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 네.”
“저는 이 저택의 관리와 총 책임을 맡고 있는 최산태라고 합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내일부터 하실 일과 집 구조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앞장서서 나에게 집을 안내하는 백발의 정장 할아버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중세시대에 온 듯, 동화책에나 나올 것 같은 집사 할아버지의 이미지 딱 그대로인 분이셨다.
뒤로 깔끔하게 넘긴 백발, 웃을 땐 인자하나 만만해 보이지 않는 인상, 검은색 쓰리피스 정장, 곧은 자세, 각 잡힌 행동. 우아해 보이기까지 하는 할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띠고 간간이 나를 돌아보며 친절하게 집 구조를 알려주었다.
“이제 집 구조는 아셨을 것 같으니 주의사항과 하실 일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안내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엘리베이터는 4층까지 있지만 고용인들은 3층까지만 사용 가능하고, 1층의 특정 구역은 회장님 부부의 공간이므로 출입하지 말 것. 지하에 메인 주방이 있지만 각 층에도 작은 주방이 마련되어 있으니 되도록 배정된 층의 주방을 이용할 것. 그리고 나는 민선우와 관련된 모든 집안일, 예를 들어 청소와 빨래, 간식 및 식사 준비와 심부름 등을 맡아 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나를 향해 돌아서는 할아버지를 향해 잘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조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저택엔 회장님과 사모님을 포함해 큰 도련님, 작은 도련님, 셋째 도련님과 위의 분들과 다소 나이 차가 있으신 막내 아가씨께서 거주하고 계시지만, 현재 회장님 내외분은 해외여행 중이시고 큰 도련님께선 해외 출장, 셋째 도련님과 막내 아가씨께선 해외 유학 중이셔서 실제 머물고 계신 분은 둘째 도련님뿐이십니다. 근무시간에 도련님께서 저택에 계실 땐 도련님 옆방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항시 대기하셔야 합니다.”
나는 대기실이란 말에 아까 보여주셨던 방을 떠올렸다. 컴퓨터가 놓여 있는 작지만 깔끔한 책상과 의자, 그 옆에는 편해 보이는 1인용 소파가 있었다. 특이한 점은 소파 옆 콘솔에 램프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설명에 의하면 민선우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어떤 버튼 같은 것을 누르면 그 램프가 울리는 모양이었다.
“출퇴근 시간은 각각 오전 8시, 오후 5시입니다. 휴일은 일주일에 이틀이나, 요일은 매주 도련님의 스케줄과 필요에 따라 달라질 예정으로, 일주일 전에 공지될 예정입니다. 혹여 개인 사정이 생겨 못 오게 되실 경우 되도록 하루 전에는 꼭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급여는 단기간인 관계로 시급으로 계산될 예정입니다.”
아까 들었는데, 이곳은 기본 1년 단위로 계약을 한다고 했다. 그 경우에는 월급으로 지급된다고. 나는 이 정도 조건이면 엄청난 일자리가 아닌가 싶은 마음에 순간 장기 계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떨쳐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여기 들어온 목적을 잊지 말자, 김진호. 집중하자.
“이곳에서 근무하며 겪는 일과 보는 일, 지급 받는 모든 물건 및 서류는 일체 외부 발설과 타인 공유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회사를 통해서 근로 계약서와 비밀 유지 계약서에 서명하신 걸로 알고 있으니 더 다른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따로 질문하실 사항이 있으신가요?”
“어…. 아, 아니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나가실 때 받으실 파일엔 도련님의 간단한 신상정보와 저택의 내부 구조도, 주의사항 목록, 비상 연락처 그리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다른 고용인들의 사진과 성명, 고용된 분야에 대한 사항들도 서류화하여 정리해 놓았습니다. 댁에 가셔서 필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현관문을 나가시면 미리 대기시켜놓은 안내인이 파일을 들고 있을 겁니다. 그가 대문까지 배웅해드릴 테니 전 여기서 인사를 드리도록 하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아, 예! 안녕히 계세요.”
정신을 차리자 나는 두꺼운 파일 뭉치와 함께 어느새 집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놀라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조곤조곤 정갈한 설명에 홀린 것 같았다.
민선우랑 친해지겠다는 목적으로 들어간 것도 잊게 만들 만큼 매력적인 직장. 그게 민선우의 집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 * *
성인 남자들이라면 꼭 한 벌씩 가지고 있는 옷이 있다. 몸매 테러 종결자가 아닌 이상 입는 순간 세련미를 확 올려주는 마법의 옷이자 남성미를 물씬 풍길 수 있도록 해주는 고마운 존재. 바로 정장이다.
면접을 볼 때도, 작업을 걸 때도, 격식을 차리고 싶을 때도, 장례식에 갈 때도 이것 하나만 있으면 복장 고민은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다.
쓰임새가 많은 만큼 디자인도 많은데, 사실 기본 정장만 있어도 되지만 인간은 발전하는 동물이라 단순한 것을 극도로 회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갖가지 상황에 맞춘 미묘한 차이를 가진 디자인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역시 베이스는 같은 검은색인.
민선우네 집사 할아버지가 입고 있었던 것도 검은색 쓰리피스 정장이었고, 파티의 연미복도 검은색이며, 멋있지만 왠지 바람둥이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투 버튼 정장도 검은색, 정장 코트의 기본색도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검은색 정장은 멋지고, 쓰임새도 많고, 그만큼 흔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새 보이기 시작한 마이 스윗 러블리 하우스 앞에 있는 검은색 정장 무리는 절대 특이한 것이 아니다.
이 근처에서 뭔가 하나 보지. 나도 모르는 새에 큰 회사가 세워져 창립 행사를 한다거나, 아니면 뭔가 파티가 열렸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사실 이건 별로 생각하기 싫지만…. 장례식이 있다거나.
정말 생각도 하기 싫은 예지만, 굳이 우리 집 앞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다 잠시 수다를 떨기 위해 멈춰 섰는데 그게 우리 집 대문 앞 반경 1m 이내였을 뿐이겠지.
나는 갖가지 생각을 하며 떨리는 손을 마주 잡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저 사람들은 추위를 많이 타서 붙어 있는 거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건 누굴 찾는 게 아니라 부끄러움이 많아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거라고.
그래, 그런 거야. 너무 심한 부끄럼쟁이들이라, 내가 그들의 비밀스런 얘기를 들었을까 봐 날 발견하자마자 죽일 것 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얼어버린 듯 말을 듣지 않는 발을 간신히 뒤로 한 발짝 움직였다. 별거 아니다, 김진호. 저 맨 앞에 선두인양 서 있는 투 버튼 정장 차림의 바람둥이처럼 생긴 녀석은 절대 나에게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니야.
나는 다급하게 뒤를 돌았다. 집에 어제 미리 사놓은 게가 있지만 오늘은 왠지 고기를 먹고 싶으니 정육점에 가야겠다.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그 순간 어깨에 단단한 손이 닿았다.
“저기….”
“으아가아아아가아가아아므어라아아아각!”
머릿속에 비상등이 울리는 것 같았다.
검은 정장 무리, 집 앞,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던 나. 난 죽, 을 거야. 또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을 거야. 초, 총. 총을 꺼내 들겠지. 나한테 쏠 거야. 어떡하지? 어떻게 해? 난 죽었는데, 나 왜 살아있지?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나도 살려줘, 나도 봐줘. 나도 구해줘. 싫어, 싫어! 나를 귀찮다는 눈으로 보지 말란 말이야!
“저, 저기…. 괜찮으십니까? 이봐요!”
“내가…. 뭘 잘못했어.”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눈에 띄지 않게 잘살고 있었는데. 삶이 아무리 개 같아도 별로 울지도 않았고, 불평도 안 했잖아. 꿋꿋하게 웃으면서 살았는데, 왜…?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나 아무것도 안 했잖아. 차라리 그냥 내버려 둬. 도대체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눈앞이 까매졌다. 옆에서 뭐라 외치는 소리도 멀게만 들렸다.
“이… 이런. 왜 우십니까? 저기요! 이봐요! 제 말 들리십니까?”
“…죽 …일… 정….”
“예? 뭐라고 하는 겁니까? 이보세요!”
“거, 검은… 검은 정장…. 죽일 거야…. 나, 나, 나를….”
“검은 정장? 지금 이 옷 때문에 이러시는…. 젠장! 이봐! 다들 재킷 벗어!”
“예, 형님!”
불현듯 시야가 조금 맑아졌다. 검은색… 이 없어졌다. 아니, 없어졌다기보단 줄어들었다. 그제야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서 있는 내 앞으로 누군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듭니까?”
“…예?”
“참나-. ‘예?’라니요. 당신이 지금 어떤 꼴인지 몰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무… 슨…, 어…?”
나는 온몸을 웅크린 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이런, 설마 소리도 낸 건 아니겠지.
* * *
“그래서, 내 똥강아지가 너희들 덕분에 이런 꼴이 됐단 말이지.”
태혁은 지금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다. 자신의 품에 있는 진호가 앞에 있는 놈들을 보고 보였다는 반응 때문이었다.
“똥강…? 잠깐, 아니 꼭 저희 때문이라기보단-.”
“네 놈이 어깨를 치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며. 거기다 그대로 귀를 막은 채 영문모를 소리를 중얼대며 울었다고 방금, 네 놈이, 말했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 그게 왜 저희 탓입니까!?”
억울해 보이는 외침에도 태혁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애초에 사내의 변명을 들어줄 생각으로 한 말도 아니었다.
“너희를 보자마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사람에게 굳이 다가갈 필요가 있었나?”
“아니, 그건…!”
사내는 이 순간 과거의 자신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태혁의 질문에 평소처럼 시간 순서에 따라 매우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그게 이렇게 싸늘한 추궁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자신이 정말 무언가 잘못을 한 것이라면 어떤 질책이라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이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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