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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214)화 (213/234)

214화

시작이 어려웠을 뿐, 막상 서두를 뱉자 이야기를 풀어놓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직도 혼자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일들이었기에, 꼴사납게 우는 거 아닌가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내 목소리엔 울음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빠와의 감동적인 재회와 이별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는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제법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우리 집의 콩가루 사정을 알 리 없는 김은수와 강하민을 위해 그 이야기까지 곁들이느라 더 길어진 이야기를 끝내고 뿌듯한 마음을 담아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강하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야, 너는 무슨 그런 얘기를 고깃집에서….”

김은수는 아빠의 가명이 본인의 이름과 똑같다는 부분에서부터 고장 난 기계처럼 감탄만 뱉고 있었다.

“와… 그렇구나…. 와.”

역시 이런 얘길 들으면 이렇게 놀라는 게 당연한 거겠지?

그걸 알면서도 막상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복잡한 얼굴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영 곤란하기도 하고.

괜히 눈썹 위를 긁으며 뭐라고 말해야 좀 수습이 될까, 괜히 눈을 굴리는데, 갑자기 딱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마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악!”

반사적으로 아픈 곳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고개를 드니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손을 거두는 채예령이 보였다.

저 새끼가?

“웃음이 나와? 어? 펑펑 울면서 해도 모자랄 얘기를 아주 실실 웃으면서. 어휴, 이 화상아, 이 화상아! 그리고 뭐, 이런 얘길 그럼 어디서 해? 고깃집에서 술 마시다 할 얘기지, 이게. 김은수, 너는 정신 좀 차려라, 렉 걸렸냐?”

왜인지 엄청 화가 난 채예령은 내게 또 한 번 딱밤을 날리더니, 옆에 앉은 강하민의 뒤통수를 때리고 마주 앉은 김은수에게 윽박질렀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테이블이 한 번 크게 흔들린 후 김은수가 악, 소리를 내며 허리를 수그린 것을 보면 정강이까지 걷어찬 모양이었다.

어색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한 사람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게 되었다. 우리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채예령을 향해 소리쳤다.

“아, 왜 때려!”

각자 맞은 곳을 부여잡고 맹렬히 노려보자 채예령은 콧바람을 거칠게 내쉬며 대꾸했다.

“화가 나서 그런다, 화가 나서! 김진호, 이 호구 같은 새끼가 진짜. 다른 건 다 몰라도 너희 엄마랑 아버지한테는 더 대거리하고 아예 쫓아냈었어야지, 그걸 왜 봐주고 앉았어? 그 사람들이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말 몇 마디로 끝내 버리냐고! 어? 머리채라도 잡고 흔들었어야지, 이 멍청아!”

말하다 보니 점점 더 열이 올라오는지 채예령의 목소리가 서서히 커지더니 주변 테이블의 소리를 압도할 정도로 커졌다.

“그리고 형들은 불렀는데 나는 왜 안 불러? 어? 나는! 그때 나한테는 괜찮다고, 아무 일 없다고 그래 놓고! 왜! 형들은! 왜!”

“…네가 이럴까 봐 말 안 한 거 같은데.”

“시끄러워!”

정적. 우리 테이블뿐만이 아니라 주변 테이블까지 정적에 잠겼다. 시끄럽다는 일갈에 놀라 움찔 입을 닫은 사람들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우리 테이블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 시선에 혼자 창피해진 나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짜증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하…. 네가 제일 시끄러워, 채예령. 제발 오버 좀 하지 마, 제발.”

“그래,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왜 이래. 진정해, 진정.”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좀 흥분해서요. 죄송합니다.”

맞장구치는 강하민과 사과하는 김은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빼꼼, 손가락 사이로 본 채예령은 테이블을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녀석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도 휙 고개를 숙여 테이블을 노려보길 여러 번 반복했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장소도 장소인 데다, 김은수와 강하민이 있어 꾹 내리누르는 모양이었다.

역시 세 명을 모아서 말한 건 잘한 선택이었어.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아직도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는데, 파무침을 뒤적거리던 김은수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 너 그럼 이제 그… 기일 챙기겠네?”

의외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나를 대신해 채예령이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챙기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진호인데. 아주 그냥 매해 엄마, 아버지 불러 모셔다가 하하 호호 저들한테만 행복하고 찬란했던 추억 되새기자는 개소리 들어 가면서 속이 문드러지든 말든 챙길 놈이야, 저 새끼는.”

“넌 좀 조용히 해라, 좀. 진호가 너 오버하지 말라고 한 거 못 들었냐?”

“몰라! 못 들었어! 속상하고 화가 나서 뭐가 들리게 생겼냐! 내가 씨발…. 내가 진짜! 나는 진짜 다 봤다고. 너희는 몰라서 그래!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다 보고 들었는데, 어떻게 진정을 하냐? 어? 김진호, 너 진짜 왜 그러냐, 애가. 왜 그렇게 물러 터졌어!”

채예령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쳤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미 채예령의 머릿속에선 기일마다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을 차리고 엄마와 아버지를 불러 제사를 지내는 내 모습이 절로 그려지나 보다.

그래, 녀석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엄마와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빠 역시도 어린 김진호에겐 가해자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내게 사랑을 준 것도 날 위해서라기보단 자기만족을 위한 거였다고 볼 수 있고,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방법이 없었냐고 따진다면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가장 좋은 선택을 하며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깨트리는 선택지는, 그 존재 자체를 감히 떠올리지도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밉지 않았다. 더 이기적으로 굴 수 있었음에도 본인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선택지들 가운데 가장 나를 위한 것들을 골라 준 사람이니까. 그 사랑은 진심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구태여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아도, 어린 김진호가 고생했던 시간을 위해 노발대발해 줄 사람이 있었으므로 나는 편안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네가 지금 그렇게 허허실실 웃을 때야?”

그래도 이렇게까지 열받아 할 줄은 몰랐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난리를 부리는 모습을 보니 채예령 기억 속의 내가 어지간히 힘들고 아팠나 보다.

하긴,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된다고 하니까, 내 기억들은 실제로 겪었던 것보다 말랑해졌을 수도 있겠다.

나는 지치지도 않고 씩씩거리는 채예령을 놔두고 김은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일은 챙기려고.”

“야, 김진호!”

그 말에 발작이라도 하듯 내 이름을 외치는 채예령을 향해 단호하게 덧붙였다.

“엄마랑 아버지는 안 부를 거야. 제사 같은 거 없이 혼자 추모원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맛있는 거나 먹으려고. 근데 그건 왜?”

채예령을 의식하며 ‘혼자’라는 단어에 강세를 두어 말했다. 내 단호한 대답에 김은수가 멋쩍은 듯이 목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니, 저기, 그, 혼자 가기 좀 그렇거나 하면 같이 가자고. 추모원 멀면, 나, 차도 있으니까.”

그에 질세라 자꾸 일어서려던 채예령을 잡아 앉히던 강하민도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도! 괜찮으면 같이 가자. 혼자 가면 음, 아무래도 좀 울적해질 수 있으니까. 너만 괜찮으면 같이 가서 진호 친구입니다, 인사도 드리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고. 너희 아버, 아니 아빠? 내가 아빠라 그러니까 이상한데, 아무튼 아버님께서 우리 보고 싶어 하셨다며.”

“그래, 나는 이름도 같…은 건 아닌데, 아무튼 가서 인사드리고 그러면 좋을 것 같은데. 차도 있으니까 어디든 편하게 갈 수 있고.”

앞다투어 말하는 녀석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코가 점점 시큰거렸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손으로 세차게 코를 틀어쥐었다. 정작 긴 이야기를 할 때는 멀쩡했던 눈물샘이 갑자기 요동쳤다.

안 돼, 울지 마. 안 돼. 한마디라도 하는 순간, 막아 둔 둑 터지듯 터질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울음에 돌연 입을 다물었더니 내 답을 기다리던 강하민과 김은수가 잽싸게 눈을 돌려 다른 곳을 쳐다봐 주었다. 참지 말고 편하게 울어도 된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 많은 고깃집 한가운데서 울고 싶지 않았던 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코를 이리저리 비틀어도 보고, 눈동자만 위로 굴려 눈물을 말려 보려고도 하면서.

그러나 내 눈물을 날려 보내 준 것은, 이 와중에도 나를 보며 씨근덕거리던 채예령의 나지막한 한마디였다.

“…차는 나도 있거든.”

그 어이없는 투덜거림 덕분에 나는 울음 대신 웃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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