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이거 차 없는 사람은 서러워 살겠냐? 나도 운전은 잘해! 차가 없어서 그렇지.”
단숨에 풀어진 분위기에 맞춰 강하민이 투덜거리며 가득 차 있던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나는 채예령의 어깨를 퍽퍽 치면서 웃다가, 문득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차피 그동안 나눈 연락으로 경과는 알고 있었지만,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무서운 거라고 들었다. 비록 몇 달이나 지나긴 했지만, 지금도 혹시 어디 아프진 않은지 걱정이 되었다.
“너, 근데 교통사고 난 거 이제 완전히 괜찮은 거지? 후유증이나 뭐, 그런 거 없어?”
“괜찮아, 괜찮아. 처음부터 나는 별로 다치지도 않았었어. 아버지께서 좀 다치시긴 했는데 금방 회복하셨고.”
채예령이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하는 걸 보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정신없었던 장례식이 끝나고 약간의 여유가 생긴 후부터 나는 채예령이 그만 좀 물어보라고 성질을 낼 때까지 계속 상태를 확인했었다.
사실 크게 다쳤는데 혹시 내가 걱정할까 봐 숨기나? 싶은 마음도 있었고, 왠지 모를 불안감과 무력함을 달래기 위한 것도 있었다. 내가 막을 수 있다고, 막아 냈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기어코 일어나 버린 건 내 나름대로 충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깨달았다. 내가 회귀 전과 다르게 행동해서 없었던 일들이 생기기는 했어도, 있었던 일이 없어지진 않았다는 걸. 내가 기억하는 있었던 일이라고 해 봤자 형들이 어딘가에서 출현하고, 엄마가 언제 오는 등의 자잘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나마도 아빠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같이 정확한 날짜를 알면 좋았을 일들은 ‘이맘때쯤’과 같이 뭉뚱그려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에겐 크게 중요하지 않거나 외면하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기억하는 커다란 사건은 딱 두 개, 채예령의 교통사고와 납치였다.
그중 납치는 내가 막기엔 여러모로 답이 없었지만, 교통사고 정도는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마음속 어딘가에선 이걸 막을 수 있다면, 어쩌면 납치도 이번 생에선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닐지 기대했다. 논리적으론 말이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런 희망이 있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교통사고는 때를 달리해서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그 사실이 주는 막연한 불안감과 초조함, 무력감과 절망을 빠르게 회복하는 채예령을 보면서 겨우 달랬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는 무슨 그런 사고를 당했냐. 교차로 한가운데서 차 옆구리 받혔는데 받은 사람이 아는 형이라니. 영화야?”
“정확히는 형 차가 아니고, 형 부하 직원 차였어.”
“그니까. 부하 직원 차랑 아는 형이 타던 차가 줄줄이 앞차 잡으려고 쫓아가다가 그런 거라며. 그게 더 영화 같아.”
나는 김은수의 호들갑을 들으며 머리를 좌우로 작게 저어 복잡해지려는 생각들을 털어 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고민한다고 방법이 생길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도 좀 다행인 게, 아는 형이라 그런지 그렇게 바쁘게 쫓아가던 것도 다 때려치우고 응급실 이송부터 보험 처리랑 이런 거 다 알아서 해 주셨다며.”
“원래 그건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야, 대낮에 시내 한복판에서 추격전 하는 놈들인데 그런 상식이 있겠냐?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 형이 쟤 차도 한 대 새로 뽑아 주셨단다. 더 좋은 차종으로.”
향후 몇 년간 유지비도 일시불로 주셨대. 마지막으로 김은수가 입가에 손을 대고 소곤거린 말에 강하민의 눈이 반짝 빛나더니 채예령이 쪽으로 고개가 휙 돌아갔다. 누가 봐도 진짜냐고 묻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채예령이 미간 사이를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많이 부자시거든. 아무리 거절해도 무조건 사 주겠다고 그러시더라고. 그 문제로 계속 실랑이하다가, 마음에 빚이 남는 기분이 싫어서 그런 거니까 받으라는 얘기 듣고 결국 받았어. 그 정도로 단호하게 나오니까 이젠 할 말도 없더라.”
“와- 얼마나 부자길래 차를 턱턱 사 주시냐. 나도 좀 알고 지내자, 그 형.”
김은수의 말에 채예령이 약간 무서운 형인데 괜찮겠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도 김은수를 놀리기 위해 한마디 보태려고 했으나, 강하민이 한발 먼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그럼 그 무서운 형 말고 너 병원 VIP로 만들어 준 형들 소개해 줘. 나 요즘 여기저기 아픈 데 많아서 골골대는데, 병원 갈 때마다 특별 대우 좀 받아 보자,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형들도 있어?”
“너, 얘 병문안 안 갔지? 장난 아니었어. 나는 1인 병실 위에 특실이 있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잖아. 나중에 병실 가격 듣고 턱 나갈 뻔했다, 진심. 거기다 나 병문안 갔을 때 병원장님 왔었잖아. 아들들이랑 특별히 친한 후배라고 들었다면서 되게 살갑게 말씀하시더라. 큰 사곤데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라면서 웃으시는데, 엄청 인자해 보이셨어.”
강하민과 김은수는 자기들끼리 신나서 그 형, 저 형 하면서 최태혁과 남궁후, 남궁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와 추측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걸 들으면서 새삼 그 세 명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래, 그들의 재력과 배경, 직업은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대단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물론 지금은 미친놈들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지만.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남궁호가 점심시간에 찾아와 대뜸 좋은 마이크를 샀다며 자랑했었다. 갑자기 웬 마이크냐고 물었을 때 대답이 가관이었지.
‘오직 너만을 위한 ASMR을 녹음할 거야.’
쓸데없이 진지했던 선언을 떠올리고 있자니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새 콜라 캔을 향해 손을 뻗는데, 부자 형들 소개해 달라는 부탁에 시달리던 채예령이 내 손을 잡아채고 쭉 잡아당겼다.
순간 손을 번쩍 든 모양새가 된 내가 황망하게 채예령을 바라봤지만, 녀석은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강하민과 김은수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얘! 얘가 더 친하거든! 그 형들이랑 친해지고 싶으면 내가 아니라 얘한테 말해!”
그 말에 반짝이는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했다. 이게 뭔….
“뭔 헛소리야!”
“그랬어? 우리 진호가 더 친했어? 아니, 너도 친하게 지내는 형들인데 지금까지 입을 딱 다물고 시치미를 뗐다는 거지? 이 자식, 괘씸하도다!”
내 반박은 들리지 않는 건지 김은수와 강하민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위엄 있는 척 말했다.
나는 잡혀 있던 손목을 획 빼면서 채예령을 노려봤다. 귀찮으면 대충 다른 주제로 넘기면 되지, 왜 나를 끌어들이고 난리야.
거기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목이 약간이지만 시큰거렸다. 과하게 흥분한 데다 힘 조절이 안 되는 것을 보니 이놈들도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네 이놈, 얼른 부자 형들을 소개하지 못할까!”
나는 호령하는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아는 형들이긴 한데, 내가 더 친한 건 진짜 아니야. 채예령하고는 대학 때부터 쭉 친했고, 지금도 나보다는 얘랑 더 친해.”
“어? 그래? 이놈, 채예령! 감히 거짓을 입에 담다니!”
사극풍으로 말하는 게 어지간히 재밌는 모양인지 곤장형을 내리겠다는 김은수의 얼굴이 아주 활짝 폈다. 설상가상 강하민은 옆에서 곤장형이랍신다, 하고 맞장구를 치며 낄낄댔다.
나는 설마 너까지, 하는 마음으로 채예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채예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억울하옵니다, 즈은하- 하며 테이블 위로 읍소했다. 아주 가관이었다.
“하아… 취했네, 취했어.”
“안 취했거든. 멀쩡하거든.”
“신나서 그러거든!”
절로 나오는 한숨을 참지 않고 푹 내쉬면서 말하자, 세 명이 날 향해 중지를 내밀며 킥킥거렸다. 취한 사람의 정석을 보여 주는 면면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극풍 상황극은 채예령에서 끝났다는 점이었다. 이제 녀석들은 각자 잔을 들어 올리면서 킥킥대고 있었다.
나는 세 명이 반도 채 남지 않은 잔을 비우는 걸 보면서 슬슬 마무리하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시간을 확인하려고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핸드폰을 꺼내 드는데,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던 채예령이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그러나 여전히 웃음기가 섞인 어조로 말했다.
“야, 근데 진짜야. 전엔 내가 더 친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네가 더 친해.”
“뭐?”
“태혁 형이랑 호 형이랑 후 형 말이야. 너랑 더 친하다고, 김진호. 아니, 친한 걸 넘어섰지. 응. 넘어섰더라, 딱 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녀석은 뭔가가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