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러나 어쨌든 그의 상사가 물었던 ‘필요’가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으므로 그냥 입을 다물었다. 태혁은 조용해진 사내에게서 눈을 떼고 진호를 내려다봤다. 진호는 태혁의 무릎 위에서 그를 마주 보고 앉아 폭 안긴 상태였다.
“너희가 정장 재킷을 벗으니 잠깐 정신을 차린 것 같던 똥강아지가 자기 꼴을 자각하자마자 다시 정신을 놨다고?”
“네…. 아니, 그보다 그 똥강아지란 건 도대체 뭡니까, 아까부터!”
사내는 마지못해 대답하면서도 처음 보는 소년의 등을 토닥이는 자신의 상사가 영 이상한 것 같아 불안해졌다. 아까부터 저 소년을 지칭하는 듯한 이상한 호칭은 그의 마음을 가장 불안하게 하는 요소였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으로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진호가 살포시 인상을 쓰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버렸다.
“내가 자리를 좀 비우고 있었다고 만만해졌나 보지, 김종혁?”
“…아닙니다.”
태혁은 진호가 깨기라도 할까 엉덩이께를 토닥이며 사내, 종혁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생각에 빠졌다.
사실 몸 상태야 한참 전에 괜찮아졌었다. 늙은이들이 제대로 엿을 먹이려고 했는지 독한 약을 썼던 것 같지만 자신이 약 따위에 당할 리는 없었다. 자라온 환경상 칼에 맞은 것이 처음도 아니고, 거기에 약을 발랐다고 해봤자 죽일 목적이 아니면 다 거기서 거기다. 더군다나 김진호의 초기 처치가 그런대로 괜찮았고, 집이 빈 사이에 의사의 진료도 꾸준히 받았던 터라 탈이 날래도 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은 진호 녀석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오래오래 함께 있자니. 좋아한다는 표현을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지금 생각해도 가소롭지만 귀여운 애원이었다. 안타깝게도 자신에겐 예령이 있어 그 마음에 답해 줄 순 없지만…, 집에 머무르는 것 정도야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자신도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본가 욕실만 한 집이었지만 아늑했고, 화려하진 않지만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밤마다 즐기는 키스도 립스틱 향밖에 나지 않는 멍청한 모델이나 연예인 나부랭이들과 하는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고, 아침마다 빼줄 때의 표정 또한 유흥가에서 굴러먹던 것들보다도 더 색기 넘쳤다. 잘 느끼는 몸이 감당이 되지 않는지 눈물 고인 눈으로 매달려올 때는 힘으로 눌러서라도 제대로 범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말이 많은 건데, 의식적으로 하는 말도 말이지만 분명 저도 모르는 새에 내뱉고 있을 혼잣말은 더 가관이었다.
그럼에도 크게 거슬리지 않는 건, 온갖 말을 투덜거려도 자신이 조금만 심기가 불편한 티를 내면 눈치를 살살 보며 억지로 웃는 게 제법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서워 바들바들 떨면서 ‘나 때릴 거야? 안 때릴 거지?’ 하고 재롱을 피우는 것 같은 표정을 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한마디로 자신의 김진호는 좀…. 아니, 꽤 귀여웠다.
태혁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귀가가 더 늦어질 것 같다는 매우 거슬리는 소리를 하는 진호에게 일부러 분노를 숨기지 않고 표출했다.
평소에 조금만 목소리를 깔아도 움찔대며 눈치를 보는 진호이기에 그렇게 하면 무서워서라도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진호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겁을 먹고서 비 맞은 강아지처럼 떨어댔다. 당연히 귀가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조정되었다. 다시 곱씹어봐도 그때의 진호는 정말 귀여웠다. 그냥 그대로 울려버릴 걸 그랬나-.
“…니…? 혀… 님…! 형님!”
태혁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시끄럽게 구는 종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부터 그의 측근들은 그가 하루빨리 조직으로 복귀해 줬으면 했다. 그러나 태혁은 그를 죽이고 싶어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늙은이들의 앞에 굳이 모습을 드러내봤자 오히려 귀찮은 일만 늘릴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러지 않았다.
실종 상태로 남겨둔 채 종혁을 통해 어떤 새끼들이 엮였는지 조사하면서 그를 따르는 측근들을 재정비하고, 중립인 늙은이들은 회유했다. 더불어 반대파 늙은이들의 세력하에 있는 조그만 조직들을 매수하며 오히려 전보다 세력을 늘렸다. 습격을 당하기 전부터 준비했던 계획이었기에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습격은 그 계획의 진척도를 아주 조금 늦춘 정도의 피해밖에 주지 않았다.
태혁은 그를 엿 먹이기 위해 이 사태를 만든 망할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조금만 더 조사해봤더라면 그의 어머니가 말도 없이 프랑스로 향한 것이 남자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 때문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떠난 이유를 오인한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엿을 먹이고자 술에 취한 척 일을 벌였다. 임원들이 모인 저녁 만찬 자리에서 ‘후계자’, ‘상속’ 등의 민감한 단어를 언급하여 그들의 신경을 자극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습격 후 태혁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지 않아 일이 좀 수월했다는 점이다. 그 소문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겠지만, 어느 정도 방심해준 덕분에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이제 거의 막바지에 왔다. 반대파의 선두인 여우 한 마리만 잡으면 되는 상황에서, 측근들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됐으니 태혁이 건재하다는 걸 확실히 보여 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쓰러져 있다는 소문이 너무 오래가면 밑에 직원들이 불안해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도 거기에 대해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나 진호가 걸렸다. 그래서 미뤄왔던 것인데, 답답했던 종혁 무리가 말도 없이 태혁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찾아와버렸다.
“형님, 이제 진짜 돌아가셔야 합니다.”
종혁은 여전히 조용히 진호를 토닥이고만 있는 태혁에게 다시금 용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뒤에서 조용히 서 있기만 한 일행에게 눈짓했다. 너네도 뭐라고 말 좀 해. 그 입 모양을 본 일행 중 하나가 거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따 행님. 가보셔야 한다니까요?”
물론 태혁은 대답은커녕 말한 사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종혁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너는 왜 서울 애가 되지도 않는 사투리를 쓰냐?”
“씨발. 원래 조폭은 사투리 써야 하는 거 모르냐, 이 무뇌아 김종혁새끼야.”
“존나 쪽팔리니까 그냥 서울말 써라, 이 초딩 뺨치는 박재원 새끼야.”
조용한 방안을 울리는 두 사람의 대화가 점점 산으로 가는 것 같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사내가 그 둘 사이에 서서 진정하라는 듯 손을 펼쳐 보였다.
“둘 다 형님 표정 보고 씨불여라. 이 금붕어 똥 같은 새끼들아.”
그리고 제스쳐만 봐선 둘을 말릴 것 같았던 그는 오히려 더 자극하는 말을 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이귀염 이 또라이가!”
“내가 이름으로 부르지 말랬지, 이 씹어먹을 새끼들아!”
“시끄러.”
셋은 근접한 거리에서 풍겨오는 서늘한 기운에 꿀 먹은 벙어리를 자처했다. 방안은 금세 조용해졌지만 이미 태혁 품에 있던 진호는 심하게 뒤척이기 시작했다.
태혁은 살기 어린 한마디로 시끄러운 셋을 조용히 시키고 칭얼거리는 진호를 달랬다. 그가 쉬- 착하지. 자자, 하며 귓가에 입을 맞추고 엉덩이를 토닥이자 진호는 금세 웃는 낯으로 깊이 잠들었다.
상사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셋은 놀라기도 놀랐지만 소름이 끼쳐 죽을 것만 같아 쩍- 하고 굳어버렸다.
“깼으면 너희 셋은 죽었다.”
최태혁은 다시 특유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얼어있는 세 사람에게 싸늘히 말했다. 딱 봐도 진심으로 한 얘기였다.
“조만간 돌아간다.”
멍하니 태혁과 진호를 보고 있던 셋은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종혁은 갑작스러운 일을 겪은 것도 모자라 말다툼을 하느라 정작 중요한 보고는 하나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하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아까 그가 말했던 이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말 그대로였다.
“오늘 가셔야 합니다.”
다급하게까지 들리는 어조에 태혁이 고개를 들었다. 반대로 종혁은 고개를 숙이고 면목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일이 틀어졌습니다.”
사소한 것이라고 여겼던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했던 데다, 잘 해내고 싶어 욕심을 부리다가 보고 시기도 놓치는 바람에 결국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되었다. 상황 설명을 위해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는 종혁을 힐끔 보며 이번엔 재원이 나섰다.
“저희가 직접 와야 했던 만큼, 좀 급한 일입니다.”
방금 전까지 가벼웠던 공기가 급속도로 무거워졌다. 드디어 말을 고른 종혁은 현재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간간이 진호의 등을 쓸거나 엉덩이를 토닥이던 태혁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확실히, 가야겠군.”
“…죄송합니다.”
“쯧-, 멍청한 놈들. 기한은?”
“오늘 저녁입니다.”
태혁은 이를 갈며 진호의 곤히 자는 얼굴을 고개 숙여 살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은 다정했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똥강아지는 놔두고 가야겠지. 그는 그것이 가장 불만이었다.
* * *
“그러니까, 형…. 태혁 형이….”
“그래. 돌아간다.”
씨발, 잣 됐다. 왜 이제 좀 살만하니깐 가?!
솔직히 눈치 봐야 하는 사람이 없어지는 건 반갑지만 정황상 전혀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왜 그렇게 잘해줬는데! 아직까지 최태혁과 함께 사는 건 원래 목적이었던 친분 쌓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것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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