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이거 갖고 싶어서 그래?’
그가 눈치가 빨랐던 건지 아니면 어린애라 숨기는 게 미숙했던 것인지, 내가 별다른 티를 내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물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나는 도리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앞서 걷고 있는 아버지를 따라가기 위해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아당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무슨 생각에선지 그는 자기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풍선을 몇 번이고 뒤돌아보다 아버지가 그를 부르고 나서야 미련을 떨친 듯 제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나도 풍선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가 또 자리에 멈춰 설까 봐 꾹 참고 앞만 보고 걸었다.
‘왜?’
‘아니, 풍….’
아버지의 질문에 뒤를 가리키며 말하려는 그의 손을 꾹 쥐었다. 말하다 말고 나를 힐끔 내려다보는 그에게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버지에게 뭔가를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는 되고 싶지 않았다.
‘선이 특이하게 생겨서. 그거 잠깐 구경하느라고.’
그가 하하, 하고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놀라서 내쉬었던 숨을 도로 들이켰다. 아버지는 그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하는 아이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처음 본 날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되물은 것뿐이었는데, 그 때의 나는 아버지의 모든 행동과 말 한마디에 긴장을 하곤 했었다.
그는 뻣뻣해진 내 손을 꾹 쥐더니 제 뒤로 잡아끌어 숨기고 팔도 뒤로 둘러 안았다. 내 얼굴은 그의 등에 뭉개졌지만, 그 답답할 정도의 밀착감에 오히려 턱 막혔던 숨을 다시 쉴 수 있었다.
‘그래! 완전 너무 그러니까 인제 그만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저런 건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럽기만 해. 넌 유치원생도 아니니까.’
아버지는 식당으로 가자며 재촉하는 그를 향해 말했지만 나도 그도 알았다. 저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사달라고 할 생각 없었는데.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옷깃을 잡았다. 뭘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허전한 느낌이 드는 손에 뭔가를 쥐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 순간 퍽 소리가 들리더니 윽, 하는 아버지의 신음이 들렸다.
‘뭐래, 그냥 보기만 한 거라니까. 그리고 애초에 귀엽고 예뻐서 일부러 들고 다니려고 사는 거거든, 멍청아.’
눈만 내밀고 살펴보니 아버지가 정강이를 감싸며 주저앉아 있었다. 항상 어른스럽던 아버지가 울상을 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통쾌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웃어버렸다. 그의 앞이 아니라 뒤에서 웃은 것이니 엄마를 배신한 것은 아니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그가 돌아보기 전에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아, 저기서 뭐 하나만 사자.”
그 말에 나는 기분 나쁜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더 이리저리 둘러보던 것을 멈추고 녀석을 봤다. 남궁후는 방향을 틀어 어떤 기계로 가더니 터치 몇 번에 표 같은 것을 두 개를 받아 들고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시간. 이거 있으면 우린 무적이야.”
“…아아.”
되게 우쭐대는 얼굴로 하는 말이 참 놈다워서 대충 그러냐고 맞장구를 쳐 주며 한 장을 받아 들었다. 뭔가 싶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패스권’이라는 글자 아래 대기시간 없이 놀이기구를 탈 수 있다고 설명이 적혀 있었다.
이걸 시간이라고 표현하다니. 쟤 아직 중2병이 남아있는 거 아니야…? 합리적인 의심을 하면서 남궁후를 조금 떨떠름하게 보고 있는데, 녀석이 내가 들고 있던 표와 왼손을 가져가면서 물었다.
“너 뭐 못 타거나 타면 안 되는 거 있어?”
나는 큰 손을 꼼지락 대면서 손목에 적당히 헐겁게 표를 채워주는 녀석을 보면서 눈을 굴렸다.
어렸을 때는 내가 워낙 작아서 탈 수 있는 놀이기구가 한정되어 있어, 아기자기한 것만 몇 개 탔던 기억밖에 없었다. 거기다 동행했던 어른들은 나와 같이 타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밖에서 손을 흔들어 주기만 했었다.
그리고 학생 때는 워낙 놀이공원이라는 장소 자체가 주는 기분 나쁜 긴장감에 압도되어 뭘 타고 싶다는 생각을 못 했다. 얼떨결에 떠밀려서 범퍼카를 타거나 회전컵을 탄 것이 다였다.
생각을 마친 나는 남은 표와 자기 손목을 내미는 녀석에게서 표를 받아들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딱히 없는 것 같아요.”
“그래? 잘됐다. 나는 다 좋아하거든.”
남궁후가 했던 것처럼 너무 조이지 않게 표를 두른 나는 안 타봐서 좋아하는 것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려다가 이어지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아기같이 ‘저 무서운 건 못 타요’ 하면서 엉엉 울면 어쩌나 했는데, 우리 곰돌이 어른이다?”
우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변조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진짜 너무 꼴 보기 싫었다. 나는 자존심이 꿈틀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절대. 절대로 그럴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시죠.”
그리고 나는 그 말을 한 것을 매우 후회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무서우면 소리도 나오지 않는 타입이라는 것을 이딴 식으로 알고 싶진 않았다.
“여기 오면 일단 이거부터 타야지.”
그 말이 시작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린다는 롤러코스터부터 360도 회전을 하는 구간이 말도 안 되게 많이 들어가 있는 롤러코스터, 도대체 왜 배를 허공에서 흔들거리게 한 건지 모를 바이킹, 높은 데서 떨어뜨려서 굳이 물 맞게 하는 놀이기구까지.
나는 첫 놀이기구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거 못 탄다. 미친, 이걸 왜 타는 거야. 다들 뭐 안전불감증이야? 거기다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이런 놀이기구들의 특징이 타고 내려가는 도중에 사진을 찍어서 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궁후는 돈이 썩어나게 많은 놈이었다. 사고 싶으면 꼴리는 대로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놈.
“푸흡- 너 표정 봐. 진짜 잘 나왔네.”
녀석은 우리 사진이 뜨는 족족 사들였다. 덕분에 아무 짐도 들고 있지 않았던 손에는 앙증맞은 비닐봉지 여러 개가 들려있었다. 저 안에는 하나같이 세상에서 제일 신난 표정을 짓고 있는 남궁후와 허옇게 질려서 입을 벌리고 있는 내가 찍혀 있는 사진이 담겨 있었다.
“사진만 보면 좀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소리도 하나 안 지르는 거 보면 되게 잘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스릴을 즐기는 타입인가?”
“하하하, 그렇죠.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죠.”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내적으로는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있다. 성대가 턱 막혀서 소리도 안 나올 만큼 무서운 거다. 솔직히 좀 지릴 뻔한 순간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까 한 말이 있었기에 나는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슬쩍 팔목을 확인했다. 씨이발……. 패스권은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차라리 줄을 서서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조금 덜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음 놀이기구를 향해 걸어가는 남궁후의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녀석의 뒤통수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어떻게 이 상황을 타파해야 하나 치열하게 고민했다.
마침 그때, 저 멀리서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다!
“형! 저기 뭐 하나 봐요. 우리 저기 잠깐 가 볼까요? 퍼레이드 같은 거 하나 본데!”
지금 이 상태로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그 기분 더러운 감각을 또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놀이기구에 타는 것을 조금이라도 미루기 위해 아주 호들갑스럽게 말하면서 녀석의 손을 잡아당겼다. 걸음을 멈추고 몸의 무게중심을 뒤로하니 힘차게 걸어가던 남궁후가 내 쪽으로 몇 발자국 끌려왔다.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따라오던 녀석은 고개를 들어 내가 가리킨 쪽을 좀 둘러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보고 싶어? 토네이도 타는 게 더 재밌을 거 같은데.”
토네이도라니. 이름부터 좆나 멀리하고 싶은 느낌이 팍팍 든다. 나는 순순히 끌려오면서도 계속 툴툴대며 뒤를 힐끔거리는 녀석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형, 우린 언제든 그 토 뭐시기를 탈 수 있잖아요? 늦는다고 줄 더 서야 하는 것도 아닌데, 서두를 필요가 뭐 있어요. 퍼레이드는 계속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저거부터 봐요, 우리.”
“그래그래. 가자, 가. 가서 안 보이면 말해라. 형이 특별히 이 태평양 같은 어깨에 앉혀줄게.”
미쳤냐고. 쟤가 나보다 키 크고 덩치도 커서 원래 차이보단 더 차이 나 보이는 거 나도 인정하는데, 거듭 말하지만 나도 178이다. 크진 않지만 작은 덩치도 아니라 어디 가서 귀여움받거나 놀림 받을 정도는 아닌데 저놈을 포함한 다섯 놈들은 나를 아주 꼬맹이 어린애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작 어린애일 때도 어린애 취급을 별로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참 생소하고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장난감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한테 장난감 사주러 가는 삼촌처럼 웃는 녀석을 한 번 보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꾹 참았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이거 말고 그냥 토 뭐시기 타러 가자 그러면 나만 낭패다.
“더 앞으로 안 가도 돼?”
“이쯤에서도 보이는데요, 뭘. 우리 키를 생각해야죠.”
나는 말만 하면 사람을 헤치고 갈 기세인 녀석의 팔을 붙들었다. 의도치 않게 팔짱을 낀 모양새가 되었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모여드는 바람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불편해져서 그냥 그대로 말했다. 남궁후는 그러냐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하더니 하품을 했다.
하 씨, 이거 진짜 흥미가 1도 안 생기나 보네. 나라도 흥미로운 척을 안 하면 당장이라도 놀이기구 타러 가자고 할 것 같은 녀석의 태도에 일부러 더 우와, 와, 하는 소리를 내면서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남궁후는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 요정님들을 보는 대신에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 부담스러워. 내가 알고 있는 감탄사를 세 번씩 돌려쓸 때까지 꾹 참던 나는 결국 그렇게 재미없으면 가자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그러나 조금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더 빨랐다. 내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니 내 허리께 정도에 오는 아이의 손을 잡은 남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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