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 (213)화 (212/234)

213화

“야, 너 진짜 콜라로 되겠어? 너 그때 보니까 술 마시는 거 싫어하는 거 같진 않았는데.”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 위로 오랜만에 만난 강하민의 질문이 얹어졌다. 사람 수대로 놓인 유리잔에는 나만 제외하고 모두 맥주가 가득 담긴 상태였다.

딱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의 장난이 섞인 어조에 피식 웃음이 샜다. 녀석의 말을 바로 받아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던 채예령이었다.

“그게 더 문제야. 인간적으로 한 잔에 취할 정도로 약하면 좀 싫어할 만도 하지 않아? 쟤는 뭘 믿고 매번 그렇게 주는 대로 마시는지 모르겠다, 진짜.”

녀석은 인상을 확 찌푸리고 날 째려보며 툴툴거렸다. 저거 괜히 괘씸해서 저런다. 자기가 있을 때만 마음 놓고 마시는 걸 아니까. 나는 널 믿고 그러는 거라는, 낯간지러운 말 대신 눈앞에 쥐고 있던 캔을 흔들며 말했다.

“시끄러워. 그래서 지금 콜라 마시잖아.”

“됐어, 이제 와서 무슨. 마시고 싶으면 마셔, 그냥.”

고기를 굽느라 턱짓으로 자기 잔을 가리키는 녀석에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중지를 들어 올렸다.

“잔소리쟁이 잔소리 듣기 싫어서라도 절대 안 마시죠?”

그러자 채예령이 얼굴을 확 찌푸리면서 ‘야!’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 위를 덮는 웃음소리와 이어지는 질문에 무참히 묻혀 버렸다.

“와, 너희 티키타카는 여전히 신기하고 재밌네. 지금 약간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느낌이야.”

김은수는 어딘가 아련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갑자기 뭔 소린가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채예령과 강하민을 번갈아 보는데, 녀석들의 표정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응, 쟤네도 똑같구나. 나만 김은수의 웃음 포인트를 이해 못 한 게 아니었어.

“우리 은수는 웃는 포인트가 조금 독특하구나? 남의 얼굴 보고 회상에 잠긴 눈빛은 그만하고 고기나 먹어. 다 익었어. 너네도 얼른 먹어.”

열심히 굽던 고기가 드디어 채예령의 심사를 통과했나 보다. 녀석이 알맞게 익은 고기를 김은수의 밥그릇 위에 올려 주며 다정하게 말하고는 우리에게도 고갯짓했다.

그 신호에 나도 얼른 젓가락을 들어 눈여겨봤던 고기를 향해 돌진했다. 그사이 고기를 우물거리던 김은수가 손가락으로 채예령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아니, 봐 봐. 지금이야 뭐, 채예령도 좀 느슨해지긴 했는데, 고등학생 때 얘 별명이 천사였잖아, 천사! 오죽하면 애들이 쟤는 누가 가서 뺨을 때려도 웃으면서 손은 괜찮냐고 물어볼 것 같다고 그랬겠냐.”

그건 천사가 아니라 호구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도 다른 애들 반응을 살폈다. 채예령은 예상대로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앞에 앉은 강하민은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맞아. 그랬었지. 그때 채예령은 진짜 만화나 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욕먹는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완벽했지. 공부 잘해, 운동 잘해, 어른들한테 잘하고 친구들한테도 잘하는데 잘생기기까지 했잖아. 키만 쬐-끔만 더 컸… 읍, 큭, 야!”

“고기 식는다, 하민아. 얼른 처먹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던 칭찬들이라 그런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쌈을 싸던 채예령이 키 얘기가 나오자마자 커다란 쌈을 강하민의 입에 쑤셔 넣었다.

뜬금없이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강하민에게 176이면 충분히 큰 키라며 채예령이 이를 으득거리는 동안, 양껏 입에 넣은 고기를 꿀꺽 삼킨 김은수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런 채예령인데 이상하게 김진호한테는 뭔가 달랐단 말이야. 말도 좀 막하고 행동도 풀어진다고 해야 하나? 김진호, 너도 다른 애들한테는 뭐랄까, 약간 벽을 치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채예령한테만은 엄청 스스럼없이 대하는 분위기였어.”

채예령과 눈싸움을 하던 강하민이 그 말을 듣고는 옛날을 떠올리는 듯 눈을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생각 좀 했었어.”

그러면서 친했던 애들은 아마 다 알았을 거라고, 채예령의 의외의 모습을 보고 재밌어하는 애들도 있었고 그런 우리의 관계를 부러워하는 애들도 있었다는 말이 덧붙여졌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채예령을 힐긋 곁눈질하다가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공통점을 공유한, 서로의 모든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누구보다 편한 존재였다.

그러니 저렇게 보는 사람도 있었겠다 싶다. 특히 김은수와 강하민, 그리고 그들이 지칭하는 ‘애들’이라는 존재는 채예령도 망설임 없이 ‘친구’라고 할 만큼 긍정적이고 괜찮은 아이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둘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채예령과 나는 처음부터 서로가 너무 다른 걸 알면서도 상대방에게 스스로를 투영하곤 했다. 그래서 강박적인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채예령은 종종 나에게 더 모질어졌고, 애정에 굶주려 있던 나는 채예령에게 유독 약했었다. 때문에 우리의 관계는 언뜻 동등하지 못하고 기울어져 보일 터였다.

채예령에게 긍정적인 사람들에겐 완벽한 친구가 다소 모자란 친구를 살뜰히 보살펴 주는 관계로 보였을 테고, 부정적인 사람들에겐 만만한 소꿉친구에겐 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걸로 보였을 테지. 그들에게 나는 잘난 친구 옆에 눈치 없이 붙어 있는 놈이었거나,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붙어 있는 눈치 없는 애였을 거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 둘은 서로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가끔 치밀어 오르는 열등감과 자괴감에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지만, 채예령은 아니었다.

녀석에게 김진호란 운이 지지리도 안 좋아 콩가루 집안에 입양가게 된, 다소 게으르고 정이 많은 못 말리는 녀석이었다.

물론 저놈의 독단적이고 애늙은이 같은 성격 탓에 시끄러운 잔소리는 물론이고, 행동까지 강제당할 뻔했던 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게 남들이 추측하는 것처럼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거나 덜떨어졌다고 여기기 때문은 아니었다.

녀석이 내게만 유독 말이 편해지고 행동이 풀어지는 것 역시, 나를 신뢰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야, 솔직히 사람들 앞에선 아닌 척해서 그렇지, 말은 김진호가 나한테 더 막하거든?”

“그건 그렇더라. 옛날엔 몰랐는데 요즘 만나면서 느꼈어. 김진호 성격 아주 단호하던데? 채예령 말이 조금이라도 개소리 같으면 아예 상대도 안 해 주더라.”

나는 고기 한 점을 더 집어 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채예령이 하는 말은 그럴싸해 보여도 반은 그냥 잔소리니까, 너네도 알아서 걸러 들어. 쟤처럼 완벽주의자로 살 거 아니면.”

“이거 봐, 이거 봐. 내가 뭐, 너 망하라고 그러냐? 다 너 잘되길 바라고 하는 소-”

“으악! 젊꼰이다, 젊꼰!”

채예령이 혀를 쯧쯧 차고 훈장님 같은 말투로 얘기하기 시작하자, 김은수가 화들짝 놀란 척을 하며 귀를 막았다. 채예령은 그에 질세라 더 큰 목소리로 누구나 지겨워할 만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나와 강하민은 서로를 보며 우리는 무슨 죄냐고 입 모양으로 투덜거리다 피식 웃어 버렸다.

그 뒤로 우리는 고기 불판이 여러 번 바뀔 때까지 왁자지껄 먹고 떠들었다. 그러다 약속이라도 한 듯 조금씩 젓가락질이 느려지고 점차 말이 없어졌다.

나를 보는 세 쌍의 진지한 눈동자. 그 눈들이 하려는 말이 뭔지 알지만, 막상 아는 체하려니 민망하고 머쓱해서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그러자 채예령이 마침 아주머니가 놓고 간 맥주병을 따며 물었다.

“술 줘?”

유혹에 살짝 흔들렸지만, 고개를 저었다. 술기운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집에서부터 계속했던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말하자. 말한다고 해결할 방법이 생기는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말하자.

이건 남에게 슬픔을 전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친구들에게 나의 상황을 공유하는 거다. 여기 앉아 있는, 내가 ‘할 말이 있어.’라고 보낸 것만으로 흔쾌히 모여 준 나의 친구들은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들어 줄 거야.

주문과도 같은 생각을 마친 나는 천천히 구부정했던 허리와 어깨를 폈다. 그 모습이 답답할 법도 한데, 세 명은 전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조금 무거운 얘긴데, 다 끝난 일이기도 하니까 너무 무겁게 듣지는 않아도 돼, 알겠지? 그냥, 음, 너넨 내 친구들이니까, 그냥 있었던 일, 아니 나름 좀 큰일이었던 걸 공, 유하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친구들한테 그냥 푸념처럼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있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몇 번이고 생각한 말이, 긴장한 탓에 횡설수설 튀어나왔다. 비장한 마음으로 고르고 골랐던 단어들이었는데, 볼품없이 뱉어지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 명은 내 말의 요지를 이해한 듯 싱긋 웃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걱정하지 말고 해.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뜸을 들여.”

“그래! 이 친구한테 다 털어놔, 인마!”

“누가 보면 너희가 소꿉친구인 줄 알겠다?”

김진호 친구 경력도 짧은 것들이. 대놓고 들으란 듯 중얼거린 말에 김은수가 그런 건 관계없다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보니 픽, 웃음이 났다. 나는 가벼워진 분위기에 힘입어 그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나, 아빠 돌아가셨다.”

정적. 주변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우리 테이블에만은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서로에게 중지를 세워 보이던 세 명은 차마 움직이기엔 너무 놀랐는지, 그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웃겨서, 나는 그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