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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71화 (71/234)

71화

나는 고요함을 잠깐 즐기다가 눈을 떴다. 채예령은 역시나 내 눈치를 보면서 할 말을 꾹 참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녀석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저 표정을 보는 게 꽤나 고소해서 나는 채예령의 말실수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거기다 이렇게 얄미운 웃음을 지어 주면 부들거리면서도 아무 말 못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정말 최고로 재밌다. 나는 주먹을 꽉 쥐는 모습을 보면서 메롱이라도 할까 하다가 봐주는 심정으로 여기까지 온 용건을 꺼내 들었다.

“조만간 아저씨 건강 검진 받으러 가시지?”

“…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겪어 봤으니 알지. 이것도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다행히 몇 월인지는 기억이 났다. 사실 기억이 안 날 수가 없는 일이긴 했다.

뜬금없는 내 질문에 채예령은 방금 전까지 약 올라하던 것도 있고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놀랐다. 집에서부터 어떻게 이걸 알았는지에 대한 핑곗거리를 찾긴 했는데, 적절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던 나는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원래 다 알아. 아무튼 너 잘하지도 못하면서 괜히 운전한다고 까불지 말고 택시 타고 다녀와.”

“내가 같이 간다는 건 또 어떻게 알고….”

“넌 엄청 효자니까 건강 검진 가시는 데 당연히 모시고 갈 거라고 생각했지.”

당연히 구라다. 채예령이 효자는 맞지만 아버지 건강 검진도 모시고 간다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녀석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전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상 설명해 줄 마음이 없었으므로 모르는 척 내 할 말만 했다.

“꼭! 택시 타라. 그게 아니면 아저씨 기사님한테 맡기든가.”

“갑자기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그냥 꿈자리가 사나워서 그래. 진짜 말도 못 하게 사나웠으니까 제발 내 말 들어. 알겠어?”

크게 다칠 것만 같은 정말 흉흉한 꿈이었으니까. 정색하며 덧붙이는 말에 채예령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모르겠지. 그 끔찍한 광경을.

회귀 전에 채예령은 아저씨를 태우고 병원을 가다가 접촉 사고를 일으킨다. 그게 꽤 큰 사고여서 아저씨는 크게 다치시고 녀석도 몇 주 입원할 정도로 다쳤었다. 병실에 누워 계시던 아저씨의 모습도 충격이었고, 항상 밝던 아주머니가 울기만 하는 모습도 충격이었지만 그때 채예령의 얼굴에 서린 절망과 불안, 자괴감은 절대 잊지 못할 장면으로 남아 있었다. 그 일은 막아야 했다.

“오늘 좀 이상해 김진호. 일단은 알았다. 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뭐, 찝찝해서라도 그렇게 할게. 아, 맞다. 나 아버지 모시고 가는 병원, 호 형네 병원이라서 간 김에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너도 올래? 너 요즘 형들이랑 자주 만나는 거 같던데.”

아,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 것이 쌍둥이와 경계를 허물 만큼 친해진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아저씨와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그들의 모습에 감동한 채예령이 그들과 거의 막역지우처럼 지내기 시작했었지.

나는 이번엔 밥 먹으면서 친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녀석에게 정확하게 언젠지 물었다. 지금 녀석들 상태면 채예령 앞에서도 뭔가 헛소리를 지껄일 것 같으니 되도록 핑계를 만들어서 거절할 생각이었다.

“아니, 건강 검진 가는 건 알면서… 아 알았다 알았어. 이번 주 금요일이야.”

채예령이 설명이 곤란한 화제를 또 꺼내길래 인상을 한껏 찌푸렸더니 다행히 바로 요일을 말했다. 휴, 쟤도 은근 단순해서 다행이라니까. 근데 월초에 했구나, 건강 검진.

오늘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금요일이면 안 돼. 나 그날 후 형이랑 어디 가기로 했어.”

“그래? 너 요즘 형들이랑 진짜 자주 만나네.”

그지. 자주 만나지. 근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단다.

“그날 내가 어디 가게?”

“어? 뭐 어디 특별한 데라도 가?”

“놀이공원.”

나는 채예령을 향해 씩 웃었다. 장소를 듣자마자 녀석의 떨떠름한 표정이 놀라움으로 변했다. 아, 저거지. 녀석이라면 저런 반응을 보여 줄 거라고 생각했다.

“둘이?”

“응.”

“왜?”

“그냥. 가자 그러는데 거절할 핑계도 없고. 어른이니까.”

내 마지막 말에 채예령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천장을 한 번 보고 나를 한 번 보더니 책상에 팔을 걸치고 그 위로 엎어졌다. 질문이 더 이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고 생각할 무렵, 내 쪽으로 고개만 돌린 녀석이 볼멘소리를 냈다.

“내가 교회 가자고 하면 안 갈 거지.”

“채예령, 내가 입으로 방귀 뀌는 거 아니라고 했지. 그리고 그런 거 아니야.”

남궁후는 그런 게 아닌 게 아니지만 하얀 거짓말이라고 치고 패스.

“여자 소개해 줄까 진호야?”

멀리 가네, 이 새끼. 나는 조용히 가운뎃손가락만 편 주먹을 녀석에게 내밀었다. 다행히 채예령은 그것만 보고도 내가 얼마나 심한 쌍욕을 날리고 싶어 하는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팔에 얼굴을 묻은 녀석은 그러고 한참 뒤에 다시 나를 봤다.

“그럼 여럿이서 가, 친구들 더 불러서. 그편이 더 재밌을 거고, 혼자 남을 확률도 없어지잖아.”

“그럴 친구 없다.”

“그러니까 내가 너 친구 좀 더 만들고 그러라고 했지. 그렇게 같이 다녔는데 왜 이럴 때 연락할 친구 한 명이 없냐 너는!”

있어도 차마 부를 수 없다는 것도 말해서 좋을 것이 없으니 패스.

“이제 괜찮아질 때도 됐으니까 한번 가 보는 거야. 보려고, 괜찮아졌는지.”

혼자 한번 서 있어 보고 싶어. 마지막 생각은 굳이 말로 하고 싶지 않아서 삼켰다. 그래도 알아들었는지 녀석은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봤다. 또 오버한다, 채예령.

“야, 왜 네가 울상이야. 얼굴 안 펴? 그리고 너는 아무 일도 없었으면서 거길 왜 싫어하냐? 다 큰 어른이 놀이공원 가기 싫어서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는 얘기 들으면 사람들 웃어, 인마.”

“너 그 얘기 안 질려? 그리고 딱 한 번 그랬거든.”

“어쨌든.”

내 히죽대는 얼굴에 열 받아서 목이 탔는지 채예령이 갑자기 콜라를 따랐다. 시원하게 마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뭔가 마시고 싶어졌다.

나는 발을 들어 녀석의 다리를 툭 치고 턱짓으로 오렌지 주스를 가리켰다. 녀석은 나를 흘겨보면서도 별말 않고 오렌지 주스를 컵에 가득 따라 건네면서 중얼거리듯 답을 뱉었다.

“너무 뻔한 클리셰가 있는 데라 싫어. 괜히 싫어 그냥.”

씁쓸한 어투에 나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다 말고 녀석을 힐끔 봤다. 채예령은 뚱한 얼굴로 앞머리를 넘기고 있었다.

“학교에서 현장 학습으로 가면 좋아했으면서.”

“그건 여럿이 있잖아. 사람 많이 가는 건 상관없어. 놀이기구 타는 건 좋아하기도 하고.”

그건 그랬다. 나도 그때만큼은 사람 많은 것에 불편함이 아니라 안정감을 느끼곤 했으니까. 저 녀석의 오지랖이 그다지 싫지 않은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었다.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컵을 옆에 놓고 다시 누웠다. 채예령은 그런 나를 보면서 고개를 젓더니 컵을 들어 책상 위 자신의 컵 옆에 나란히 놓았다.

“하여간 바닥에 컵 놨다가 쳐서 넘어지면 주스 흘러서 끈적해진다고 계속 얘기하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지. 이런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가 부지런한 사람을 만드는 거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도 매번 똑같아. 애도 아니고.”

“그래그래.”

나는 채예령이 하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시간상 조금만 더 있으면 아주머니가 우릴 부를 것 같았다. 자기엔 애매한 시간이네.

“가서 힘들면 연락해. 저녁까지 있을 거 같진 않지만 혹시 있게 되면 병원 갔다가라도 합류할 테니까.”

“응응.”

힘든 상황이 되면 쟤가 온다고 나아질 것 같진 않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들어도 건성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리를 툭 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파리를 내쫓듯 손을 저으면서 눈을 감았다.

“하아…. 사람이 말하면 좀 진지하게 들어라. 잔소리로 넘기려고 하지 말고.”

“잔소리로 넘기는 게 아니라 잔소리야.”

내가 그렇게 누누이 잔소리고 오지랖이라고 일깨워 주는데도 꿋꿋이 건설적인 조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새다. 그 안에 담긴 애정은 진짜라는 사실을 내가 몰랐다면 진작 펀치 한번 날릴 만한 말들도 많았다는 걸 정말 모르는 눈치라 순간 짜증이 났지만 한숨 한번 쉬는 것으로 참았다.

쟤가 저런 놈이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저러는 것도 아니니까. 투덜거리긴 해도 결국 다 들어 주고 있는 나도 문제라면 문제기도 하고.

“…취업은 진짜 다시 한번 생….”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하면 나 지금 입은 옷 그대로 침대 뛰어든다.”

“죽어 진짜.”

그래도 오늘 허용된 잔소리 인내심을 다 써 버린 나는 필살기를 꺼내 들었다. 침대 결벽증이 있는 녀석은 내가 양말 신은 발을 침대 쪽으로 내미는 것을 보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조용해진 녀석을 향해 혀를 한 번 내밀고 편한 자세를 잡았다. 아주머니가 부르러 오시기 전까지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짧은 낮잠을 잤다. 짧았지만 회귀 후 가장 마음이 편했던 잠이었다.

* * *

그리고 며칠 뒤 금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나가서 아저씨와 채예령이 택시를 타는 모습을 지켜본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데리러 오기로 한 남궁후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차 앞 유리로 얼핏 보이는 얼굴이 남궁후가 맞는 것 같았다. 나는 긴장 때문에 축축해진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입을 떡 벌렸다.

“형. 뭘… 입고 있는 거예요?”

힐긋 본 시야에 넥타이가 있길래 놀이공원 가는데 뭔 양복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어? 나? 교복!”

교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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