님.”
“응?”
“아까 말씀하신 베타 분, 계속 만나 보세요. 점점 좋아지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무슨, 그런 말을 지금.”
“나가 보겠습니다. 1분 45초 남으셨어요.”
탁,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말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순간 배신감이 드는 동시에 억울하다는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니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그가 드문드문 기억할 줄은 몰랐지만,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흐릿한 기억이라는 건 오히려 제 이상한 기분을 정리할 기회이기도 했다.
“진짜 아픈가…….”
그럼에도 심장 부근이 따끔따끔거렸다. 교원은 조만간 부정맥 검사를 하러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