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놈이 우리 집에 머문 지 어언 한 달여 간. 밥을 1인분 더 차려야 한다거나, 더 신경 써서 차려야 한다거나, 얼마 전까진 온갖 시중을 들기까지 했기에 생각해보면 귀찮은 일이 많긴 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한 달 생활비로 현금 200만 원을 턱하고 안겨준 최태혁 덕분에 이번 달 일로 번 돈은 모두 빚을 갚는 데에만 쓸 수 있었고, 부실했던 반찬이 호화로워져 내 배에도 기름칠을 할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최태혁의 옷과 물건도 모두 그 돈으로 산 것이다. 남은 돈은 당연히 안 돌려줬다.
새로운 알바의 시급이 매우 높다지만 그래봤자 단기다. 하는 동안이야 좀 넉넉하게 살겠지만 그게 끝나면 또 예전 생활로 돌아가야 하는 거다. 적어도 최태혁 놈이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은 생활비 걱정은 안 해도 됐는데….
나는 당장 울래도 울 수 있을 것 같은 우울한 기분이 됐다.
“진호 씨. 밥 한 그릇만 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찌개가 죽이네요. 이 나물들도요.”
“야, 너가 가서 퍼먹어, 새꺄. 넌 손발이 없냐?”
“아, 나도. 내 것도 퍼다 줘.”
“넌 그냥 사투리나 연습하고 있어라”
“어? 야! 내 거도 퍼달라고!”
“저 새끼가 진짜!”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나의 안전이다.
돈 문제만이라면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싶지만, 지금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듯이 나는 아무래도 위험한 세계에 한 발을 들인 것 같다.
입만 살아서 시끄럽게 처먹어대기만 하는 저놈들에게 당당히 육두문자를 날리지 못하는 나의 조그만 간은 떠나려는 최태혁의 바짓자락이라도 잡고 늘어지라고 얘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저놈이 가면 놈이 멀쩡히 살아있었다는 것이 밝혀질 테고, 그게 밝혀지면 왜 저렇게 멀쩡한지 알아내려 할 테고, 그걸 알아내다 보면 결국 최태혁을 도와준 놈이 나라는 걸 누군가는 알게 될 테고, 칼까지 휘둘러 최태혁을 족치려고 했던 새끼들이 나를 잡아 족치고 싶어 할 수도 있을 거고…, 그럼 나는 또 죽을 테지.
생각만 해도 울컥 화가 치솟는다. 신은 대체 왜 나를 이런 하찮은 인간으로 만들어놔서 별 생고생을 다 시킬까.
“형…. 꼭 가야 해요…?”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으로 현관에 선 최태혁을 올려다봤다. 평범한 사내새끼가 하는 거라 효과가 얼마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놈이 입고 있던 티셔츠의 끝자락을 잡아 소심함과 절박함을 부각했다. 역겹게 보지만 말아다오.
다행히 최태혁은 매정하게 내 손을 쳐내는 대신 나를 내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내가 가지 않았으면 하나?”
당근이지. 아니면 내가 이 닭살 돋는 짓을 하고 있겠냐?
전에 말했듯 최태혁 놈 본인이 계속 우리 집에 머물면 누구라도 함부로 해코지는 할 수 없을 거다. 혹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해결해줄 거고.
무슨 일이 있어 그 꼴을 당했는지 몰라도 최태혁은 워낙 거물이라 누구든 잘못 건드리면 뒤에 버티고 있는 세력들에게 끽- 당할 테니까. 물론 그 전에 최태혁 놈한테 죽지 않으면 말이다.
아, 생각할수록 진짜 보내기 싫은데 방법이 없을까? 아까 애처롭게 쳐다보는 게 좀 먹혔던 것 같으니까 계속 그걸로 나가볼까. 나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결국 아까처럼 저 녀석이 가는 것이 매우 아쉽고 슬프다는 듯이 굴기로 결정했다. 이번엔 뭐라고 말해야 하지. 문득 떠오른 말을 해도 될까 고민이 되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에 내뱉어버렸다.
“네…. 형이 가면, 나 밤에 혼자 자야 하잖아요….”
“…강아지….”
뭐지? 지금 뭔가 엄청 기분 나쁜 단어를 들은 거 같은데?
그나저나 좀 먹히긴 한 모양인지 최태혁이 불쌍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 왔다.
저 새낀 꼭 드라이했을 때만 이러더라. 손을 쳐내고 싶었지만 꾹 참고 더 불쌍한 척을 했다. 올려다보던 눈을 내리깔고 잡고 있던 옷깃을 살며시 놓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셔야 하면 어쩔 수 없죠…. 기다리고 있다니까….”
원래 인간이란 붙잡을 때보다 놓아줄 때가 더 맘에 걸리는 것이다. 엄마가 버럭버럭 화낼 땐 죽어라 반항하던 자식이 그래, 네 맘대로 해- 하는 한숨 섞인 소리엔 아 또 왜 그래! 하며 시키는 거나 하게 되는 심리랄까. 내가 이래 봬도 명문대 출신이다. 은근히 똑똑하다고.
“걱정하지 말아라. 당분간은 무리겠지만, 자주 찾아올 테니.”
최태혁은 그렇게 말하며 내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살짝 굽혔다. 나는 어울리지 않는 놈의 행동에 살짝 당황했지만 그래도 티 내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무리하지 마세요.”
“진호야.”
그러자 최태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달래듯 내 이름을 불렀다. 왜 이러는 건데, 오늘. 나는 이러다 이 분위기에 홀려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재빨리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밀며 말했다.
“빨리 가시라니까요. 밖에서 기다리잖아요.”
“…전화하지.”
“네….”
결국엔 가는구나. 그래도 생각보다 나한테 정이라도 들었는지 내가 시무룩해 있단 것에 신경을 굉장히 쓰며 자꾸 안심시키려고 했다. 머리도 쓰다듬고, 꼭 안기도 하면서.
그런 놈이 징그러워야 하는데, 자꾸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냥…. 순수하게 같이 있었으면 싶기도 하고….
진짜로 시무룩해지는 마음에 얼른 놈을 보내려고 하는데, 놈이 나를 안고 있던 포즈 그대로 머리가 멍해지는 잔소리 폭탄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자기 전에 전화하는 것 잊지 마라. 일하고 있는 도중에도 전화할 수 있으면 바로 하도록 하고, 메시지로 정확한 출퇴근 시간 보고해. 학원 이동할 때 전화하고 도착하고 출발하는 것도 보고해라. 집에 도착했을 때도 당연히 연락 남겨놔.”
“네?”
“그 외에도 어딘가로 이동할 시엔 무슨 일이 있어도 나한테 전화하거나 연락 남겨놔라. 어떤 장소에 있든지 장소 보고도 잊지 마.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거나 무서워 보이는 놈들이 네 집 앞에 있으면 그대로 뒤돌아 뛰면서 나한테 전화하고, 혹시 밤중에 깨서 다시 잠들기 무서운 일이 생기면 시간 신경 쓰지 말고 전화해. 알았나?”
“…네.”
생각 외로 나한테 정이 듬뿍 들었나 보다. 누가 보면 애인 놔두고 가는 줄 알겠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야무지게 확인한 최태혁은 그렇게 현관문을 나섰다. 나가면서도 두어 번 뒤를 돌아보며 확인하는 모습에 나도 녀석이 차를 타기 직전까지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 뒤에 혼자 들어온 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적막했다.
* * *
-신원 확인 완료.
드디어 첫 출근 날. 파일과 함께 받은 카드를 쪽문 옆 센서에 대니 철컹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역시 매번 그 큰 문이 열리는 건 아니었다.
나는 얼른 최태혁에게 보낼 메시지를 쓰며 현관을 향해 걸었다. 일하는 시간이 길다고 화를 내는 최태혁에게 그만큼 자유시간이 있으니 틈틈이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기상 미션은 이미 완료한 상태니까 메시지면 되겠지.
메시지를 쓰다 보니 어느새 현관에 도착한 난 이번엔 다른 카드 키를 센서에 대고 문을 열었다. 이중 잠금이라니, 부자는 더럽게 몸을 사리는구나. 또 빈부격차를 느끼며 집안에 들어서니 집사 할아버지가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싱거운 인사를 나누자마자 할아버지가 몸을 옆으로 틀어 길을 비켜주었다. 바로 일하러 가라는 소린가 보다. 나는 다시 가볍게 묵례를 하고 어제 안내받았던 대로 엘리베이터 앞에 가 섰다.
음…. 그러니까, 민선우 방이 3층이었지? 무슨 놈의 집이 3층에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지만, 그냥 닥치고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내 돈 나가는 거 아닌데, 뭐.
금방 도착한 3층 복도에 내려서 걷자 그래도 한 번 봐놨다고 익숙한 문 두 개가 보였다. 갈색 문이 민선우 방, 베이지 문이 대기실이었던 것 같다.
나는 새로 온 가정부임을 신고하고, 얼굴도장을 좀 찍어 둘 겸 갈색 문을 두드렸다. 똑똑-. 보이는 대로 고급스러운 나무였는지 기분 좋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지금 있을까?
“들어오세요.”
다행히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민선우의 것 같은 부드러운 저음이 나무문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진짜 금일까 봐 두려운 노란색 손잡이를 살며시 내려 문을 열었다. 슬그머니 벌어지는 틈 사이로 머리부터 집어넣은 나의 눈에 보인 것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반쯤 몸을 돌리고 있는 남자, 예상한 대로 민선우였다.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 짙은 갈색 눈동자. 적당한 색과 크기의 입술은 무표정일 때에도 끝이 살짝 올라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고 살짝 쳐진 눈꼬리가 전체적인 상을 부드럽게 만들지만, 오뚝한 코나 얇은 턱은 얕볼 수 없는 고귀함을 풍겼다.
늘씬하고 긴 목 아래로 이어져 있는 몸은 늘씬하게 쭉쭉 뻗어있고, 언뜻 가는 듯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자면 옷 아래에 단단한 근육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완벽한 모델 체형이었다. 절대 작다고 볼 수 없는 그의 키는 피부도 하얀 편인 그를 남자답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는 대학 내에서도 타인에게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친해지고 싶은 선배, 사귀고 싶은 남자 등을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그의 이름을 댈 정도로. 그런 그가 바로 나의 두 번째 공략대상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일하게 된 김진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처음 만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민선우에게 최대한 좋은 인상으로 다가가기 위해 활기차게 인사하며 들어갔다. 민선우는 의자에 앉은 그대로 고개만 들어 나를 보더니 이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민선우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씨발, 이놈이나 저놈이나. 또 짜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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