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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76화 (76/234)

76화

정말 단순하게 계획한 일정이었다. 일상적이지 않으면서도 재미있는 걸 하고 싶은 마음에 떠올린 것이 놀이공원이었고, 해보지 않았을 법한 것을 떠올리다 보니 교복 데이트로 방향이 잡혔다. 민선우가 모두에게 공유했던 ‘어둡고 폐쇄된 공간은 피할 것’이라는 지침과도 거리가 먼 곳이었고, 무엇보다 놀이공원 어떠냐는 그의 문자에 진호는 그러자면서 담백하게 답장을 해왔다. 그래서 후의 머리는 하루 동안 즐겁게 놀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약속 장소에 가까워졌을 때, 길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호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휘파람까지 불면서 신나게 가고 있던 후는 진호가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신호에 걸려 차를 세웠다. 진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보다가 제자리에서 콩콩 뛰기도 하면서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들떴다고 하기엔 얼핏 보이는 표정이 전혀 그렇지 못했다.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는 모습은 누가 봐도 매우 초조해 보였다.

후는 백미러를 통해 미리 준비해 놓은 교복을 힐끔 봤다. 말하지 않고 가져온 것이기에 이것 때문일 리는 없었다.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은 건가. 진호의 집은 근처였지만, 금방 도착한다는 그의 연락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는지도 모른다. 후는 충분히 합리적인 추론이지만 뭔가 정답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뀐 신호를 따라 차를 출발시켰다.

차에 올라탄 진호는 그의 예상대로 화장실에 대한 언급은커녕 아까의 초조한 모습을 어설프게 숨기고 있었다.

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했다.

“진짜 아저씨같아….”

나이를 언급하며 아저씨라고 중얼거리는 진호의 말에 발끈하는 척 맞장구를 치면서 후는 안도했다. 틀어질 뻔했는데 그가 준비한 서프라이즈가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어이없어하는 얼굴과 싫은 기색이 뻔히 보이는데도 투덜대면서 입으려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손에 땀이 나는지 계속해서 허벅지에 문질러대던 것도 점차 줄어들고, 대신 그가 말할 때마다 한심한 사람 보는 눈빛으로 보면서 고개를 젓는 재밌는 반응을 보여줬다.

“첫사랑이 자기 맘대로 되는 거냐고요….”

후는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피식 웃었다. 학원도 다니려고 하고, 호한테 과외도 받는 걸 보면 민선우네 말고 다른 데 취직할 생각도 있는 것 같은데 저렇게 혼잣말이 많아서 사회생활 괜찮을까 싶었다. 뭐, 그의 입장에선 그게 웃기고 귀엽긴 하지만.

아무튼 혼잣말도 잘하는 거 보면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초조해하던 건 어느 정도 잊혔구나 싶어 후는 가서 노는 덴 별 지장 없겠다고 안심했다.

물론, 결론만 말하자면 그건 큰 착각이었다.

“하아, 하아…후….”

후의 등에 바짝 붙은 진호는 뛰어온 건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얼마나 붙어있는지 그의 입김이 후의 등을 따뜻하게 데워줄 정도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 내려 본 진호의 얼굴은 잔뜩 경직되어 있었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은 그의 옷깃을 간절하게 쥐고 있었다.

후는 눈을 굴려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화려한 구조물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장소를 잘못 잡은 것 같다. 여기가 문제인 거야, 아니면 그냥 놀이공원 자체가 문제인 거야. 머리가 좀 복잡해졌지만 어쨌든 진호의 동의하에 온 거기 때문에 여기서 갑자기 다른 데를 가자 하기도 좀 그랬다. 별 저항 없이 교복까지 갈아입은 걸로 봐선 진호로서도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일단 그에게 붙어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그 부분에서라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후는 진호의 말랑한 손을 잡았다.

“야 저기…남자…손깍지….”

“성인이랑 미성년자로 보이는데 괜찮은 거야…?”

아 진짜 못 들어주겠네. 후는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 어쩌고 하면서 손깍지 얘기하는 부분에서 우리 얘긴가 하고 모르는 척 그 방향으로 걸어갔더니 들리는 말이 가관이었다.

다행히도 거의 억지로 씌우다시피 한 곰돌이 머리띠를 하고 병아리처럼 후의 등만 보고 걷고 있는 진호는 듣지 못한 듯했다. 아마 저걸 들었으면 조금만 떨어져도 불안해하는 주제에 손을 놓고 걷자고 말했을 것이다. 게이라는 걸 창피해하지도 않으면서 후 자신을 위해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후는 나름 동안이라고 생각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눈을 마주치고 급하게 입을 가린 사람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메롱을 해 보였다. 그리고 맞잡은 손만 보고 걷고 있는 진호를 힐끗 보고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놀이공원에서 교복 입고 손잡고 걸어 다니는 것까지. 분위기는 좀 달랐지만 어쨌든 계획했던 것들을 하나씩 하고 있긴 한데, 아무래도 진호 상태를 봐선 수정이 필요한 것도 있었다.

사실 후는 오늘 진호의 사진을 왕창 찍어가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액자로 만들어서 진호 집에 장식해 줄 생각이었다. 저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는 것을 알고 부들부들댈 반응이 기대되기도 했고, 그 휑한 거실에 재미를 더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문제는 후. 그는 사진 찍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진호를 찍어줄 생각이었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일부러 반응을 보려고 보폭을 크게 해서 조금만 거리를 띄워도 마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면서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는 진호다. 그런 애한테 사진 찍어 줄 테니 저기 가서 서 있으라 하기가 좀 머쓱했다.

애초에 사진도 정신없게끔 밀어붙여서 재밌는 포즈를 시킨 다음 찍을 생각이었던 후의 계획은 누가 봐도 불가능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손을 꾹 잡아오는 진호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아주면서 그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같이 다니면서 최대한 상체만 멀리해서 얼굴 위주로 찍거나 같이 찍히는 수밖엔 없는 것 같았다.

“흐음….”

이왕 같이 찍을 거면 제대로 찍어야지. 얌전히 따라오는 진호를 힐끗 보고 짓궂은 미소를 지은 후는 마침 눈에 보이는 회전목마를 보며 차에서 봤던 사진을 떠올렸다. 그대로만 할 수 있으면 상황은 더 재밌어질 것 같았다.

“진짜 지랄도 풍년….”

물론 진호는 그의 계획을 눈치채자마자 매우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육두문자를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미 나머지 놈들에게도 액자를 돌릴 생각까지 마친 후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찍어줄 사람을 물색하기 위해 자꾸 그를 붙잡고 늘어지는 진호의 손을 토닥이면서 두리번거리는데, 신은 그의 편인지 먼저 말을 걸어오는 무리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핸드폰부터 넘겨받았다. 그리고 남 사진 찍어주겠다고 진호의 손을 놓고 떨어지는 것으로 그를 불안하게 만들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그 핸드폰은 진호의 손에 쥐여주었다.

후는 붙어있지 않으면 긴장하는 자신을 위해 그런 건 줄도 모르고 투덜거리는 진호를 뒤에서 끌어안으면서 재촉했다. 형님의 하해와 같은 마음을 모르다니. 조금 심술이 난 기분은 괜히 귓속말을 해서 간질이는 것으로 풀었다. 겸사겸사 움찔거리면서 귀를 붉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후는 핸드폰을 건네주고 긴장한 표정으로 학생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진호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원하는 구도로 찍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말로 하면 절대 안 들어 줄 것이 뻔했으므로 방심한 틈을 타 힘을 써야 할 것 같다. 아까 괜히 말해 둔 것이 있어서 경계할 것 같으니 일단 경계심부터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진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뭔가 싶어서 진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곳에는 아까부터 그를 힐끔대면서 얼굴을 붉히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악! 어떡해, 어떡해! 쟤 진짜 물어봤어!”

하, 요즘 어린애들이란. 후는 뒤에서 호들갑 떠는 여학생들과 바로 앞에 서서 자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여학생을 번갈아 보면서 목을 한번 젖혔다가 앞을 봤다.

이런 상황에는 익숙했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달가운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대상이 미성년자고, 지금 당장 호감을 얻고자 하는 상대가 바로 옆에 있을 땐 좋은 게 아니라 귀찮았다.

평소라면 더 커서 오라고 말하면서 바로 자리를 떴겠지만 그러면 진호와 여기서 사진 찍기 위해 다시 실랑이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고등학생….”

이 와중에 자기가 고등학생으로 보인 것이 그렇게 충격적인 건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진호를 한번 보고 후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핸드폰을 건넸다. 우리가 사진 찍는 모습을 보면 알아서 단념하겠지 싶은 마음도 있었다.

왜인지 몰라도 그를 보며 양심 없다면서 째려보는 진호를 끌고 봐뒀던 곳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후는 계획했던 대로 진호를 방심하게 만든 뒤 재빠르게 들어 올렸다.

“으아악! 뭐, 뭐예요!”

당황하는 진호는 웃겼다. 후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서 웃으면서 뻣뻣하게 힘이 들어간 진호의 몸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눈까지 감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만 어쨌든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점점 움츠러드는 진호를 들고 있던 팔을 아주 잠깐 느슨하게 만들었다.

밑으로 내려온 진호의 입술 위치에 맞춰 살짝 고개를 조정하자 의도하던 대로 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꽉 감겨있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후는 씨익 웃었다. 다시 추슬러 안으면서 조금 멀어진 얼굴엔 대왕 물음표가 콕콕 박혀있었다.

그 상태로 얼마간 후를 내려다보던 진호는 버럭 소리를 지를 것이라는 후의 예상을 깨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허탈하고, 화는 나는데 또 개운해 보이는 그런 얼굴을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후는 그 모습을 보며 왜인지 모르게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비유가 떠올랐다.

활짝 피어난 미소. 정말 꽃이 개화하듯 순식간에 활짝 펴진 진호의 평범한 얼굴이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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