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뭘 입고 있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걸 왜 입고 있는지 이해가 안 돼서 물어본 건데 저렇게 발랄하게 대답하니 말문이 막혔다. 나는 지금 서 있는 곳이 길 한복판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일단 차에 탔다. 자리에 앉아 벨트를 당기면서도 시선은 녀석에게 고정한 채였다.
머리에 별의별 의문이 다 들어찼지만 그걸 어떻게 말로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민선우네 집에 있었던 메이드복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형 설마….”
“응. 네 거는 뒤에.”
나는 녀석의 손끝이 향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목을 억지로 돌려서 본 뒷좌석엔 가지런히 개켜진 셔츠와 바지가 있었다. 그 위에 얹어진 동그랗게 말린 리본은 넥타이인 것 같았다. 계속해서 메이드복이 반짝거리며 머리를 지배했다.
“혹시 코스프레가 취미….”
“는 아니다.”
아닌 게 아닌데. 말이랑 행동이랑 너무 다른데. 나는 하하, 하고 공허하게 웃으며 앞을 향해 바로 앉았다.
“저걸 입으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저걸 입고 놀이공원을 돌아다니자는 소리인 거죠?”
“그렇지. 원래 호 거 가져오려고 했는데 그랬다간 바지로 청소하고 다닐 것 같아서 그냥 하나 사 왔어.”
“…형, 저 스물여섯이에요.”
그 말은 교복에서 벗어난 지 무려 7년이 되었다는 소리다. 심지어 내 정신 연령은 27살이라고. 1년 차이가 별거냐고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튼 교복 입고 돌아다니기엔 너무 부끄러워 기절할 것만 같은 그런 차이는 된다고. 거기다 남궁후 쟤는!
“형은 스물아홉….”
“시끄러워. 나이가 뭔 상관이야, 재밌으면 그만이지. 마침 요즘 애들 사이에 유행이라니까 토 달지 마.”
와, 요즘 애들이래. 완전 아저씨 같다.
“아저씨 아니다.”
“누, 누가 아저씨래요?”
나는 이를 악물고 말하는 남궁후의 눈을 피해 딴청을 피웠다. 내 표정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볼을 뭉개면서 다시 녀석을 힐긋대는데 인상이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그래 봤자 저 차림을 하고 인상 찌푸리면 뭐 하냐는 생각밖에 안 들었지만.
그 와중에 진짜 입던 교복인지 가슴에는 명찰이 달려 있는 데다 팔 부분이 팽팽해 보이는 것이 좀 작아 보였다. 졸업하고 운동 좀 한 대학생이 옷 정리하다가 심심해서 교복 입었을 때의 모습 같달까? 확실히 아저씨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넋 놓고 볼 정도로 어울리냐? 그만 봐라 뚫리겠다.”
“…형. 팔에 피는 통해요?”
“쓰읍- 운동해서 그래, 운동해서.”
내 거 살 돈으로 자기 거나 새로 사지라는 말은 침과 함께 삼켰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뒷좌석을 봤다.
말하는 걸로 봐선 절대 안 벗을 모양인데, 그런 애 옆에서 같이 다니려면 나도 똑같이 하고 다니는 편이 덜 쪽팔릴지도 모른다. …씨발. 결국 입게 될 거 같으니 그냥 그렇게라도 생각하자. 어차피 내 인생에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 앞인데 까짓것 그냥 입어 보지 뭐. 유행이라잖아.
내가 진짜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이 나이에 교복을 다시 입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정말 별 경험을 다 해 본다. 그래도 나름 위안인 것은, 성인이 교복 입고 놀이공원 가는 것이 유행이긴 한지 인터넷에 ‘교복’, ‘성인’, ‘놀이공원’이라고 치면 꽤나 많은 검색 결과가 나온다는 점이었다. 누군가에겐 이게 로망으로 꼽히는 데이트이기도 한 듯했다.
나는 회전목마 앞에서 다정히 서 있는 커플 사진들을 보고 여전히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메이드복을 떠올리며 그래도 이 새끼가 여자 교복을 가져오진 않은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너도 보다 보니까 재밌어 보이지?”
“뭐…. 많이들 하네요. 남. 녀. 커플 데이트로.”
내가 사진이랑 영상들을 보고 있는 걸 봤는지 옆에서 우쭐대는 녀석에게 아예 핸드폰 액정을 들이댔다. 남궁후는 잠깐 눈길을 주더니 다시 앞을 보면서 대꾸했다.
“걔네는 이성애자니까 남녀로 간 거고. 나는 바이, 너는 게이니까 우린 남남인 거지.”
“…그건 그렇죠. 네.”
너무 맞는 소리라 머쓱하게 핸드폰을 내렸다. 내 말은 보통 남자와 여자가 커플로 가지 남자끼리 가는 경우는 없다는 거였는데 그걸 저렇게 사람 할 말 없게 받아치다니.
“다른 애들이랑은 뭐 하는지 모르겠지만 걔네 성격에 거기서 거기일 거고, 호랑은 공부한다며.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나랑은 재밌는 거 하자. 네가 못 해 봤고, 하고 싶었던 재밌는 것들. 일단 너 학교 다닐 때 연애 안 해 봤을 거 같아서 이거부터 해 보려고.”
“이게 뭔데요.”
“넌 모르겠지만 학교 다닐 때 하는 연애는 느낌이 다르거든. 뭐, 교복 입는다고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기분은 낼 수 있잖아? 내가 오늘 그거 해 줄게. 첫사랑 선배.”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보고 활짝 웃는 남궁후의 미소가 너무 청량해서 그게 해 준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을 차마 못 했다.
전부터 느낀 건데, 얘네 얼굴로 너무 무마해. 개소리한 다음에 얼굴 써서 무마하는 게 아주 습관인 것 같았다.
“나 정도면 첫사랑에 빠지기 딱 좋은 조건 아니야? 공부 잘해, 운동 잘해, 키 크고 몸 좋고, 거기다 잘생기기까지. 실제로도 학교 다닐 때 인기 많았어, 나. 그런 선배랑 일대일 놀이공원 데이트를 하는 건 정말 설레는 일이야. 그지?”
“하아…. 네, 두근거리네요.”
하다 하다 설레는 것도 주입식이 될 줄이야.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하하 웃어 주고는 앞을 봤다.
녀석이 말한 대로 연애는커녕 첫사랑 같은 것도 없었다. 학교 다니면서 날 설레게 했던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닌데 첫사랑이라고 했을 때 정말 단 한 명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기억에 남을 만큼 좋아하는 감정이 생길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없기도 했고, 그렇다고 ‘먼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너무 좋아!’ 하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어서 그랬던 걸까.
근데 순간순간 상상하던 설렐 만한 상황은 있었다. 보통은 내가 소외당하고 서러워졌을 때나 상처를 받는 말을 들었을 때 나를 달래기 위해 생각하곤 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나를 소외시킨 사람들이 놀라 쓰러질 만큼 멋진 사람이 나타나 보란 듯이 내 편을 들어준다든가, 날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는 그런 유치한 상상을 했다.
뭐, 그런 생각을 하긴 해도 실제로 일어날 거라는 기대는 없었고, 남한테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스스로의 나약한 의지에 실망하는 걸로 끝났지만.
“내릴 때 교복 챙겨. 갈아입는 건 대충 화장실에서 하고, 입고 온 건 너만 괜찮으면 버리고 나와. 가는 길에 새 옷 사 줄 테니까.”
“와 진짜 부자 같네요, 그 말.”
나는 저 멀리 보이는 놀이기구 끄트머리를 보다가 남궁후에게 시선을 옮겼다. 녀석도 내 눈길을 느꼈는지 나를 힐긋 보더니 씨익 웃었다.
…모든 걸 가진 잘난 선배와의 데이트라.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나을지도. 황당하긴 하지만 이편이 과거에 덜 얽매여 있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일단 갈아입기는 했는데요.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는 거죠…?”
갈아입는 동안 몇 번의 현타를 이겨 내야 했던 나는 기다리고 있는 남궁후에게 쭈뼛쭈뼛 걸어갔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남궁후밖에 없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부끄러웠다.
아까 이런 게 차라리 나을 거 같다고 생각한 사람 누구야.
“그래, 괜찮다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진짜 괜찮아. 그냥 고등학생인데?”
남궁후는 나를 빙 돌아보더니 내 볼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렀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아니. 가야지. 너 갈아입는 동안 표는 미리 사 놨어. 옷은 버리라니까 들고 나왔네. 들고 다니기 좀 그러니까 들어가서 물품 보관함 있는 데부터 가자.”
한참을 내 얼굴을 이리저리 뭉개던 녀석은 내가 핀잔을 주고 나서야 움직였다. 진짜 가는구나. 입구로 걸어가는 남궁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황당한 상황에 빠져 잊고 있었던 긴장감이 몰려왔다. 학교 다닐 때 현장 학습으로 왔던 것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는….
‘야 눈치 좀 챙겨! 아주 누가 보면 셋이 사귀는 줄 알겠다!’
염치도 없이 채예령하고 채예령 여자 친구한테 딱 붙어서 겨우 견뎠었지. 그때 그 여자애에게는 대충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었다. 나중엔 오히려 그 여자애가 더 나서 줘서 정말 고마웠던 기억이 있었다.
‘거참! 여자 친구인 내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네가 왜 지랄이야!’
나는 나름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난 추억을 되새기며 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남궁후를 뒤따라가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순간 그 등이 멀게만 느껴졌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앞서간 등이 너무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안 돼, 아직은 아니야.
나는 쇼핑백 손잡이를 고쳐 쥐고 급하게 발을 옮겼다. 다리가 더럽게 긴 놈답게 보폭이 커서 따라잡으려면 뛰듯이 가야 했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쪽이 더 싫었다. 나는 녀석을 따라잡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등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 가까이서 걷기 위해 노력했다. 입장할 때 즈음에는 등에 코를 박고 있는 수준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한 걸음 물러나야 하나 생각하는데, 등이 움직였다. 몸을 돌린 남궁후가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한 소리 듣겠구나.
‘진호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진짜 김진호 저 새끼 은근 민폐라니까.’
나는 언젠가 들었던 말들이 귓가를 스치는 것을 느끼며 초조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그게, 제가 좀 길치여서 길을 잃을까 봐…….”
그러나 하려던 말은 녀석이 대뜸 내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뺏어 드는 바람에 끝을 맺지 못했다. 놀란 나는 허전해진 손을 허공에 띄운 채 황망한 표정으로 녀석을 올려다봤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녀석은 웃고 있었다.
“누가 뭐래? 네가 나한테 붙어 있어 주면 나야 땡큐지. 근데 이러면 너 불편하니까 이렇게 다니자.”
남궁후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경쾌하게 말하고는 여전히 어정쩡하게 있던 내 손을 잡았다.
“잠, 잠깐만요! 저 손에 땀 장난 아닌데!”
나는 아까 긴장으로 손이 땀으로 흥건했던 것을 상기하며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녀석의 손을 떨쳐 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손을 쥔 힘은 강해졌다.
“아 괜찮아! 너무 괜찮으니까 쓸데없는 거 그만 신경 쓰고 가자. 시간 아깝다!”
남궁후는 그렇게 제 할 말만 하고 뭐가 그렇게 급한지 서둘러 걸었다. 나는 녀석의 보폭에 맞추느라 얼떨결에 경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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